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1화 〉 14. 거짓된 존재 (6)
* * *
차원의 벽을 뚫고 튀어나온 건 분명 그라티아 였다.
타락한 이면이 아닌 진짜.
온몸에 휘광을 뿌리며 날아온 그녀는 굉장히 흥분한 듯 그대로 이면의 층으로 낙하했다.
거체가 내려앉자 이면의 층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히딘은 어디…?]
“그라티아? 여긴 어떻게 온 거지.”
[...용사?]
그라티아는 백색의 거체를 펄럭이며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역시 이면보다는 확실히 강해 보인다.
예전에도 여러 번 보긴 했다만.
‘그건 잡는 게 아니었으니까.’
초월자 그라티아는 보스몹이 아니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공격 불가 NPC에 가깝다고 해야 하나.
물론 공격이 안되는 건 아니지만 자연신이자 고위신보다 강한 그라티아에게 함부로 덤비는 이는 없었다.
덤볐다가 1초도 되기 전에 그대로 죽었으니까.
문제는 그게 중요한게 아니다.
그라티아가 성역을 박차고 나온 것.
그라티아 고유 능력은 성역이다.
자신이 지정한 영지를 발전시키고 그 안에서 버프 효과를 얻는 것.
그 안에서의 그라티아는 정말 신위에 신이라 칭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능력을 얻는다.
그랬기에 자신보다 높은 격의 제라드를 막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용사… 히딘은 어디에 있나.]
“히딘? 뭔 소리야. 아, 네 딸을 말하는 건가?”
그러고 보니 그라티아에게 자식이 있었지.
외부의 신과 만남으로 인해 탄생한 두 명의 아이.
과거에도 한번 봤던 적이 있다.
듣기로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 한 100년 정도는 도시에 있지 않고 밖에만 돌아다녔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것 때문에 영웅들이 불만이 커지고 이면에서 사고가 일어나…
“윤 씨!”
콰드득!!
다윤의 외침이 끝나기 무섭게 거대한 ‘격’이 이면 전체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백(白)과 빛의 신이라기에는 굉장히 흉흉한 모습.
이면의 차원은 과자처럼 으스러지기 시작했다.
“...흐음.”
“윤 씨?”
“생각 좀 하고.”
바닥이 쩍쩍 갈라지고 탑이 무너진다.
네메린느와 히아트는 어느새 정령 형태로 돌아와 내 주위를 맴돌았고 다윤은 마력으로 몸을 띄워 내 곁에 섰다.
그리고 나는 그라티아의 성검을 들고 허공에 떠 생각에 잠겼다.
‘그라티아가 왜 화가 났고, 왜 여기에 왔는가.’
상황을 보았을 때 녀석의 딸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 게 분명하다.
이제 보니 조금씩 생각이 난다.
그라티아의 딸, 히딘.
녀석은 항상 도시를 돌아다니는 사고뭉치 같은 녀석이다.
도시를 마구잡이로 배회하며 가끔씩 오는 용사들에게 애교를 부려 털어먹기도 하지만 도시 밖으로 나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성역 내에서의 히딘은 꽤나 강한 수준이니 적어도 대리자급이 아니면 히딘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다.
‘누군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군.’
내 몸속에 깃든 초월의 힘.
분명 그라티아의 성역이다.
나에게 그라티아의 분노를 떠넘기기 위해 일부로 심은 것이 분명했다.
히딘을 가지고 무언가를 하기 위해.
“윤 씨!”
“기다려봐.”
“읏!”
다윤의 월광검과 백색의 빛이 충돌했다.
그라티아는 이성을 잃은 듯이 마구잡이로 능력을 사용했지만 다윤은 침착하게 마력을 걷어내듯이 공격을 상쇄했다.
다윤은 억제하고 있던 리미트를 해제하며 월광의 힘을 사용했지만 상성이 안 좋았다.
지금은 낮이다.
달이 보이지 않는 휘광의 태양이 비치는 낮.
