〈 201화 〉 13. 영웅 (3)
* * *
“으음…”
크렉은 머리를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소 혼란스러웠지만 이내 상황을 천천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분명 자신은 용사의 도움을 받아 7번째 이면까지 도달했다.
다른 이들 역시 올라오려 했으나 더 이상 팔라딘들과 사제들의 능력으로는 무리였기에 용사들과 자신, 그리고 부제사장인 미누아만이 7층에 올라오게 되었다.
그런 뒤 악마들을 마주했고…
‘왜 여기 있는 거지? 미누아랑 용사는 어디 가고.’
크렉은 주변을 돌아봤다.
노을이 물드는 도시 외각과 이면의 문이 열린 흔적이 드러난 바닥.
저 멀리에는 말다툼 소리가 들린다.
‘확인해볼까.’
크렉은 발걸음을 옮겨 소리의 근원지로 향했다.
“...”
그 뒤를 조용히 따라가는 하나의 인영과 함께.
도시 외각의 막사.
마수들이 끊임없이 쏟아지는 이면의 문을 막기 위해 임시로 설립한 기지에 갈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가 탁자를 쾅! 쳤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말이 안 될 것도 없지. 크로아.”
크로아라는 여인을 마주 보고 앉아있는 남자, 아즈라는 의자를 꾸욱 뒤로 당기며 말했다.
“영웅이면 그라티아님의 가호 아래 도시를 수호할 의무가 있다. 그러니 당연한 이야기다.”
“그 소리가 아니잖아! 이면으로 쳐들어 간다니!”
“그게 뭐가 문제인가.”
“뭐?”
크로아의 물음에 아즈라는 피식 웃으며 자신의 옆에 있던 기다란 장검을 집어 들었다.
“마수는 약하다. 그리고 우리는 강하다.”
“...”
“그리고 그라티아님의 가호까지 받았지. 그런데 우리가 밀릴 거라고 생각하나?”
영웅은 강하다.
개개인은 이미 한 국가의 전력과도 맞먹는다.
폭풍이나 산사태 같은 자연재해를 막거나 온몸이 타들어가는 용암 속에서도 수년을 버틸 수 있다.
그렇기에 파도처럼 밀려오는 마수를 손쉽게 잡아낸 것이다.
하지만 이변이 나타났다.
‘악마의 출현.’
검푸른 안개를 두른 악마는 이면 속에서 튀어나와 자신을 따르는 악마들과 함께 도시를 공격했다.
그에 가장 먼저 토벌에 나섰던 아홉의 영웅 중 셋이 큰부상을 입고 쓰러졌고, 뒤이어 막으러간 나머지 여섯도 중상을 입고 황급히 물러났다.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악마가 그 강력한 영웅을 모조리 박살 낸 것이다.
악마는 영웅이 모두 쓰러진 틈을 타 홀리에린의 모든 팔라딘들이 타락시켜 주민들을 마구잡이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영웅의 빈자리를 메꿔주던 팔라딘들은 한순간에 도시의 수호자에서 사악한 침략자의 하수인으로 변했다.
만일 그 사태를 그라티아님께서 빠르게 막지 않으셨다면 도시의 절반 이상은 죽어나갔을 거다.
굉장히 분노한 그라티아님은 악마를 직접 몰아내며 사태는 마무리되었다.
갑작스러운 과거 얘기에 그날의 상처를 떠올리듯 왼쪽 팔을 움켜쥔 크로아가 그를 노려봤다.
“그래, 악마는 죽었어. 근데 그게 이면에 들어가야 할 이유는 아니야.”
“그라티아님은 악마를 죽이신 게 아니다. ‘몰아 내신 거지.’ 적어도 악마는 살아있다.”
아즈라는 이면의 문의 흔적이 남은 땅을 가리켰다.
“저 이면 속에 말이야.”
“...뭘 어쩌자고. 네 말대로라면 그라티아님 조차 못 죽인 악마를 죽이러 가자는 거야?”
“그래. 바로 그거다.”
검에 있어 극의에 달한 영웅, 아즈라는 자신의 검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더 강해졌다. 악마라는 새로운 적에 대항할 무기를 그라티아님께서 내려주셨다.”
“...”
“게다가 악마가 등장한 이후 이면에서 나오는 마수가 점차 강해졌다. 이대로 가다간 밀릴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그라티아님이 있어. 힘이 부족해도 그분이 나서신다면─”
“그런 역할을 맡은 것이 바로 우리입니다.”
막사 한구석에서 얇은 레이피어를 닦아내던 영웅, 루소니아는 은빛의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말했다.
“우리는 영웅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맡은 것은 도시의 수호.”
끼익.
루소니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우리가 사악한 이면의 적을 처치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죠.”
“그… 그 악마는 너무나도 강하잖아. 어떻게 이기겠다는 거야.”
단검을 양 허리에 차고 있던 크로아는 그날의 전투에 몸서리 쳤다.
끔찍할 정도로 짙고 날카로운 안개를 다루는 악마.
어찌나 강한지 그저 안개의 가시에 닿기만 해도 온몸이 찢겨나갈 것 같았다.
그녀는 아직도 자신을 비롯한 영웅 셋을 단번에 제압하던 그 악마의 표정을 잊지 못한다.
마치 벌레를 내려다보듯 한심하게 쳐다보는 그의 모습을.
“악마를 두려워하는가.”
“그거야 당연…”
크로아는 말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제 막 막사를 들어오는 영웅이자 주술사인 베덴디스와 에레가 보였다.
방금까지 막 마수를 처리하고 온 듯 그들에게 걸린 깃털 목걸이가 웅웅 울렸다.
백색의 짧은 머리를 한 베덴디스는 자리에 풀썩 앉았다.
