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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8화 〉 14. 거짓된 존재 (3) (208/318)

〈 208화 〉 14. 거짓된 존재 (3)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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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오래된 과거.

백의를 두른 영웅, 에레는 검푸르게 물든 목걸이를 옷 안에 넣었다.

그 위에는 원래 차고 있던 깃털 목걸이를 걸쳤다.

그러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런 반응 없이 푸른 하늘.

‘신이시여. 당신은 어째서 날 막지 않는 건가요.’

위대한 존재는 항상 위대해야 한다.

전능(??)과 전지(??)를 모두 갖춘 완벽한 존재여야 한다.

하지만 이것을 차고 있음에도 신은 여전히 답이 없었다.

마치 이것은 자신의 영역 밖이라는 듯.

“...”

“에레!”

“베덴디스. 날이 왔구나.”

“그래. 얼른 가지. 다른 녀석들이 기다리고 있어.”

에레는 자신의 단짝이라고도 할 수 있는 남자, 베덴디스를 보았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주술을 사용하는 아홉의 영웅 중 가장 친분이 깊은 자.

‘...안심해도 돼. 너는 반드시 살려둘 테니까.’

베덴디스는 강하니까.

그는 위대한 영웅으로 남을 ‘가치’가 있다.

에레는 발걸음을 옮겼다.

­

막사로 돌아가고 잠깐의 소란이 있었다.

이면행에 대한 갈등.

갈등이 심해지고 크로아가 막사를 박차고 나갔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무트라가 그라티아님을 믿고 있으니, 어떡해서든 설득해 그녀를 이면으로 데려갈 것이다.

크로아는 신에 대한 의심이 깊어지더라도 친구는 의심하지 않는다.

에레는 그런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자신의 존재를 단순히 ‘부속품’ 따위로 치부하지 않으니까.

그런 점이 참으로 좋았다.

­

이면행이 확정되고 영웅들은 무사히 7층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7층에 문을 열고 악마를 마주했다.

환각을 사용하는 최상위 악마, 로드리아.

영웅들은 환각에 사로잡혀 수십 년을 환각 속에서 떠돌았다.

인고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여럿이 죽어나갔지만 네명 만큼은 살아남았다.

아즈라, 베덴디스, 루소니아, 크로아.

전부 에레가 미리 점지해둔 영웅들.

이들은 네 명의 위대한 영웅이 되어 모든 이면을 이겨낼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나겠지.

수많은 도시의 사람들도, 팔라딘도, 주술사도.

자신의 위대한 신까지도.

그 누구도 그들을 무시할 수 없을 거다.

‘...그래. 그거면 된 거야.’

물론 크로아 자신은 그리될 수 없다.

자신은 이곳에 남아 이면을 감당해내야 하니까.

500년의 인고의 시간 동안 홀리에린의 이면 ‘10층’의 수장 역할을 대신하는 것.

그것이 악마와의 계약의 대가다.

물론 인간으로서 500년은 꽤나 긴 시간이다.

이 시간을 버틸 수 있을지 없을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별 수 없다.

이대로 간다면 우리는 오백 년이 아닌 천년, 이천년을 넘게 그저 부속품처럼 살아야 한다.

그런데 자신의 고작 500년을 소모해서 영웅들의 존재를 높일 수 있다면 아주 싸게 먹히는 일이다.

에레는 혼란과 절망에 빠진 네 명의 친우들을 보았다.

그리곤 간절히 빌었다.

부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기다리는 10층으로 올라오길.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

9층의 악마를 상대하던 크로아는 죽은 눈으로 아즈라를 바라보았다.

녀석 역시 자신과 별다를 건 없다.

분명 녀석에 태도에 화가 났는데.

분명 이면행을 멋대로 결정한 녀석을 원망하고 싶었는데.

‘...모르겠다.’

이제는 정말 모르겠다.

너무 길었다.

더 이상 다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신은 왜 우리를 이곳에 밀어 넣은 걸까.

