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7화 〉 14. 거짓된 존재 (2)
* * *
한번 흐트러진 선은 거칠게 망가지기 시작한다.
마치 감당하지 못할 것을 불안정하게 이고 있던 다리처럼.
한번 무너지기 시작한 선(?)은,
한번 무너지기 시작한 선(?)은.
그대로 부서져 흩어진다.
루소니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즈라가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평소에도 뛰어난 육체와 아득한 검술을 선보이던 그였지만 마기를 얻은 뒤에 그는 그보다 훨씬 강했다.
대지가 뒤집히고 공기가 갈라진다.
마침내 검은 감히 담지 말아야 할 말을 담은 루소니아의 목을 노렸지만 그녀 역시 같은 수를 사용해 대응했다.
그에 베덴디스가 그녀를 도와 주술을 걸어주고, 크리드아는 둘의 싸움을 막기위해 방패를 들고 중앙으로 뛰쳐나갔다.
마지막으로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뛰어간 크로아까지.
다시 한번 터지는 검과 방패, 그리고 단검의 파열음.
방금 전까지 동료이자 친구, 가족이던 이들이 서로에게 칼을 겨눈다.
크렉은 깨달았다.
이 상황이 단순히 마기로 인해 타락해서 생긴 일이 아니라고.
이들은 이전부터 자신들의 위치에 대한 의심을 가지고 있었을 거다.
영웅이라는 존재.
자신이 과거로 건너오기 전의 미래는 영웅들을 존경하고 기리며, 정말 신의 대리자로서 그들을 인정했다.
하지만 과거는 달랐다.
그들 한 명 한 명은 영웅이라기보다는 도시의 병사들과도 같았다.
‘마치 평범한 팔라딘이나 사제들처럼.’
그렇기에 그들은 의심을 가졌지만 차마 그것을 바깥으로 들어낼 수 없었을 거다.
자신들은 위대한 신, 그라티아의 사도.
감히 그분의 뜻을 의심할 수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몸속에 파고든 마기가 선(?)의 의심을 부추기고 악(?)을 끌어낸다.
물론 크렉이 보았을 때는 이들 중 악에 물들었다고 생각되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굴레에서 해방된 자들 같았다.
‘무언가를 틀어막고 억제하던 족쇄라는 굴레에서 벗어난 자들.’
싸움은 계속된다.
아즈라는 마기를 더욱더 뿜어내 눈앞에 크리드아를 치워내고 루소니아의 레이피어를 산산조각냈다.
같은 마기를 받았다기에는 믿기지 않은 능력의 차이.
승기를 잡은 아즈라는 그대로 검을 쥐어 그녀의 심장을 노렸으나.
티─잉!
검을 쳐낸 두 개의 단검이 흉흉한 보랏빛의 마력을 내뿜었다.
마기의 주인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대화하지 않아도 그들은 이미 뜻을 읽었다.
이 싸움은 언젠가 반드시 이뤄질 거였다.
단지 그 시기가 악마로 인해 빨리 찾아온 것뿐.
다시 한번 무기들의 파열음이 가속된다.
서로의 몸과 몸이 점차 상처 입지만 그만큼 차오르는 마기에 의해 빠르게 상처가 수복된다.
크렉은 참전하지 않으니 상황은 4대1.
아즈라로서는 더 이상 이들의 공격을 막기가 버거웠다.
후우 숨을 한번 고른 아즈라는 검을 내려다보았다.
이제는 정말 조금 밖에 남지 않은 백색의 조각.
검의 귀퉁이에 조막막한 조각을 잠시 바라보던 그는 이내 고개를 들어 올리고 피식 웃었다.
“이별이다. 친구들.”
가볍게 선언한 그를 중심으로 마기의 파도가 몰아치고.
백색의 조각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어째서.”
크렉은 허망한 눈을 차마 감지 못하고 바닥에 풀석 주저앉았다.
모두가 죽었다.
아즈라도, 크로아도, 베덴디스도, 루소니아도.
심지어 자신의 아버지인 크리드아 까지도.
“하, 하하하하하!”
머리를 부여잡았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됐다.
결코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죽었다.
과거를 바꾸려 했던 행동이 오히려 더 크나큰 악재로 다가왔다.
‘어째서 상황이 이렇게 되었지?’
크렉은 싸움이 시작된 순간부터 나서려고 했다.
아니, 자신의 온 신경과 육체를 전부 앞으로 튀어나가는데 사용해 전투를 막아내려 했다.
자신에겐 그럴만한 충분한 힘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나설 수 없었다.
과거로 돌아온 사실을 밝힐 수 없는 것처럼, 자신이 뛰쳐나가 막으려는 행동 역시 금지되었다.
“정해진 과거는… 바꿀 수 없다. 이거냐?”
쾅!
울분을 참을 수 없는 주먹을 바닥에 마구 내리쳤다.
쾅!
내리치고.
쾅!
또 내리치고.
콰아앙!!
온 힘을 다 쏟아가며 내리쳤다.
“하아… 하아… 하아하하하…”
허무하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곳에 온 것인가.
정말 바꿀 수 없다면 베덴디스님과 루소니아님은 왜 죽으신 것인가.
과거를 바꿀 수 없다면 어째서 그 두 분은 죽어야 했단 말인가.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니 머리가 차가워졌다.
처음에는 자신의 개입으로 인해 오히려 살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자신으로 인해 앞으로의 미래가 변했다고.
하지만 방금 전의 전투를 떠올리니 뭔가 이상했다.
분명 알 수 없는 힘은 자신의 개입을 막았다.
과거를 멋대로 바꾸지 못한다는 듯이.
