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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9화 〉 14. 거짓된 존재 (4) (209/318)

〈 209화 〉 14. 거짓된 존재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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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역의 씨앗.

그라티아의 권능에 의해 탄생된 씨앗으로 훗날 이것들은 홀리에린에 뿌리내릴 예정이었다.

악마라는 강대한 적에 대항하기 위한 강화된 권능.

원래 계획대로라면 모든 이면의 토벌이 완료된 후, 베덴디스와 여러 영웅들의 도움을 받아 꽃피울 생각이었다.

그라티아 께서는 자신이 직접 심지 않고 우리에게 그 임무를 맡겨 주었으니까.

정확히는 ‘할 일을 떠넘겼다.’ 라고 보는 게 맞을 거다.

‘...우습군요.’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신은 우리를 너무 내버려 둔다.

그녀에게 있어서 관심사는 외부의 신들뿐.

더 이상 주민도, 영웅도, 도시의 그 무엇도 그녀의 관심사 안에 들어가지 않는다.

때문에 그녀는 지금도 도시에 있지도 않았다.

그랬기에 더더욱 일을 벌인 것이었다.

‘뭘 하는 건가요. 당신은.’

순간 에레는 울컥 차오르는 감정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행하는 일은 영웅을 위함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신께 인정받기 위함이 가장 크다.

더 이상 우리는 부속품이 아니라고.

우리를 받아들였으면 그에 걸맞은 위치로 인정을 해달라고.

닿을 수 없는 존재였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지도 모른다.

모든 이들의 숭상과 숭배의 대상이 되는 여신이나,

초월적인 강함으로 모든 마족들의 군주 역할을 하는 마왕이었다면 절대 이런 생각을 가지지 못했을 거다.

힘 좀 받았다고 감히 거스를 수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라티아는 아니었다.

그녀는 약하지 않다.

하지만 앞서 말한 둘처럼 모든 존재가 넘볼 수 없을 정도로 강한 것은 아니다.

그런 주제에 마치 여신이나 마왕보다도 우리를 신경 쓰지 않는다.

여신은 기도를 하면 그 청을 들어주거나 가끔 신성한 모습을 비추어 준다.

마왕은 충성에 맹세해 따르면 마기를 내어주거나 직위, 영지 같은 것을 내어준다.

하지만 그라티아는 달랐다.

모습을 드러내긴 한다.

하지만 여신만큼의 위용이나 청을 들어주지 않는다.

권능은 내려준다.

다만 힘을 제한하고 영웅적인 존재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마치 우리와 저 도시의 평범한 주민과 똑같다는 듯이.

에레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우리를 휘어잡았다면.

똑같음을 인정하지 않는 우리를 벌하거나 세뇌라도 걸어 우리를 통제시켰다면.

우리는 그것이 ‘옳다’ 여기고 살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라티아는 그러지 않았다.

“...당신이 시작한 일입니다.”

에레는 거체의 눈을 움직여 바닥을 보았다.

힘없이 축 늘어진 영웅, 에레의 육신.

이 육신은 훗날 500년 뒤에 도시로 복귀할 때를 대비해 따로 보관해 놓을 생각이었다.

에레는 육신을 망설임 없이 찢어발겼다.

그러곤 그 안에 잠들어 있는 두 개의 구슬을 보았다.

하나는 에레의 모든 주술 능력과 마력의 힘을 저장한 주혼구(???).

다른 하나는 에레에게 주어진 또 다른 씨앗, ‘판테움’이다.

씨앗은 모든 영웅이 힘을 보태어 키우도록 하였으나 그것을 가지고 있는 건 베덴디스와 에레.

단둘뿐이었다.

그 이유는 당연하게도 씨앗을 심어 자라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주술의 영웅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베덴디스와 에레에게는 각각 ‘이그드라실’ 그리고 ‘판테움’ 이라는 씨앗이 주어졌었다.

에레는 붉은색의 구슬, 주혼구를 새로 얻은 힘에 섞은 뒤 하나의 육신을 창조해냈다.

자신과 닮은 백청색의 머리카락과 벽안.

