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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0화 〉 16. 얼음 굴 (1) (220/318)

〈 220화 〉 16. 얼음 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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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리 에린에서 돌아온 지 어느새 2주가 지났다.

그곳에서의 상황은 정리가 되었고 메티아스가 알아서 잘 해줄 것이다.

그라티아도 있고 이면과 홀리에린의 통합도 이루어졌으니 별일 없겠지.

“...해서, 드디어 시작할 수준까지 왔어.”

천공의 섬의 회의실 안.

보랏빛 장막이 쳐진 회의실 중앙, 하페루아는 푹신한 의자에 쭉 기대며 푸른색의 창들을 허공으로 밀어 넣었다.

창은 스스륵─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그런데 지금 싸울 정도는 아니잖아?”

“맞지. 이건 말 그대로 가능한 정도니까.”

통합 서버로 온 그날부터 하페루아와 계획한 관리자와의 싸움.

솔직히 나조차도 확신이 안 선다.

힘도 힘이지만 아직 마왕은 커녕 무명도 만나지 못했으니까.

“마왕은 그렇다 치더라도 무명이 우리 계획을 방해할 가능성은?”

“없어.”

“없어?”

내 물음에 하페루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레귤러인 무명은 외부 차원의 초월자야. 그의 목표는 오로지 클리어에 있지. 무명이 클리어를 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기지 않는 이상 널 적대하진 않을 거야.”

빛도 하나 지어두기도 했고~

하페루아는 그리 말을 덧붙였다.

무명이 나를 적대하지 않는다라…

과연 그럴까?

“근데 내가 볼 땐 나 만나자마자 죽일 듯이 달려들 거 같은데.”

“괜찮아. 한 번 정도는 살 수 있으니까.”

“...괜찮은 거 맞지?”

“걱정 말래도. 게다가 신경 써야 할 건 무명이 아닌걸.”

“?”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하페루아는 그런 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러곤 가려진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애들 말이야. 저 실력 그대로 놔두면 다 죽을걸.”

“으음… 그건 그렇지.”

다들 1등위에 치고 올라올 수준은 됐으나 여전히 부족한 건 마찬가지였다.

다윤이나 베린은 이번 일로 시험을 통과하며 한층 더 강해지긴 했지만 고유 능력을 각성하지 못했으니까.

나 역시 마찬가지지만 힘의 총량 자체가 다르다.

“뭐 좋은 수 있나?”

“별거 없지.”

그녀는 싱긋 웃었다.

“죽을때까지 구르면 돼.”

­

“흐아… 포기! 포기에요!”

채림은 알록달록한 색이 가득한 주황빛 동산에 철퍼덕 대자로 누웠다.

온몸의 기력은 전부 빠진지 오래였고 몸은 축 처져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입니닷…! 포기하면 안 되는 것입니닷…!”

[맞다. 지금 포기하면 나중을 후회하게 된다. 일어나서 5번만 더 해라.]

­우우!

그런 채림의 눈앞에는 님님이, 용용이, 령령이. 3인방이 빙글빙글 돌며 자신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몸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지만.

“차라리 날 죽여…”

“죽으면 안 된다냥.”

토옥.

주황빛의 둥글둥글한 당근을 마치 구름처럼 타고 온 레빗은 채림을 내려다보았다.

채림의 부탁대로 수련을 도와주고 있지만 정말이지 좀만 더 힘내주면 좋을 텐데.

레빗은 소환한 꼬치를 왕창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어 삼켰다.

“주인님의 지원을 받았으니 주인님을 도와줘야 한다냥. 혼자 죽으면 절대 안 된다냐.”

“흐으… 안 죽어요… 안 죽을 거예요…”

“잘 생각했다냥.”

레빗은 채림의 대답에 싱긋 웃은 뒤 타고 있던 당근을 변형시켰다.

어느새 푸른 하늘에 도넛 모양을 한 주황빛 당근이 수백, 수천 개가 생겼다.