물론 다윤은 스스로 밤을 만들 만큼의 능력이 있지만 상대는 빛에 있어서 뛰어난 수준을 가진 초월자였다.
게다가 뭔 일이 벌어지는지 홀리 에린과 이면의 경계가 점점 흐트러지고 있다.
마치 하나로 합쳐지기라도 하듯이.
[히딘은 어디나 두었나! 네 행동이 여신의 뜻인가!]
“윽!”
콰앙!
쏘아지듯 터져나간 힘의 여파에 다윤이 튕겨져 나갔다.
나는 네메린느의 바람을 이용해 땅으로 쏘아지는 다윤을 잡아챘다.
“...후우.”
“밤이라도 만들어 줄까?”
낮을 만드는 건 그라티아의 능력이지만 특이점을 이용해 얼마든지 밤으로 만들 수 있다.
물롣 과도하게 사용하면 페널티가 있긴 하지만 본래 차원도 아니고 초월자에 의해 만들어진 차원 정도의 밤낮은 충분히 바꿀 수 있었다.
다윤은 한쪽 어깨를 붕붕 휘둘렀다.
“아뇨. 좀 더 해볼게요.”
다윤의 두 눈이 노란빛 안광에 일렁이기 시작했다.
스스로 초월해 얻은 고유 능력은 아니지만 직업으로 인해 자연스레 습득한 힘.
「▼▼월─ 」
월광검은 노란빛의 광채를 내뿜었다.
이윽고 백색과 노란색의 충돌로 이면이 쿠궁쿠궁 흔들렸다.
나는 그사이 사태 파악을 위해 생각을 이어나갔다.
히딘을 이용해 도시에서 무언가를 진행하려는 ‘누군가’는 그라티아의 분노를 의식했다.
아마도 누군가는 그라티아의 분노를 막기 어려웠다 판단했을 거다.
그래서 나에게 시선을 돌리게 만들었다.
단지 내가 시간을 끌어주기를 바라는 거라고 볼 수 있지만 가만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성역’의 씨앗.
단순히 분노를 막는 용도라면 이런 걸 심지 않았을 것이다.
힘의 흐름과 히딘의 기운만을 담았겠지.
이 씨앗은 그라티아가 쫓아온 것과는 무관했다.
그렇다면 왜 이 씨앗을 심었는가.
[네 연인이 위험한 것 같은데, 도와주지 않아도 되느냐?]
네메린느는 내 상념을 깨고 다윤과 그라티아를 가리켰다.
월광의 힘을 쓰는 다윤은 그라티아와 호각을 이뤘지만 여전히 상성은 안 좋았다.
성역에서 끊임없이 힘을 부여받는 그라티아와 달리, 다윤은 그런 지원이 없었으니까.
만일 밤이었다면 그 상황이 반대가 됐겠지만…
“응. 다윤이가 잘 할 거야.”
이건 단순한 믿음이 아니다.
다윤은 진짜 그럴만한 힘이 있다.
다윤의 현재 힘의 수준은 1등위.
힘의 크기는 비슷하지만 정신적인 ‘그릇’은 그라티아가 우위다.
하지만 다윤이 쓰는 힘의 원천은 그녀보다 훨씬 강하다.
월광검사(月光??).
한 세계에서 검의 최강이라고 불렸던 검의 신 같은 존재다.
‘그라티아 따위랑 비교할 게 아니지.’
스각─
노란빛의 섬격이 그라티아의 빛줄기를 뚫고 왼쪽 날개를 잘라냈다.
절단면에서 붉은 피가 터져 나오고 그라티아의 두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거칠게 숨을 내쉬는 다윤은 그대로 몸을 회전시키듯 쏘아진 세 개의 빛줄기를 피해내고 검을 높게 들었다.
보일 리 없는 달이 그라티아의 낮을 뚫고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했다.
둥근 원이 서서히 회전하고 그 힘이 월광검에 스며들었다.