똑같은 주술을 쓰고 훗날 ‘자신의 육체’가 될 아이.

“이름은… ‘미누아’가 적당하겠네.”

아직 혼이 깃들지 않아 죽은 듯이 잠들어있는 아이의 몸에 베덴디스가 가진 ‘이그드라실’의 씨앗을 몰래 빼왔다.

「▼▼성역 」

씨앗을 미누아의 심장에 넣자 두근, 소리와 함께 아이가 고르게 숨을 쉬기 시작했다.

‘성장 속도는 느리게… 발견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150년 뒤가 적절하겠어.’

성역을 심었기에 어쩌면 위험할 수 있지만 자신의 신은 이 아이가 어떻게 탄생한 아이인지 알지 못할 거다.

이 아이에겐 이미 그보다 격이 높은 악마, 제라드의 어둠이 깔려있으니까.

그렇게 에레를 닮은 복제인간, ‘미누아’를 만든 에레는 이제 하나 남은 씨앗을 보았다.

베덴디스와 루소니아를 포함하면 이제 남은 영웅은 딱 하나다.

누굴 만들어야 할까.

미누아는 훗날 자신이 차지할 육체이기에 주혼구에 새로이 얻은 힘을 섞었지만 이 씨앗은 그럴 필요가 없다.

그저 숫자를 채우고 눈만 가리는 용도 .

그 정도면 충분하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는 7층에 쓰러진 시체 중 누군가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크렉이라는 이름의 무언가가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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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까지가 당신의 탄생의 진실입니다. 혹시라도 믿기지 않는다면 뒤에 이야기도 들려줄 수─”

“그만.”

크렉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풀어나가던 미누아를 멈춰 세웠다.

“제발, 그만해…”

“믿지 않으셔도 믿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당신이 진실을 외면한다고 해도 변하는 건…”

“아니까!”

크렉은 자꾸 입을 여는 미누아를 어깨를 부러트릴 듯이 쥐어잡았다.

뿌드득─ 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졌으나 미누아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다 알겠으니까… 그만…”

크렉은 믿고 싶지 않은 현실에 좌절했다.

처음에는 미누아에게 그저 화를 냈다.

허튼 소리 하지 말라고.

아무리 그래도 미누아 본인의 조상이자, 부모인 에레님이 동료들을 배신하실 리가 없다고.

그렇게 외면하고 또 외면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머릿속으로 무언가 떠올랐다.

감추어 두었던 기억.

그것은 크리드아의 기억도 있었고,

이상한 악마의 기억도 있었으며,

전혀 다른 영웅의 환각의 기억도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끔찍했던 기억은…

‘도시…’

자신의 존재 자체가 ‘판테움’의 씨앗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살아온 날은 50년 남짓.

하지만 도시, ‘판테움’으로서의 삶은 3배나 많은 150년이나 되었다.

그 기억이 떠오른다.

자신의 위로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과 수많은 건물들.

가끔씩 침공하는 이면의 마수.

빛이 내리쬐는 백의 길.

이제는 단 일곱의 영웅만을 안치해 놓은 칠 영웅전까지.

수많은 기억들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온다.

아니, 감추었던 것들이 드러난다. 라고 보는 게 더 맞을 거다.

“크흐흐…”

방대한 기억들이 솟구친다.

도시의 중앙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체 150년간 그저 ‘씨앗’의 역할만 한 기억이 떠오른다.

마치 정말 ‘우연히’ 발견한 루소니아의 모습과 그녀를 보고 처음으로 울음을 터트린 기억이 떠오른다.

그렇게 루소니아에게 검을 배우고 자식처럼 자라 단장의 자리까지 오른 기억이…

“......”

“어때요? 당신의 기억은? 이제 좀 생각이 달라지셨나요?”

“...제법.”

스윽.

하나의 도시가 눈을 뜬다.

도시는 또 다른 도시를 본다. 그리고 웃었다.

“제법이야. 미누아. 아니, 에레.”

“...!”

콰아아아아아아!!!

거대한 빛의 창이 이면의 단단한 층 벽을 뚫고 미누아의 육신과 충돌했다.

