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8화 〉 15. 세 개의 빛 (3)
* * *
하늘이 요동치고 백청색의 번개가 몰아친다.
콰광! 거대한 그라티아를 향해 하나의 낙뢰가 떨어졌다.
낙뢰의 정체는 아즈라.
아즈라는 번개를 두른 것을 넘어 하나의 번개 그 자체가 되어 그라티아의 후위를 노렸다.
번뜩─! 그라티아의 전신에 흑백의 마력이 솟아나고 그의 대검을 막아낸다.
동시에 날라오는 세 개의 달빛 화살과 전방의 황금빛 창.
측면에서 오는 단검의 쇄도까지.
과거 영웅들은 합동 작전에 매우 능했다.
마수와 악마를 상대할 때는 항상 다수로서 그들을 상대했고, 그에 따라 자연스레 여러 명이 팀을 이뤄 공격하는 게 당연했다.
이들은 네 명이지만 체감상 수십, 수백 명이 달려들어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에레나 베덴디스가 없는 게 다행인가.’
만일 저들 중 강화와 보조, 치료를 할 수 있는 주술의 영웅이 있었다면 그 위험은 배가 됐을 거다.
‘하나 있긴 하지만.’
그들의 전신을 잇는다 해도 과언이 아닌 미누아가 있긴 하나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
마치 무언가를 고민하듯이.
그라티아는 다가오는 공격을 막지 못하고 위로 치솟았다.
창과 단검은 허공을 갈랐지만 화살은 마치 유도라도 되는 듯 자신을 따라왔다.
푸콱!
세 발의 화살 중 한 발은 빗나가고 남은 두발이 날개 죽지에 꽂혔다.
무트라의 서늘한 마력이 날개를 침식하더니 그대로 폭발했다.
푸르스름한 연기가 피어 올라오고 한쪽 날개가 힘을 잃고 축 처졌다.
[후우...]
아무리 힘을 나누어 주었다 해도 영웅들의 수준이 너무 비정상적이었다.
이들 하나하나가 저 뿌리 안에 갇혀있는 미누아보다도 강한 존재감을 내뿜고 있는 상황.
그라티아는 그 이유를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뿌드득…
아까처럼 이면을 집어삼키지 않고 오로지 미누아의 방어만을 돕고 있는 이그드라실.
홀리에린까지 집어삼킨 나무는 그 방대한 에너지를 전부 영웅들에게 주입시키고 있었다.
그것도 제 생명을 깎아 먹으면서까지.
[...미쳤구나.]
“죽이세요.”
파악!
이그드라실의 전신이 번뜩이고 영웅들의 기세가 더욱더 치솟았다.
이 이상은 막을 수 없다.
무슨 수를 써서든 미누아를 막아내라. 그리고 힘을 회수하면 된다. 그 이후는 내가 다 해줄 테니…
각각 초월의 힘이 담긴 네 가지의 공격이 닿기 전 그라티아는 김윤의 말을 떠올렸다.
그 어떻게든 해준다는 그의 말.
‘내 손으로 피를 꼭 묻혀야 하느냐.’
원치 않았다.
이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과 직접 죽이는 건 다르니까.
하지만.
책임은 스스로 져야지. 네가 지지 않는다면 그 누가 너의 잘못을 책임져 주겠어.
[망할 자식...]
그라티아는 이를 악물고 성역을 뒤바꿨다.
‘...여긴.’
미누아는 빛으로 가득찬 공 간에서 눈을 떴다.
쨍할 정도로 빛이 나는 공간이지만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는 아니었다.
그라티아의 성역은 단순한 버프와 지역 보호 정도로 알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녀의 진짜 능력은 성역 내의 ‘힘의 제한’이다.
자신보다 낮은 격의 존재의 모든 힘과 육체 능력을 급감 시킬 수 있는 능력.
하지만 아주 큰 단점이 있었다.
“또다시 당신의 아이들을 죽이는군요.”
[...]
아즈라를 비롯해 네 명의 영웅들을 모두 죽인 체 허공에 앉아있던 그라티아는 평소보다 훨씬 작은 몸을 일으켰다.
이 능력은 시전자인 그라티아 에게도 적용된다.
지금의 그라티아는 어지간한 팔라딘보다도 훨씬 약했다.
미누아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널 거두지 못한 게 한이구나.]
“날 거두긴 했죠.”
파직.
“다만 거두기만 했을 뿐이죠.”
[날 죽일 셈이냐?]
“글쎄요.”
뚜벅.
미누아는 그라티아의 앞으로 다가갔다.
자신과 비슷한 크기의 모습.
비록 자신도 힘이 줄어들긴 했다만 수없이 개조한 육체와 이그드라실의 연결로 인해 지금 당장은 미누아의 조건이 좀 더 좋았다.
“난 당신이 싫습니다.”
[...그거 안타깝게 됐구나.]
“이들은 당신이 죽인 것입니다.”
[나도 안다.]
“예, 잘 아시는군요.”
정적.
정적이 흐른다.
그라티아는 골머리를 감쌌다.
이다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그라티아는 방금 전 펼친 기술, ‘성지’는 잘 사용하지 않는 능력이다.
성지는 하자가 많은 기술이다.
강자를 성지안에 넣으면 상대에 비해 본인의 힘만 더욱 줄어든다.
반대로 약자를 넣으면 힘이 약해지더라도 상대가 더 약해지기에 지지는 않겠지만, 애초에 밖에서 이긴다면 왜 굳이 안까지 들어와 싸우겠는가.
굳이 성지를 쓴 이유도 영웅들이 이그드라실에 의해 비정상적으로 강해져있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주위 반경만 성지화시켜 영웅들의 지원을 일시적으로 끊었고 그 틈을 타 빠른 속도로 그들을 죽일 수 있었다.