어째서 우리를 사지에 그냥 두시는 걸까.

우리는 정말 대체될 수 있는 부속품인 걸까?

왜 무트라가 죽었는가.

왜 크리드아가 죽었는가.

왜…

“크로아.”

“...어?”

칼이 빛처럼 빠른 속도로 날아와 꽂힌다.

콰직.

“뒤.”

“아…”

그녀는 자신의 옆을 스쳐 지나간 칼 끝을 보았다.

검붉은 피를 울컥울컥 내뱉고 있는 악마.

어느 틈에 접근했던 걸까.

크로아는 단검을 휘둘러 악마의 목을 베어냈다.

그러곤 묵묵히 검을 회수하는 아즈라를 보았다.

정말이지 화가 났는데…

“야.”

“...무슨일이지.”

“너, 숨기고 있는 거 말해.”

“...뭘 숨기고 있다는 거냐. 그 시간에 대장급 악마를 막고 있는 남은 두 명을 도와─”

콱!

멱살을 부여잡은 그녀는 아즈라를 강하게 노려보았다.

물론 남들이 볼 때는 멍한 눈이었지만.

“말… 해. 미쳐버릴 것 같으니까.”

“...”

“나, 이제 지쳐. 더 이상 싸울… 수 없단 말이야.”

힘들다.

포기하고 싶다.

신은 우리를 왜 저버렸는가.

어째서 모습을 드러내주지 않으신가.

“어째서…”

“난 후회한다.”

“...어?”

아즈라는 조금 허탈한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난 그동안 신 님은 전지전능하시다고 생각했다. 신 님이라면 어떠한 일이든 문제 없이 해결할 수 있고 모든 진실을 알고 있다 생각했지.”

“...”

“하지만 아니었다. 위대한 신, 그라티아님조차 우리랑 다를 바가 없었던 거야. 단지 조금 더 많은 힘을, 그리고 많은 지식을 가지고 계셨던 것뿐이다.”

처음이었다.

그 누구보다도 그라티아님을 신봉하던 이가.

그 어떠한 마기에도 조금도 타락하지 않은 그가.

자신의 신을, 하늘의 영역에서 끌어내리고 있었다.

“그러니 크로아.”

“어?”

“그라티아님을 너무 원망하지 마라.”

“...”

“그분은 그분의 능력 안에서 최선을 다하셨어. 단지 힘이 부족했을 뿐이야.”

아즈라는 시선을 돌렸다.

그 시야에는 힘겹게 대장 격 악마를 막고 있던 루소니아와 베덴디스가 보였다.

둘의 눈은 아직 생기와 희망이 가득했다.

“...우리처럼 말이지.”

“그렇구나.”

“응.”

“그래, 그런 거겠지.”

아즈라의 눈에 아주 조금의 생기가 돋았다.

허나 정말 잠깐 일뿐.

금방이라도 다시 꺼질 듯이 껌뻑거렸다.

“...그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네.”

“죽을 셈인가.”

“응. 너도?”

“네가 원한다면.”

“풋.”

희미하게 입꼬리가 올라온 그녀는 단검을 힘주어 잡은 채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난 네가 정말 싫었어.”

“알고 있다.”

“하지만 네가 인간으로서 싫어서 그리 생각했던 건 아니야.”

그녀는 옅게 웃으며 아즈라를 돌아봤다.

그는 상당히 무표정했지만 오랫동안 그를 본 크로아는 알았다.

저건 제법 놀란 표정이다.

“넌 정말 밥맛에 제멋대로고, 오직 신 님만 생각하는 눈치 없는 놈이었지.”

“...그런놈이라 미안하군.”

“하지만 이젠 괜찮아. 네 진짜 속마음을 알았으니까.”

크로아는 하나의 단검을 허리에 차고 빈손을 건넸다.

아즈라는 보기 드문 웃음을 지으며 손을 잡았다.

