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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4화 〉 13. 영웅 (6) (204/318)

〈 204화 〉 13. 영웅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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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의 마력이 내 몸을 휘감자 거대한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흑백색과 녹색이 충돌하고 둥지의 나뭇가지들이 지탱하는 힘을 잃고 사방팔방으로 튕겨져 나간다.

히아트의 검, 찬란한 빛을 손에 쥔 나는 가볍게 검을 들고 선언했다.

“창대하여라.”

콰아아아아앙!!!

히아트의 반신이 깃들기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빛의 기둥이 차원을 뚫고 그라티아의 이면을 직격했다.

대부분의 빛이 그러하듯 빛은 모든 악을 배제한다.

그리고 눈앞의 이면은 비록 ‘빛’으로 시작했지만 타락한 ‘악.’

초월적인 악에 의해 ‘만약’이라는 이름으로 창조된 가짜.

때문에 아무리 그라티아로부터 비롯되었다 한들, 악인 이상 빛에 굉장히 취약했다.

[크읏…!]

창백한 빛이 그라티아의 거체를 짓누르고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악을 태우려 들었다.

후욱…

그라티아의 칠흑으로 물든 눈이 번뜩이자 일순 어두워진 하늘이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세상의 모든 어둠이 그녀에게 스며 들어온다.

파도처럼 밀려들어오는 마기에 그라티아 거체가 더욱더 커졌다.

어느새 산보다 거대해진 그라티아의 이면은 거대한 앞발을 내질렀다.

특별한 기술이 담긴 공격이 아닌 그냥 내지름.

쿠와아아앙!!!

그러나 앞발에 담긴 마력이 대지를 내리찍자 거대한 마력의 폭발이 터져나갔다.

둥지가 날아가고 대지가 뒤집힌다.

한참을 거칠게 요동치던 대지가 서서히 잠잠해지고 그라티아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정말이지. 이번에도 실패군요.]

“음.”

강대한 어둠을 막아낸 나는 몸을 빠르게 회복시키며 잔해 속을 걸어 나왔다.

빛이 어둠을 배제하듯,

어둠 역시 빛을 배제한다.

어둠과 빛은 서로가 서로에게 치명적인 우위 상성이니까.

괜히 성직자나 팔라딘들이 어둠에 쉽게 타락하는 게 아니다.

지금의 나는 빛과 관련된 장비와 가호, 계약 등을 위주로 하고 있지만 마기에 한해서도 꽤나 높은 수준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물론 신성과 마기. 둘 모두를 다루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예외는 있는 법이다.

어두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라티아의 이면은 질린다는 듯이 말했다.

[보면 볼수록 신기하군요. 어떻게 그 두 힘을 공존시키는 거죠?]

“내가 좀 특이해.”

모든 속성의 상성과 이능을 서로 잡아먹게 두지 않고 일정하게 유지시키는 능력.

엄밀히 따지면 내 능력은 아니다.

내 몸속에 담긴 특이점이 그것을 가능케 만들고 있는 것뿐.

[그런데… 사실입니까?]

“뭐가?”

[제라드 말입니다.]

어느새 지상으로 내려온 그라티아의 이면은 그날을 떠올리듯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이 죽였다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제라드는 로드리아의 환각 속에 칩입 해 자신의 능력을 극대화한 후 나를 죽이려 들었다.

제라드는 초월의 악마.

말 그대로 초월을 한 악마로 초월자의 격을 가진 악마였다.

그때의 나도 특이점이나 레빗의 도움이 없었다면 죽는 것은 내가 됐을 거다.

그만큼 제라드는 강했으니까.

그리고 그 제라드는 눈앞의 이면을 탄생시킨 주범이기도 하다.

[항상 의문이 들었습니다. 어째서 나는 존재하는가.]

이면은 검고 기다란 날개를 펄럭였다.

[나에게 본체의 기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이면이 뒤틀리기 시작한 이후로 말이죠.]

[나는 기억이 있습니다. 과거의 그라티아로서 살아온 기억이. 하지만 당신의 그 검을 본 순간 알았습니다.]