아니, 충돌이라기에는 미안한 수준의 크기.

미누아는 눈을 부릅뜨며 8층의 벽을 뚫고 아래로 추락했다.

이면의 층과 층을 뚫는 것은 그라티아의 이면조차 하지 못하던 일.

하지만 크렉은 그것을 너무나도 가볍게 해냈다.

크렉의 잡아든 황금빛의 창에는 어마어마한 기운이 스며들고 있었다.

[도시가 날 도와주는 모양이야. 아니, 내가 도시인가.]

쿠훙!

콰가가가가가!!!

마치 신이 내려찍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창이 숲을 휩쓸고 떨어지는 미누아를 찢어발기려 들었다.

“후우… 본체는 날 너무 무시하는군요.”

후욱.

어두운 하늘이 뒤바뀌고 붉은빛의 낮으로 변한다.

달이지만 달은 아닌 태양.

하지만 태양이라기에는 그다지 밝지 않은 원이 회전하며 그녀의 깃털 목걸이로 스며들었다.

그녀의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의 말들이 울려 퍼졌으나 미누아는 그것을 무시한 체 소환한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쿠릉!

붉은 마력이 지팡이에 집결하고 그대로 거대한 마력의 구를 쏘아보냈다.

마력의 구는 창의 쇄도를 튕겨낸 뒤 그대로 8층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크렉에게 향했다.

[...도시라는 거, 좋은 기분은 아니더라. 너도 알겠지만.]

쿠드드득… 크렉이 몸이 철갑에 휩싸인다.

갑주를 단단히 두른 그의 얼굴에 Y자 모양으로 뚫려진 투구가 씌워지고 기다란 틈 사이로 푸른색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창을 들지 않은 왼손은 어느새 몸 전체를 가릴 정도의 방패가 들려 있었다.

콰아아앙…

마력의 구는 방패와 충돌해 별다른 효력을 내지 못하고 스러졌다.

크렉은 마치 비상하듯 8층에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밑에서는 안 보였던 이면의 층의 진짜 모습.

[탑 같구만. 아니, 탑인가.]

‘저 위에 에레가 버려두고 간 그라티아님의 분신이 있단 소리지.’

크렉은 고개를 돌렸다.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에레. 혹은 미누아.

기억을 떠올린 크렉이지만 저 안에 든 게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 에레조차 자신을 만들어낸 이후 생명을 다했으니까.

에레는 악마와의 계약의 대가로 500년간 그라티아님의 분신을 대신하기로 했지만 크렉은 알 수 있었다.

‘저 위에 에레는 없다는 것을.’

아마 현실에서도 마찬가지 일 것이라.

그 증거로 칠 영웅전에는 이미 에레의 영혼이 안치되어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악마와의 계약은 이미 깨진 상태다.

그라티아님보다 강한 악마의 계약을 스스로 깰 수는 없으니 아마 악마 쪽에 무슨 문제가 생겼겠지.

그러니 저 몸에 들어가 있는 건 필시 에레가 맞다.

크렉이 그리 생각하며 미누아를 노려보자 그녀는 여전히 알 수 없는 벽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당신에게 세가지의 오해가 있군요.”

[또 오해라...]

“그렇지만 이번에는 풀어드리지 않을 겁니다. 당신은 지금 너무나도 건방지고, 그리고.”

후욱.

하늘이 다시 한번 뒤바뀐다.

아니, 하늘이 뒤바뀌는 것이 아니다.

쩌적.

차원과 차원이 서로 얽히고 있다.

마치 하나로 통합되듯이.

붉은 하늘은 어느새 은하수가 가득한 검은 하늘로 변하였다.

마치 유리조각처럼 나누어진 하늘은 그 틈 사이로 도시의 풍경이 보였다.

미누아는 입꼬리가 찢어질 듯이 웃었다.

“힘을 마음껏 사용해 주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수백 개로 나누어진 도시의 풍경 속, 수많은 빛과 어둠의 기둥이 차원을 뚫고 도시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나의 신의 탄생에 일조해 주신 것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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