문제는 자신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다 보니 성지의 차단 효과도 제 기능을 유지하지 못하고 풀려버렸다.
즉, 지금의 미누아는 그라티아보다 훨씬 강했다.
물론 영웅만 죽이고 바로 나가면 좋겠다만 성지는 마음대로 열고 풀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뭘?]
“...당신을 처음 만난 날. 당신은 나의 정체를 알았습니까?”
오래전, 미누아의 육체는 에레가 깃들 예정이었다.
허나 베덴디스의 주술로 에레는 깃들지 않았다.
의식 속에 잠들어 있던 그녀는 처음으로 눈을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라티아를 마주했다.
“내가 아는 당신은 에레와 베덴디스가 숨긴 진실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정말 몰랐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
“저와 크렉이 잠든 도시는 홀리에린입니다. 당신의 손바닥 안이나 다름없죠. 베덴디스도 항상 말하길 ‘언제나 보고자 하면 보고 살리고자 하면 살릴 수 있는 존재 시다.’ 라고 했습니다.”
거침없이 말을 쏘아내던 미누아는 잠시 숨을 골랐다.
이 약하디 약한 육체도 서서히 적응이 되었다.
“난 묻고 싶습니다. 정말 당신이 몰랐던 것인지.”
[...그...]
그라티아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미누아를 올려다보았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사실 이들의 속내, 계획, 배신 등등을 모두 알았지만 어머니 같은 자비로운 마음으로 포용해 주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진짜 몰랐지.’
일만 년을 넘게 산 그라티아는 완벽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내려놓지 않아도 신이 될 수 있었다.
고위신도 될 수 있었다.
초월도 할 수 있었다.
다만 나이를 오래 먹을수록 점잖아지고 시야가 넓어지긴 했으나,
그것이 완벽해졌다는 말은 절대 아니었다.
만일 미누아가 여전히 자신을 믿고 따르고 어리석은 짓을 벌여 용서를 구한다면, 그라티아는 ‘알고 있었다’ 말했을 것이다.
누군가를 믿고 따르는 신도로서 신은 항상 고결하고, 완벽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신이 아니라면 어찌해야 할까.
그녀는 솔직해지기로 했다.
[알지 못했다. 당시의 나는 악마라는 적이 생각보다 강함에 두려웠다. 그들과의 암묵적 계약은 그저 허울뿐인 말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공포스러웠다.]
악마들의 수장은 마왕.
그런 마왕의 대적할만한 자는 같은 격과 힘을 가진 여신뿐이었고.
여신은 고위신들의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 당시 악마의 칩입을 막아내기 위해 두 씨앗을 만들었다. 그것이 홀리에린과 나, 그리고 너희들을 막아줄 유일한 해결책이라 생각했으니까.]
허나 그라티아는 그 씨앗이 악마의 계획에 쓰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나는… 이면에서의 죽음도, 악마의 개입도, 너희의 존재도. 그 무엇도 알지 못했다. ...이렇게 말하니 꽤나 무능력하긴 하구나.]
그라티아는 헛웃음을 지었다.
신이니 뭐니 해도… 정작 더 강한 자에게 휘둘린 다는 것을.
“그렇군요.”
[...]
“감사합니다. 덕분에 정리할 수 있겠군요.”
미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에는 그동안의 파편의 힘과 도시의 힘을 모두 모은 지팡이가 들려있었다.
투욱.
그라티아의 심장에 지팡이의 끄트머리가 닿았다.
흑백색의 마력이 서서히 심장속으로 스며든다.
미누아는 싱긋 웃었다.
“...그래도. 여전히 당신은 싫군요.”
[...뭐?]
“당신도 누군가의 ‘일부분’이 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그라티아.”
소름 끼치는 미소를 본 그라티아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막아보려 했으나.
콰앙!
정신을 차렸을 땐 모든 상황이 종료된 후였다.
“이건 예상 못 했는데.”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성지 속으로 들어간 그 둘 중 하나는 끝장을 볼 거라 생각했다.
그라티아가 미누아를 설득하든,
아니면 미누아가 그라티아를 죽이고 모든 힘을 빼앗든.
둘 중 어느 쪽이 되든 간에 그 후의 일을 대비하고 있었다.
헌데…
‘가짜끼리 마음 통하는 게 있다 이건가. 아니면 자신과 비슷한 처지여서?’
나는 저 하늘에 우뚝 선 이면을 보았다.
이면은 더 이상 흑백색을 가진 거조가 아니었다.
[어...?]
그녀는 완연한 백조가 되었다.
「▲성신 」
새롭게 부여받은 초월의 이름과 함께.
어느새 성역은 새로운 주인을 맞아 신비로운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 빛은 이면의 주위를 감싸고 그녀의 뜻대로 움직였다.
그녀는 더 이상 가짜가 아니었다.
─뜻밖이네. 코드도 없이 몬스터의 틀을 벗겨내다니. 그 미누아란 녀석도 제법인걸?
어느새 내 시야를 보고 있던 하페루아가 흥미롭다는 듯이 말했다.
나 역시 동감하듯 고개를 끄덕이다 문뜩 확 짜증이 들었다.
‘이런 게 있었으면 진작 말했어야지. 완전 망할뻔 했잖아.’
─별일 없을 줄 알았지. 실제로 잘 됐잖아? 그라티아보다 저 꼬꼬마 초월자가 더 관리하기 쉬울걸.
‘진짜 그라티아는 어떻게 된 거야?’
─뭐 그야…
맹약의 시선은 허공속, 어둠이 드리워진 자리를 보았다.
─이제는 그녀가 이면이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