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5화 〉 13. 영웅 (7)
* * *
영웅은 검푸른 악마를 보았다.
처음에는 당연히 악마를 적대했다.
감히 누구의 영역에 들어와 있는 거냐.
당장에라도 악마를 쫓아내거나 가차 없이 죽여야 했다.
재미난 생각을 가지고 있구나.
하지만 눈앞의 존재는 단순히 이면에서 볼 수 있는 저급한 악마가 아니었다.
거대한 마력은 그저 대면하는 것만으로도 존재를 압도했고, 그 강함은 자신이 그동안 상상하던 그 어떠한 힘보다도 더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말 그대로 초월적인 존재.
그런 그가 제안을 했다.
영웅은 고민에 잠겼다.
확실히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더 이상 자신들은 평범한 도시의 병사로 남지 않을 거다.
하나하나가 위대한 전사로 남게 된다.
또한 도시의 모든 이들이 존경할 것이며 자신의 신조차 우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신화와도 같은 위대한 영웅적 존재로 남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런 자리를 쉽게, 그리고 모두가 차지할 순 없지. 위대한 존재는 그 수가 적으면 적을수록 더 위대해지는 법이다.
역시 악마 다운 제안일까?
악마가 건넨 제안은 간단했다.
위기를 고의로 불러온다.
그리고 그것을 막는다.
너무 간단한 일이지만 영웅은 알고 있다.
이 일이 어떻게 작용하게 될 것인지.
또 위대한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 희생될 녀석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
알지만.
그래서, 포기할 건가?
'...아니.'
포기할 수 없다.
이대로 자연스레 잊혀지고, 또 사라져 버릴 수 없다.
설령 오래된 인연을 저버리더라도.
무관심하지만 자신들을 지켜보는 도시의 주민들을 저버리더라도.
나의 신을 저버리더라도.
영웅의 목에 걸린 무언가가 짙게 물들었다.
후우...
크렉은 악마의 목을 베고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순간 터져 나온 악마의 능력은 상상이상이었다.
영웅들을 믿고 크게 드러나지 않는 선에서 활동했는데 그것이 독으로 작용할 줄은 몰랐다.
'그 짧은 틈에 다 죽이다니.'
정확히는 보라색 연기에 휩싸인 네 명의 영웅.
아즈라, 베덴디스, 루소니아, 크로아.
그리고 연기에 휩싸이지 않은 자신과 아버지 크리드아 까지.
여섯을 제외한 모두가 죽었다.
'...다들 부상이 심각하군.'
미누아로 추정되는 무언가가 7층을 쓸어버렸기에 과거가 어느 정도 달라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방금 전투를 보니 알겠다.
굳이 개입하지 않았더라도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을 거라고.
만일 자신이 처음부터 악마를 몰아 붙였다고 해도 악마는 어떡해서든 지금 살아난 이들을 제외한 모두를 죽였을 것이다.
실제로 제사장님과 집행관님의 증언에 따르면 7층 이후로 네 명의 영웅밖에 남지 않았다 했으니까.
'그렇다면 미누아는 어떻게 된거지? 이곳에 도착하지 않은 건가? 아니면 지나갔나? 미누아가 아닐 가능성도...'
수많은 의문들이 머릿속을 메웠으나 상황은 그것을 풀게 두지 않았다.
저 멀리서 들어온 잔뜩 쉰 거친 목소리 때문에.
"다들, 얘기 좀 하지."
이면의 8층.
5명의 사람이 둥글게 앉아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중 절반 이상은 당장 치료사 수십이 달라붙어도 죽을 것 같은 상태였지만 홀로 일어서 있는 한 사람에 의해 조금씩 상처를 수복했다.
부러진 검의 손잡이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아즈라는 큭 웃으며 말했다.
"살아남은 게 너라서 다행이군. 에레 녀석은 영 치료 실력이 없어서. "
"아즈라. 함부로 말하지 마라."