‘그 기억은 제대로 된 기억이 아니라고,

그건 어느 누가 적당히 끼워 맞추어 나에게 강제로 주입시킨 기억이라고.’

“주입? 제라드?”

[제라드일 수도 있고요. 아니, 그라고 확신했습니다. 17번째 죽음 전까지는.]

눈을 가리고 특이점을 이용해 리젠 시간을 줄여 18번째 이면을 마주하던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여태껏 이런 말은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관리자의 눈을 가린 채로 특이점을 쓴다는 건 상당한 무리가 있기에 나는 평소보다 힘을 더더욱 억제해야 했다.

3번은커녕 5,6번 때 정보창을 써야 하는 수준.

능력치 자체는 환각을 이겨낸 후보다 더 적을 것이다.

때문에 가끔 대화를 하긴 했지만 치열하게 싸우고 승패를 가를 뿐, 유의미한 대화를 한 적은 없다.

굳이 할 필요도 없었고.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뭐가 다른데?”

[제라드는 저보다 훨씬 높은 격의 존재입니다. 본체도 마찬가지죠. 본체가 제라드를 몰아낸 것은 자신의 고유 권능 안에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제라드는 이미 죽었다.

그라티아의 능력으로는 당연히 가짜 제라드를 소환할 수 없다.

제라드 자체는 완전히 소멸한 상황.

그 시선자가 죽었으면 그가 남긴 것들은 자연스레 사라지거나 서서히 힘을 잃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그라티아의 이면은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아래에 쿠궁쿠궁 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면의 눈동자에 아주 조그마한 빛이 스며든다.

[달라졌습니다. 밑에서 올라오는 무언가 때문에.]

이면의 어둠이 갉아먹히기 시작했다.

­

하아… 하아…

촤라라락!!

하아… 크읍… 하아…

콰직…

­그… 만…

하아… 제발… 죽...

“그만! 크로아!”

귀를 찌를듯한 외침에 한없이 좁아든 시야가 넓어진다.

자신의 팔목을 잡은 크리드아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크로아 역시 숨을 헐떡이며 그를 자세히 보았다.

녀석의 왼쪽 팔이 보이지 않는다.

“너… 팔이.”

“우선… 물러나고. 진정해라.”

크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뒤로 벗어났다.

그제야 전장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다.

피와 땀을 뻘뻘 흘리며 악마의 움직임을 막는 베덴디스.

온몸을 피로 점칠 한 채 기둥에 처박혀 숨만 고르고 있는 루소니아.

주위에 부서진 빛의 검의 파편을 흡수해 체력을 회복하는 아즈라.

그리고...

“뭐야. 팔라딘이 어떻게 살아 있…”

“녀석이 날 구했다.”

한쪽 팔은 잃은 크리드아가 빛으로 출혈을 막으며 말했다.

크로아를 포함한 네 명의 영웅만이 보랏빛 연기에 휘감겼다고 한다.

보랏빛 연기는 악마의 공격을 보호하는 기체 형식의 마력이었다.

하지만 크리드아는 그 연기를 받지 못했다.

때문에 크리드아는 꼼짝없이 죽을 위기에 처했지만 크렉이라는 녀석이 목숨 걸고 방패를 치켜올려 막았다.

“그만한… 힘을 숨기고 있었다고?”

“숨기는 게 아니었지. 녀석도 알게 모르게 수많은 병력들과 싸우고 있었어.”

그리 말한 크리드아는 크렉을 바라봤다.

사악한 악의 하수인으로 부활한 무트라의 심장을 꿰뚫은 크렉은 죄책감에 휩싸인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일 녀석이 없었다면 자신들의 동료를 죽이거나 혹은 죽어야 하는 끔찍한 상황이 벌어졌을 거다.

“...어떻게…”

“우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악마는 아직 죽지 않았어.”

크로아는 크렉에게서 고개를 돌려 드레투라를 바라보았다.

전과 달리 다소 불안정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마기 하나만큼은 여전히 흉흉했다.

하지만 녀석이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는 것.

그거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큭큭… 아, 일이 이렇게 되니 로드리아 녀석의 심리를 알 것 같군요.]