과거 쿠베라의 시험을 응용해 레빗의 취향대로 재탄생시킨 수련.

목적은 간단하다.

“이번에도 도넛을 뚫고 나를 한 대만 때리면 된다냥. 도넛 저번엔 5000개 피하기 였으니… 이번엔 7000개로?”

“...3000개?”

“8000개? 알았다냥.”

“으으…!”

채림은 벌떡 일어났다.

수련할 마음이 들어서가 아니다.

이대로 가만히 누워있으면 저 무자비한 도넛은 사정없이 자신을 내려치기 때문이다.

게다가 환각 속이라 그런지 죽을 듯이 아프지만 정작 죽지는 않는 이상한 공간인 탓에 계속해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오라냥!”

“읏!”

쏟아지는 도넛과 채림의 등 뒤로 뻗어나간 세 개의 다른 날개.

이윽고 알록달록한 공간에 거대한 폭팔음이 들렸다.

­

“윤 씨?”

다윤은 천공의 섬을 돌아다녔다.

곧 티르빙으로 가기로 했는데 김윤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뛰어난 육체 능력으로 순식간에 이곳저곳을 쏘다닐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면 너무 유난스러워 보일까 봐 천천히 걸었다.

그렇게 급한 일도 아니고.

“계세… 뭐예요?”

“?”

그렇게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이 회의실.

윤 씨는 없고 왠 악마녀… 아니, 하페루아가 있다.

이 악마는 마왕성에 있어야 하는데 왜 여기 있는 걸까.

그녀는 자신을 한번 훑더니 피식 웃으며 지나쳤다.

“김윤은 네 방으로 가던데. 혹시 그새를 못 참고 나온 거야?”

“...윤 씨가 제시간에 안 와서 그렇죠.”

“아, 나랑 긴~ 얘기 좀 하느라. 선약이 있었으면 빨리 끝내줄 걸 그랬나.”

“......”

‘마음에 안드는 년.’

다윤은 알고 있다.

이 악마는 일부로 자신을 골려먹기 위해 윤 씨와 긴밀한 관계가 있는 척, 무언가 하는 척한다는 것을.

물론 윤 씨가 당연히 그런 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묘하게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굳이 밖으로 티를 내진 않았다.

자신은 저렇게 옷감보다 살색을 더 드러내는 여자와 다르니까.

그런 생각을 대충 읽은 듯 하페루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다윤은 별생각 안 했다는 듯 말을 돌렸다.

“그보다 여긴 왜 온 거예요? 정체를 들키면 안 되니 당분간 숨어 지낸다 하지 않았나요?”

“그것도 이제 끝났어.”

“그런가요? 누군가에겐 악재겠네요.”

다윤은 싱글벙글 웃었다.

묘한 그녀의 태도에 하페루아는 오히려 진지한 태도로 다가갔다.

“글쎄. 그보다 내가 전에 한말 기억하지?”

“...뭘요?”

“힘없는 헌신은 죄악이라고.”

뚜벅.

하페루아가 한 발짝 더 다가서자 다윤은 한 발짝 뒤로 갔다.

그녀가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단지 그 말에 대한 의미 때문이었다.

“그간 많이 성장하긴 했는데… 아직 좀 부족해. 아니, 많이 부족해.”

“...부족해서 미안하네요. 어차피 윤 씨랑 티르빙으로 가서 더 수련할 거였어요.”

“그래?”

“네! 아주 당신 말대로 윤 씨랑 십몇 년 동안 있을 예정이었어요. 당신 말대로 아주 오~ 랫동안.”

같은 말을 반복하며 ‘윤씨 와 단둘이’ 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오래라는 단어를 덧붙이며.

이 정도면 반박할 여지도 없겠지?!

그리 생각하며 당당해 있을 찰나.

하페루아는 고개를 까닥이며 피식 웃었다.

“이상하네. 윤이는 나랑 가기로 했는데?”

“...뭐라고요?”

­

“음.”

나는 티르빙 원정을 위해 오랜만에 장비들을 정비했다.