“나 역시 그렇다. 그때의 악마가 보인 위용은 정말 끔찍했으니까.”
“그럼 반대를…!”
“하지만 나 역시 이면은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
지팡이를 소환해 허공에 움직이는 그림을 만들어낸 베덴디스는 막사에 있는 모든 영웅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림 안에는 이면의 모습이 보였는데 전보다 훨씬 많은, 그리고 어마 무시한 마수들이 척척 집합하며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림을 본 크로아는 기겁했다.
“설마 저거 다…”
“그래. 이면에서 쏟아지는 마수가 점차 많아지고 있다.”
“악마도 포함되어 있는 건가?”
“물론.”
베덴디스는 막사 침대에 걸터앉은 창을 다루는 영웅의 말에 대답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마수는 점점 더 강해진다. 더 이상 막아낼 수 없어. 이대로 막고 막고 또 막아내다 결국 부러질 뿐이야.”
끊임없이 공격을 막아내는 방법은 계속되는 수비가 아니다.
우리가 가야 한다.
저 사악한 무리의 본거지로 직접.
“...난 반대야.”
“크로아.”
“그날처럼 또 무력히 당하라고? 그라티아님의 힘을 빌려도 안되는 건 안 되는 거야! 만일 실패해 죽기라도 하면, 우리의 빈자리를 누가 채우지? 저 도시의 시민들? 아니면 백분에 일도 안남은 팔라딘들이?”
“누구든 상관없겠지요.”
“누구든.”
그녀를 제외한 막사 안의 영웅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크로아가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자 아즈라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크로아. 우리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야. 우리는 언제든 대체될 수 있어.”
“...”
“위대한 그라티아님의 영웅은 그 누구든 될 수 있지. 도시 한구석에서 낙서하는 아이도, 과일을 파는 장사꾼도, 부상을 당한 평범한 팔라딘도. 그 누구도.”
“...하.”
“이건 당연한 거야. 물론 스스로를 낮추라는 소리는 아니야. 단지 그 자리의 무게를 너무 두지 말라는…”
“미쳤구나, 다들.”
크로아는 걸음을 성큼성큼 옮겨 막사의 천막을 걷어냈다.
앞에 한 팔라딘이 흠칫 놀라며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있었지만 지금 그녀에게 그런 걸 신경 쓸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난 안가. 니들끼리 처 가서 죽든 말든 하든가.”
“크로아. 이건 감정적으로 할 게 아닌…”
“감정은 네가 가지고 있는 거겠지, 아즈라.”
“...”
그녀는 그대로 막사를 떠나갔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크렉은 막사 주위를 빠져나오며 방금 전 일을 떠올렸다.
막사 안에 있던 집행관 루소니아님과 제사장 베덴디스님.
칠 영웅전에서 수십, 수백 번을 본 석상과 똑같은 얼굴을 한 이들.
막사를 나와 자신과 눈을 마주친 단검의 영웅, 크로아까지.
분명 칠 영웅분들과 두 도시의 대리자님이 확실하다.
‘헌데… 왜?’
어째서 자신은 이곳에 왔는가.
아니 애초에 왜 영웅들이 서로 대립하고 있는가.
‘...설마. 과거로 온 건가?’
대화의 내용과 상황을 유추해 봤을 때 지금은 영웅들이 이면으로 들어가기 전 상황 같다.
이미 200년 가까이 지난 과거.
“...설마. 진짜?”
“뭘 진짜라는 거지.”
“...!”
펄럭!
크렉은 갑작스레 나타난 인기척에 몸을 빠르게 날라 뒤로 후퇴했다.
...원래 자신의 몸이 이리 빨리 움직였던가?
허나 지금 크렉에게 자신의 몸 따위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눈앞에 나타난 한 사람 때문에.
“아아…”
“팔라딘 치고는 재미난 친구 군. 몸이 아주 빨라. 팔라딘보다는 주술사에 가깝구만.”
허허 웃는 노란색의 머리카락과 다부진 체격.
등 뒤에 매달린 백색의 방패와 언제든 소환할 수 있는 창이 담긴 빛의 팔찌까지.
‘...크리드아.’
나의 아버지.
그가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그래서 새로 들어온 팔라딘 이구나.”
“네...”
“빌어먹을 악마 놈 때문에 팔라딘이 많이 죽어서 너같이 뛰어난 인재가 많이 없다는 게 아쉬웠는데. 잘 되었다.”
영웅, 크리드아는 웃으며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크렉을 옆에 두고 막사 주변을 걸었다.
막사 근처로는 제법 많은 인원의 팔라딘과 주술사, 그리고 보조 병력들이 바쁘게 몸을 움직이며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저… 무얼 준비하는 겁니까?”
크렉은 이미 알고 있지만 혹여나 해서 한 번 더 물었다.
막사에서 들은 사실이 거짓이길 바라며.
사실 이 모든 것이 그저 꿈같은 환각이길 바라며.
하지만.
“그야 당연히 이면을 토벌하러 가는 것이 아니겠나.”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만일 진짜 과거로 온 것이라면.
나의 아버지, 크리드아가 죽기 전으로 온 것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든 이면으로 보내면 안 된다.’
자신의 심각한 표정을 본 크리드아는 어깨를 팡치며 껄껄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이면의 마수들과 악마 놈들이 강하긴 하나 너희를 사지로 몰 일은 없을 거다.”
악마 놈들은 영웅이 맡을 터이니.
크리드아는 웃으며 그리 말했으나 그런 그의 말에 크렉은 더더욱 절망했다.
안된다.
그 악마라는 것이 얼마나 강한진 모르겠지만 마주하면 무조건 죽는다.
‘미래는 그러했으니까.’
크렉을 이를 꽈악 물며 앞서나가는 크리드아의 등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