“...뭐라는 거야.”

[좋은… 뜻입니다. 당신들이 좀만 더 몰아치면 내 목을 딸 수 있다는 소리니까요.]

악마는 여전히 웃으며 수인을 그었다.

붉은빛의 마법진 5개가 떠오르더니 가운데 틈으로 수많은 사슬이 영웅들을 노리기 시작했다.

크로아는 단검을 두 개 교차시켜 붉은 사슬을 부셔냈다.

보랏빛 연기에 휩싸이기 전에는 베덴디스나 에레의 도움이 없다면 막아낼 수 없는 공격.

파캉!

하지만 지금은 너무나도 쉽게 공격을 파훼했다.

콰직─

스각.

...투둑.

주위를 돌아보니 다들 만신창이의 몸으로 간신히 막아냈다.

부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으나 그 공격을 행하기에는 힘과 체력이 너무 부족했다.

마지막으로 사슬을 부순 크리드아는 크로아를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크로아.

­...? 왜 전음을?

이 상황에서 굳이 전음을 보낼 이유가 있나?

아무리 몸 상태가 엉망이라고 해도 전장의 구도와 승패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의 판단력은 가지고 있다.

이 상황은 자신들의 승리.

우리가 비록 만신창이긴 해도 상대는 이미 회생 불능이다.

악마의 몸은 검 보랏빛의 피를 뚝뚝 떨어트리고 있으며 병사들은 죄다 죽은 상태.

더불어 놈의 마력은 방금 전의 공격으로 모두 소진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전음을 보내는 걸까.

­네 몸.

­내 몸?

내 몸이 뭐가 어떻다는 건가.

크로아는 자신의 몸을 천천히 내려다보았다.

온몸에 상처가 가득하고 단검을 든 두 손이 벌벌 떨린다.

마력 회로는 이미 망가진지 오래이며 얇은 갑옷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한지 오래다.

하지만 크로아의 가장 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무슨…’

그라티아님의 빛을 사용할 때는 항상 온몸이 백색의 마력으로 물든다.

빛의 힘의 가호를 받아 사용하기에 당연한 일.

하지만 지금 크로아의 몸은 보랏빛 마력과 백색의 마력으로 뒤섞인 상태였다.

­내, 내가 마기를…

­진정해라.

­마기가 몸에 들어왔어… 게다가 빛이 흐려지고…”

정신없이 싸울 때는 몰랐다.

시야가 좁아지고 오직 싸움을 위해서 정신을 하나로 모았으니까.

고통도, 감각도, 그 무엇도 전투를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수를 동원해 악마를 몰아 붙였다.

그리고 결과는 성공이지만 반대로 처참했다.

어느새 크로아의 몸에는 빛 보다 마기가 더 가득했다.

“크읏…”

긴장이 풀리자 온몸이 욱신거린다.

몸을 휘감는 마기와 그것을 막아내려는 빛이 충돌하지만 이미 승패가 갈렸다는 듯이 마기는 빛을 꾸역꾸역 먹어치우며 상대를 타락시켰다.

“으으…”

­정신 차려라. 크로아. 다른 녀석들을 둘러봐라.

­녀석들…?

크로아는 이미 검게 물든 왼쪽 눈 대신 오른쪽 눈을 뜨며 영웅들을 보았다.

다들 숨을 고르며 말은 안 하지만 이미 절반 정도는 검게 타락한 상태였다.

가장 변하지 않은 건 악마의 목을 따는 크렉이라는 녀석과 자신 옆에 있는 크리드아 뿐.

‘큭. 역시 팔라딘이라 이건가.’

그라티아의 수호자이자 그 잘난 신앙심이 가득해야 선택받을 수 있는 자격.

크리드아놈이야 그렇다 쳐도 크렉이라는 녀석은 대체 뭐길…

‘...내가 무슨 생각을!’

크로아는 방금 전 떠오른 혐오스러운 생각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런 그녀의 머릿속으로 절대 들려서는 안되는 하나의 전음이 스며들었다.

­우리 중에 배신자가 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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