이제 더 이상 스텟이나 장비에 큰 영향을 받진 않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있는 게 훨씬 나으니까.

‘그런데 뭔가 쌀쌀하네.’

괜히 오한이 들고 그런다.

벌서 티르빙의 설산에 도착해 있는 기분.

환각을 포함하더라도 꽤나 오랜만에 가는 거라 몸이 괜한 기대라도 하고 있는 건가.

뭔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몸이 덜덜 떨렸으나 별 이상이 없을─

콰아앙!

“윤씨이이이이이!!!”

“아.”

그 오한이 그 오한이 아니었나 보다.

나는 폭주하듯 달려오는 다윤의 몸을 받아내야 했다.

...몸의 아픔보다 앞으로의 미래가 더 아팠다.

­

“다 같이 갈 거였어.”

“...”

“하페루아뿐만 아니라 베린이랑 채림도. 물론 둘은 전처럼 따로 수련을 받을 테지만…”

“...”

“게다가 하페루아는 수련하는게 아니라 보조 역할로 가는 거야. 중간에 언제든지 빠질 수 있─”

“히.”

히히히.

옆에 찰싹 붙어 눈은 무표정 한 체 히히 웃는 게 살짝 소름이 돋긴 했지만 이내 표정을 풀어 내 어깨에 기댔다.

“장난이었어요. 사실 신경 안 써요.”

...쓰는 거 같은데.

내가 의문스럽게 바라보자 다윤은 고개를 저었다.

“윤 씨랑 그 악마 말대로 일이 시작되면 정말 위험해 질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 수련이 필요한 거고요.”

“응.”

“그런데 제 마음대로 계획을 멋대로 바꿀 정도로 이기적이진 않아요.”

“...으음.”

“그러니 윤 씨도 너무 신경 안 쓰셔도 돼요.”

“널 어떻게 신경 안 쓰겠어.”

“......”

다윤은 붉어진 얼굴를 감추며 벌떡 일어났다.

이대로 있으면 안 된다 생각했나 보다.

“가죠! 티르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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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르빙.

어드벤쳐 행성에서 가장 춥기로 유명한 지역이며 이 근방의 어지간한 하급 몬스터도 300레벨이 넘어간다.

특히 설산의 환경은 극악(??)이라 할 정도로 냉혹한 혹한을 자랑한다.

아무리 높은 수준의 용사라고 해도 10분만 가만히 있으면 그대로 동사할 수준.

“선선하네요.”

“미지근 한데?”

물론 고작 ‘높은 수준의 용사’라는 기준 하에서 말이다.

베린과 다윤은 평소와 같은 차림으로 새햐얀 설산을 뽀드득 뽀드득 밟았다.

눈을 본지 오래돼서 해보고 싶었다나 뭐라나.

“넌 안 해?”

“전 눈 안 좋아해요.”

헤츨링 상태의 레드 드래곤을 껴안고 있는 채림은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채림은 베린이나 다윤이보다 높은 수준의 초월의 힘을 구사할 수 있지만 ‘뺐을 수’ 있는 대상이 없다면 한없이 약해진다.

채림의 스펙은 그간 수련한 다른 길드원들보다 매우 낮았으니까.

‘몬스터 사냥도 시킬 걸 그랬나?’

초월의 격이나 정신적 성장도 중요하긴 하지만 어드벤처 기본의 스펙도 중요하다.

결국 시스템적인 스텟이라는 것도 하나의 초월의 힘이라 볼 수 있으니까.

“레빗. 채림이랑 예티 사냥 좀 하고 있어. 만렙 찍으면 넘어오고.”

“알겠다냐.”

“...네?”

아직 250레벨도 찍지 않은 채림에게 가혹할 수 있지만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죽어라 잡으면 금방 찍는다.

“나머지는 ‘얼음 굴’로 가자.”

티르빙의 설산 중 기온이 가장 낮은 곳.

그곳에는 시간마저 얼려버리는 초월자가 존재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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