"왜? 당연한 말을 한 건데."
크리드아가 아즈라를 노려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 다섯... 아니, 저 너랑 똑 닮은 놈 포함해서 여섯만 남았으니 냉정히 보자고. 막말로 베덴디스 말고 에레만 살아남거나 둘 다 죽었으면 우리는 다 죽었어."
"..."
"아니, 너랑 팔라딘 하나는 살았겠네. 거참. 이래서 팔라딘들은 좋아. '그날' 이후로 가호를 더 받아서 몸 하나는 튼튼─ 무슨 짓이냐. 루소니아."
검은 기운이 조금씩 흐르는 아즈라의 목에 얇은 레이피어가 다가왔다
금방이라도 베어버릴 듯이 사나운 기운을 내뿜었으나 이내 루소니아는 한숨을 내쉬며 검을 내렸다.
"분란을 일으키지 마세요. 당신만 지금 그렇게 된 게 아닙니다. 모두가 겪은 일입니다."
"두 놈은 안 겪었다만?"
"...당신은 너무 예민해져 있습니다. 당신 몸속에 파고든 마기가 심상을..."
"닥쳐라."
스릉.
이번에는 아즈라가 루소니아의 목을 노렸다.
부러진 백색의 검신 대신 보랏빛이 섞인 혼탁한 검신이.
검신을 바라본 아즈라는 잠시 흠칫하더니 이내 입술을 짓씹듯 말했다.
“이번 일은 단순히 사고가 아니다. 왜 악마가 우리만을 살려뒀을까.”
““...””
“그리고 왜, 우리가 이렇게 타락했을까. 이상하지 않아?”
아즈라는 자신의 검을 한 번 더 보고 피식 웃었다.
“만일 우리가 타락해서 뭔가 하기를 바랐다면 아마 우리가 이 일로 서로 치고받거나 도시로 가서 난장을 부리기 바랐겠지.”
“음.”
“하지만 우리는 아직 본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대로 신 님께 찾아가 마기를 몰아내고 천천히 회복하면 돌아올 수준이야.”
“하지만 그럴 수 없겠지.”
말을 한 것은 베덴디스 였다.
그는 넷 모두를 회복시키던 지팡이를 들어 저 문을 가리켰다.
“이면은 10일이 지나야지만 문이 열린다. 아직 2일 남았지.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내일이 지나기 전까지 9층을 토벌하지 못하면 나가지 못한다는 건가?”
“그렇지.”
“아주 지랄이구만.”
아즈라는 반쯤 열린 9층으로 향하는 문을 보았다.
이면과 홀리에린을 연결하는 문은 열흘에 한번 열린다.
각층의 문은 하루마다 하나씩 열리며 반드시 그 층의 토벌을 완료해야 나가거나 올라갈 수 있다.
만약 우리가 토벌을 완료하고 저 문을 열지 않았다면 이대로 나갈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문이 열려있다.
그리고 문이 열린 이상 반드시 9층을 토벌해야 한다.
아즈라는 끅끅 웃었다.
“그래서… 뭐가 됐든 9층의 악마 놈들을 박살 내야 할 것 같은데… 이 몸으론 무리거든.”
다시 한번 악마 놈들의 힘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
그 말에 모두가 침묵에 잠겼다.
물론 아즈라는 뒷말을 하지 않았지만 다들 눈치는 채고 있다.
강대한 악마를 몰아붙이기 위해 한계까지 마기를 사용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심상과 육신이 서서히 망가지고 있는데 더 사용했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러니 여기서 정하자고.”
“...뭘 말이야.”
무릎을 끌어안은 채 여태껏 한마디도 안 하고 있던 크로아가 이제는 완전히 검은색으로 물든 두 눈을 떴다.
“이대로 9층에 가서 완전히 타락할 건지. 아니면.”
스윽.
콰직!