“아~ 지옥에 가면 애들이 기다리고 있겠지?”

“글쎄. 신 님께서 도시로 오도록 안배해두지 않았을까.”

“으… 죽어서도 일이야? 지겹다 지겨워~”

손을 잡고 걷는다.

환각 속 오래된 기억이 떠오른다.

그들은 싸우고 또 싸웠다.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았다.

이대로 죽는 게 나을 거란 생각도 수백, 수천 번 했다.

하지만 계속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일어날 수 있나?

­제법 다쳤군.

­일단 너는 후방으로 가 베덴디스에게 치료를…

항상 그가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손과 손을 맞잡은 영웅은 영웅으로서 죽기 위해 몸을 날렸다.

­

“어째서…?”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일까?

네 명의 영웅은 10층의 문을 앞에 두고 그 수가 둘로 줄었다.

분명 악마와의 계약에 대가로 받은 힘으로 최대한 그들을 죽지 않게끔 이끌었다.

일부로 악마의 공격의 세기를 줄이고, 영웅의 공격은 최대한 치명상이 되게끔 조정했다.

하지만 결과는 두 명의 영웅뿐이다.

아즈라와 크로아.

이 둘은 끝없는 싸움에 지쳐 결국 루소니아와 베덴디스에게 향하는 공격에 몸을 던졌다.

이유는 정말 별거 없었다.

그냥 이 둘이 앞으로 잘 살아나갈 것 같아서.

둘은 자신의 목숨을 제물로 친구들을 살리는 것을 선택했다.

“안돼… 이, 이런건 계획에 없었어…”

에레는 검게 물든 거체를 부르르 떨며 허망한 눈으로 살아남은 둘을 보았다.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되었을까.

새롭게 얻은 육체에 적응하는 동안 정확한 상황을 미처 보지 못했다.

하지만 전체적인 상황을 훑어봤을때 분명 그러한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넷 모두 상태는 멀쩡했고, 마음속 의심은 더욱더 커졌지만 ‘빛’을 저버리진 않았으니까.

주위의 마기가 그 틈을 파고들려고 노력했지만 오히려 넷만 남아 끈끈히 뭉친 그들의 신념을 뚫지 못했다.

다만 층과 층을 계속 격파할수록 그들의 심상이 점점 탁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니, 지쳤다고 보는게 맞을 거다.

그들은 환각 속에서 수십 년을 싸우고 현실에서도 계속해서 싸움을 이어 나갔으니까.

하지만 절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어야 했다.

“...설마. 내가 보지 못한 환각이…”

홀리에린의 이면과 연결된 그녀는 악마들의 능력과 수준, 개체 수를 조절할 수 있지만 아직 힘을 완전히 통제하진 못한다.

홀리에린의 이면은 말 그대로 ‘초월자’, 그라티아의 고유 권능의 부작용으로 탄생한 공간.

당연히 비 초월자인 그녀가 온전히 통제할 수 있을만한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그 제라드조차 이면을 마구잡이로 주무를 수 없었다.

때문에 에레는 영웅들이 ‘환각 속에서 수십 년을 보냈다.’ 정도의 정보만 전달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수십 년이 아니라면? 수백 년, 어쩌면 수천 년의 시간이라면?’

그렇게 생각하니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불가능하지 않으리라.

그라티아의 가호 아래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제약을 받지만 이곳은 그녀의 영향 밖.

게다가 수백, 수천 년이 지난 상태라면 그 제약이 끊어진 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

“안돼…!”

에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분명 악마와의 계약 조건은 네 명의 영웅.

네 명의 영웅이 이면을 돌파하고 당당히 홀리에린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악마와의 계약 불이행으로 모든 것이 허무로 돌아갈 수 있다.

“방법이 있을 거야… 이 상황을 만회할 방법이…?”

그 순간, 살아남은 둘을 바라보던 에레의 눈에 무언가 잡혔다.

오래전 받은 성역의 씨앗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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