마침내 검이 그라티아를 두 갈래로…
“...! 유, 윤씨?”
다윤은 잡아당기는 녹색의 바람에 기술을 미쳐 시전하지 못하고 뒤로 빠졌다.
갑작스러운 기술의 취소로 몸이 욱신거렸다.
아무리 윤 씨라도 함부로 기술을 취소시키다니.
조금 울컥한 마음에 한마디 하려 했지만 눈앞에서 벌어난 일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콰드드득…!!!
방금까지 다윤이 있던 자리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그 구멍 안에는 홀리에린의 밤이 보였다.
순간 다윤은 오싹함을 느꼈다.
만일 그대로 기술을 썼다면 차원을 꿰뚫는 공격에 무방비한 상태로 당했을 거다.
그랬다면 필시 무사하지 못했으리라.
“큰 기술을 쓴다고 몸을 그냥 두면 안 되지. 쓸 거면 그만한 방어 체계를 갖추고 써.”
“아… 죄송해요...”
“죄송할 건 없고. 다음부터 잘 하면 돼.”
밤도 아닌 낮에서 그라티아를 몰아붙일 정도면 다윤으로서 할 건 다 했다.
이 이상을 바라는 건 욕심이겠지.
“그라티아.”
[으으… 히딘을 내놔…!]
콰지지직!!!
백색의 번개가 하늘을 뒤덮는다.
자세히 보니 백색만 있는 것이 아니다.
빛의 상징이자 초월자인 그라티아에게서 절대 보이면 안 되는 검은 무언가가 번개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번개를 막았다.
역시 오리지널답게 꽤나 강했으나 내가 그녀의 힘이 깃든 장검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몸 안에 그녀의 힘의 일부를 가지고 있어 막아내기가 수월했다.
콰드득─ 소리와 함께 내 주위를 스쳐간 번개는 이면의 탑 3할을 날려버렸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고 고민에 빠졌다.
죽이는 건 어렵지 않다.
히딘을 가로챈 누군가에 의해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타락하고 있는 그라티아.
이성도 없이 분노에 찬 상태라 죽이려 하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
물론 타락함에 따라 힘이 비정상적으로 강해지긴 했으나 전처럼 ‘눈’을 가리고 싸우면 단숨에 끝낼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라티아를 죽일 수 없다.
‘내가 뭣 때문에 여기 온 건데.’
그녀에게 받을 장비들의 축복을 위해 이곳까지 와서 마수의 사냥을 도와주었다.
그런데 이렇게 뒤처리만 하다가 아무것도 못 받고 죽일 수는 없다.
적어도 그녀는 제정신을 가진 상태에서 그라티아 장비들을 강화시켜야 했다.
게다가 저렇게 그라티아가 타락하면 안 된다.
내가 원하는 건 ‘온전한’ 빛을 가진 그라티아의 힘이니까.
“...하. 귀찮게 하네.”
의도가 뻔히 보인다.
「▲성역 」
내 몸속에 깃든 성역의 파편이 웅웅 떨린다.
지금 당장이라도 저 불안정한 힘을 차지하라는 듯이.
더군다나 경계가 흐트러진 차원의 틈을 타고 홀리에린의 기운이 우리를 향해 스며들었다.
언뜻 보면 그라티아에게만 흘러들어가는 것 같지만 내 쪽도 만만치 않게 들어왔다.
지금까지의 추론을 정리해 봤을 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그라티아와 제라드. 두 힘을 이면에 한데 모아 아예 없애 버리거나.
‘나를 신으로 만들려는 거겠지. 그라티아가 아닌 새로운 신으로 추대하기 위해.’
의도는 뻔하지만…
“들어줄 생각은 없어서.”
[ A1 코드 실행. ]
내 몸속에 박혀있던 씨앗은 순식간에 이동해 장검에 스며들었다.
장검을 쥔 나는 그대로 달려들어 그라티아의 심장에 꽂아 넣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