“배신자 놈을 여기서 처단할 건지.”
보랏빛 검신이 바닥에 꽂히고 주위는 침묵으로 잠들었다.
배신자.
위대한 그라티아님의 존재를 거부하고 악마의 길로 들어선 이단.
사악한 존재.
수백 년을 함께한 친우를 버린 변절자.
어째서 그가, 혹은 그녀가 그런 선택을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당장 배신자를 찾아내지 않으면 이대로 몰살되거나 악마로 타락하는 건 시간문제다.
“배, 배신자라니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아즈라.”
“왜? 다들 눈치채고 있었던 거 아니었어?”
루소니아의 물음에 아즈라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 상황에서 누가 가장 이득을 볼지 생각해 보라고. 악마? 뭐 악마야 좋긴 하겠지. 그라티아님의 영웅들이 타락하거나 모두 죽으면 악마로선 이득이니까. 하지만 내가 말하는 건 그게 아니야.”
"..."
“영웅의 절반이 죽고 팔라딘과 주술사, 보조인력들이 전부 쓸려나갔지. 악마 놈은 확실히 강했어. 우리 모두가 덤벼도 무리일 만큼.”
확실히 악마는 강했다.
만일 악마가 보랏빛 연기를 씌워주지 않았다면 살아남은 자는 아무도 없었을 거다.
"물론 연기 없이 살아남은 두 놈이 있긴 하지만 중요한 건 우리가 왜 살아남았나 야."
"...우리를 일부로 살렸다는 건가요?"
"그래."
그가 꽂은 검신에 불길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난 말이지 악마라는 놈들은 항상 보며 느껴왔는데, 놈들은 대가없 는 소원을 이뤄주지 않아. 항상 무언가를 가져가고 뜻을 이루어주지."
대가 없는 소원을 이뤄주는 존재는 악마를 포함해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자신들의 신조차 '신앙심'이나 '헌신'따위를 필요로 하니까.
"배신자 놈은 우리를 제외한 나머지를 죽이는 조건으로 무언가를 받아냈다. 혹은 받아낼 계획이겠지."
"...그게 우리 중에 있다는 건가."
"시체가 돼서 받을리가 없잖아?"
베덴디스의 물음에 아즈라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의 태도는 평소와 상당히 이질적이긴 했으나 틀린 말은 아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정말 우리 중에 배신자가 있을 확률이 매우 높으니까.
"전 아닙니다."
"크렉?"
'여기선 당당히 나가야 한다.'
살아남은 여섯중 오직 자신만이 영웅이 아니다.
게다가 연기의 영향도 받지 않고 살아남았으니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볼 수 있다.
물론 지금 상태로 싸운다면 모두 이기진 못할지 언정 적어도 도망칠 수준은 된다.
지금의 자신은 제법 강하고 영웅들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니까.
하지만 여기서 도망친다면 아버지를 구하고 더 나아가 이 영웅들을 살릴 수 없다.
크렉에게는 하나하나가 정말 존경하는 이들이었기에.
크렉이 손을 들고 그리 말하자 다른 영웅들의 시선이 오묘해졌다.
진위 여부를 판단하는 듯한 눈.
영웅들은 도시의 수호자로서 항상 악인들을 잡아왔다.
그런 그들에게 거짓말을 하는지 안 하는지에 대한 것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있었다.
"...거짓말 같진 않아 보이는데."
"나도 그렇다."
"...모르겠군요. 우리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 그리 보이는 걸지도."
영웅들은 머리를 짚으며 그리 말했지만 그들은 사실 크렉을 범인으로 몰고 싶을 것이다.
몇백 년을 함께한 동료이자 친구, 가족이 그들을 죽이고 악마의 편에 섰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가혹하니까.
하지만 이들은 보이는 그대로 판단하고 말했다.
죄 없는 자를 벌할 수 없기에.
비록 타락하고 있다지만 그들은 아직 '영웅'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