그런데 그렇게 막아놓고 정작 이백 년 후까지 살아있어야 할 사람이 죽였다?
그거야 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과거를 바꾸지 못하게 해놓고 정작 살아야 할 사람을 죽여버렸으니까.
물론 이곳에 보낸 이유가 ‘그 두 분을 죽이기 위함이다.’ 라고 한다면 할말이 없다.
하지만 자신이 볼 땐 그런 이유가 전혀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
“...나와.”
그렇다면 다른 제 삼자가 있을 거다.
7층의 악마를 모두 쓸어버릴 정도의 능력을 가진 존재.
영웅 네 명이 한 번에 덤벼도 이길 자신을 ‘억제’ 할만한 힘을 가진 존재.
그 모든 걸 아우를 만한 주술의 영웅, 에레를 계승한 존재.
“미누아…!”
“...오랜만이네요.”
무색의 깃털 목걸이를 지닌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미누아가 그런 선택을 한 것일까.
그녀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영웅의 후손일텐데.
“몸은 괜찮으세요?”
“...누구 덕분에.”
나서지도 못하고 그저 절망스러운 장면을 지켜만 봐야 했다.
자신이 존경하는 자들이 죽는 모습을.
더 나아가 자신의 아버지가 죽는 모습까지.
모든 것을 그저, 지켜보기만 해야 했다.
“...죽었어. 모두.”
“...”
“그래, 처음부터 배신자는 없었던 거야.”
영웅이 선을 저버리고 악이 될 리가 없다.
그분들은 존경받아야 마땅했고, 인정할만 분들이었다.
단지 내부에서 갈등을 겪던 의심이 마기라는 기폭제에 터져나갔을 뿐.
만일 훗날 그 의심이 점점 커져 스스로 터졌다면 그들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싸웠을 것이다.
서로 다치기도 할 거다.
어쩌면 치명상에 가까울 정도로 부상을 입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적어도 죽지는, 아니 저렇게 타락하지는 않았을거다.
그리고 서로의 감정을 다 게워냈겠지.
떠나갈 이는 떠나가고, 남을 이는 남을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죽지 않고 영웅으로서 계속해서 도시를 수호해 왔을거다.
“뭔가 큰 오해가 있군요.”
“오해? 지금 영웅들을 다 죽여놓고 그 말이 나와?! 이제 와서 그러는 이유가 뭐야? 용사를 이용했나? 아니면 제사장...”
크렉은 분에 이기지 못하고 말을 내뱉다 멈칫했다.
미누아는 오래전 죽은 에레의 후손으로 베덴디스의 손에 키워졌다.
그녀는 이그드라실에서 평생을 보냈으며 차기 제사장으로서 수십 년을 살아왔다.
그리고 그런 미누아는 제사장, 베덴디스의 명을 철저히 따랐다.
‘...설마. 베덴디스님이…?’
아무리 생각해도 미누아가 독단적으로 이런 일을 벌인 것 같지 않다.
물론 단순하게 생각해 보면 과거 에레의 죽음을 영웅들의 탓으로 돌리려고 이런 일을 벌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자신의 부모라고도 할 수 있는 베덴디스까지 죽인 건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렇다고 베덴디스가 모질게 대했나?
그것도 아니다.
베덴디스가 다소 장난스럽게 미누아를 골려먹긴 했어도 말 그대로 장난 선에서 끝난 수준.
절대 그녀를 억압하거나 단 한번도 폭력이나 폭언같은 행위를 본 적은 없었다.
어린 시절 비슷한 처지였던 자신은 미누아와 같이 자고 나랐으니까.
그런 자신의 혼란을 읽었을까.
미누아는 백의로 가려진 벽안의 눈을 뜨며 미소 지었다.
“우선 당신에게 두 가지 오해를 풀어드리죠.”
“......말해봐.”
“첫째, 배신자는 있었습니다.”
“...뭐?”
크렉이 벙찐 눈으로 바라보자 미누아는 짙게 물든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물론 지금은 없습니다. 이곳은 만약이라는 이름에 탄생한 가짜. 즉, 환각과도 같은 곳이지요.”
“...환각? 꿈이라고?”
“네. 물론 초월적인 존재가 개입함에 있어 어느 정도 ‘연결성’은 가지고 있지만…”
미누아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순간 찡그려졌지만 이내 수긍했다는 듯 고개를 내렸다.
“당신과 내가 과거로 온 건 아니라는 소리죠.”
“...”
“좋은 뜻이지요. 당신의 진짜 부모라고도 볼 수있는 루소니아 집행관이 살았으니.”
“...? 뭔 소리야. 진짜 부모라니. 내 아버지는 크리드아님이고 어머니는...”
그 순간.
크리드아의 머릿속은 쿵!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어머니는…
어째서.
‘어째서. 기억이…’
혼란스럽다.
분명 기억 속에 있어야 할 어머니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 형태조차 파악할 수 없다.
분명 이면에 오기 전에도 한번 봤던 얼굴인데...
머리가 어지러웠다.
크렉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소리쳤다.
“환각…! 환각을 쓰는 거냐?! 날 혼란하게 만들려는…”
“환각이라… 맞는 말이겠네요. 당신은 이미 오래전부터 환각에 사로잡혀 있었으니까.”
“...뭐?”
방금 뭐라고…
“당신에게 두 가지의 오해를 풀어드린다 했죠? 마지막은…”
또각또각 걸어오던 그녀는 어느새 크렉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런 그녀는 작게 선언했다.
“죽은 영웅을 대체하기 위한 복제품. 그것이 당신의 진짜 정체입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