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26화 〉 17. 설산의 사냥꾼 (5) (226/318)

〈 226화 〉 17. 설산의 사냥꾼 (5)

* * *

­

“참. 재밌는 애들이야. 그치?”

나는 도망자들의 동굴 안쪽.

‘쉴터’에 눕혀진 다윤이를 보며 웃었다.

비샨과 주환.

이 쉴터의 어린아이들의 보모 역할을 하고 있었다.

“사냥꾼인지 도망자인지 구분조차 못하니 원.”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그냥 맞아줄 걸 그랬다.

[한계 돌파! 포션을 사용했습니다.]

[5분간 디버프 효과가 반감되고 모든 능력치가 2 증가합니다.]

[3시간 동안 디버프 효과가 두배가 되고 모든 능력치가 5 하락합니다.]

화살까지는 어찌어찌 막았는데 골렘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먹어버렸다.

순간 몸 상태를 일시적으로 회복하고 능력치를 상승시키는 포션.

효과는 좋지만 그 후에 찾아오는 디버프 때문에 함부로 먹을 수 없는 아이템이다.

‘도망자는 맞지 않는다는 걸 진작에 알았다면 안 마셨을 테지만.’

“...미쳤지 아주.”

미간을 찌푸린 하페루아는 내 머리를 꾹꾹 눌렀다.

참고로 나도 누워있었다.

효과가 끝난 뒤 찾아온 극심한 페널티로 인해.

때문에 하페루아는 나와 다윤, 그리고 수면 마법이 걸린 둘을 포함한 네 명를 모두 든 채 이곳으로 와야만 했다.

“아주 몸을 안사려? 응? 내가 안사리는 몸으로 만들어줘?!”

하페루아는 굉장히 화가 난 듯했으나 나는 그저 웃어줬다.

“웃어? 내가 말했지. 다른 애들은 몰라도 핵심인 네가 잘못되면 안 돼…”

똑똑.

“아… 저기…”

대충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아이가 우리가 쉬고 있는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곳에 왔을 때 잠든 주환과 비샨을 보고 기겁했지만 우리가 같은 도망자라는 사실을 알려주자 긴장을 풀었다.

물론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도망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아이템을 사용하자 그제야 우리를 믿어줬다.

“왜?”

“그… 언니랑 오빠는 언제 일어나요…?”

“글쎄.”

수면을 건건 내가 아니라.

나는 머리를 누르던 하페루아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나를 찡그리듯 노려보더니 갈색 머리의 아이를 불렀다.

아이는 뽈뽈 다가왔다.

‘이랑보다는 조금 크네.’

그러나 애늙은이인 이랑과 달리 말투와 태도에서 진짜 어리다는 느낌이 확연히 들었다.

“...둘은 곧 깨어날 거야. 아마 한 두시간 이면 깨어나겠지.”

“아! 가, 감사합니다! 애들한테는 잘 말해둘게요!”

“그러렴.”

하페루아는 아이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었다.

아이는 그대로 고개를 꾸벅 숙이곤 방을 나갔다.

“뭘 한 거야?”

“늘 하던 거.”

하페루아의 손에 무형의 마력이 깃들었다.

아마 그녀는 아이의 기억을 엿보았을 거다.

아무리 그녀의 힘과 격이 줄어들었다고 해도 상대는 초월자도 아닌 어린아이.

하페루아의 정신 칩입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마 그런 시도를 했다는 것조차 모를 거다.

“...대충 20명이네. 성인은 비샨과 주환. 둘 밖에 없어.”

“일부로 가둬 놓은 건가?”

“그럴 확률이 높지.”

으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쉴터에 온 지도 어느덧 3시간.

[남은 행동력 (1 / 5)]

페널티도 사라졌고 슬슬 움직일 만하다.

“어떻게 할까.”

“...우선 시간 좀 벌어야겠지.”

우선 목표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나의 목표는 성장.

아직 각성하지 못한 ‘고유’능력을 완전히 발현시키고 다윤이 역시 완전한 초월자로 각성시킬 필요가 있다.

본래 계획은 하페루아가 통제가 가능한 세계에서 위험 없이 성장하는 거였다.

하지만 이곳은 다르다.

“죽으면 큰일 나.”

“그건 당연한 거 아니야?”

죽으면 큰일 나는 게 당연하지.

내가 그리 말하자 하페루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문제가 아니야. 너와 김다윤은 정돈되지 않은 초월자야. 그 말은 언제든 강한 힘이나 법칙에 휩쓸릴 수 있다는 거지.”

“어드벤처에서의 죽음은 상관없어. 그곳은 ‘명계’라는 육체적 죽음 이후에 혼을 붙잡아 놓을 수 있는 공간이 있어. 게다가 어드벤처는 너희들의 탄생지나 다름없는 곳이니 그곳에서의 변화는 그다지 상관없단 소리야.”

“하지만 이곳은.”

“완전 달라질 수도 있다는 건가?”

“그래.”

붙잡아 두고 있는 육체가 죽음을 맞이하면 정돈되지 않은 ‘격’은 무방비하게 놓일 테고, 그 과정에서 초월적인 누군가의 개입으로 극적이게 변화될 수 있다.

“음…”

“우선 시간을 벌자. 너나 김다윤이나 성장을 해서 조금씩 조금씩 강해진다는 ‘이야기’가 필요해.”

관리자를 만족시킬 만한 이야기가.

“그때가 되면 관리자도 너의 기행을 이해해 주겠지.”

“좋아.”

우선 당분간 정비 좀 하기로 하자.

­

“아아…”

비샨은 손을 벌벌 떨었다.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왜 주환을 바로 안 죽이나 했더니…’

도망자든 사냥꾼이든 퀘스트가 있다.

퀘스트는 각자 직업에 맞는 임무를 내어주며 행동력을 소모하고 보상을 얻는다.

당연하게도 쉬운 임무는 그다지 많은 보상을 내어주지 않는다.

약한 도망자 20명을 잡아도 특별한 활약이라 보기 힘드니까.

하지만 그들을 잡아두고 키울 수 있다면,

그들을 성장시키고 그들을 잘만 이용해 먹을 수 있다면.

지금은 어리숙한 도망자들이지만 훗날 이곳에 적응하고 점차 성장하면 좋은 먹잇감이 될 수 있다.

때문에 도망자 무리가 숨어살면 일부로 그들을 전부 소탕하지 않고 놔두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입술을 짓씹은 비샨을 보고 남자의 품에 안긴 아이, 이아가 손을 붕붕 저었다.

“언니! 몸은 괜찮아?”

“다친 거 아니야?”

“다행이야. 잘생긴 오빠랑 이쁜 언니들이 먹을 것도 줬어. 당분간 식량 걱정은 없겠다!”

“주환이 형은 아직 안 깨어...”

남자의 곁에 있던 아이들이 다가온다.

아무것도 모르는 해맑은 얼굴들.

비샨은 말하고 싶었다.

정신 차리라고,

그건 다 너희들을 속이기 위한 사탕발림이라고.

큰소리로 외치고 싶었지만 저 남자의 눈빛을 보니 도저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모습.

식은땀이 흘렀다.

“...괘, 괜찮아.”

“초롱이랑 에리스가 또 싸웠어! 언니가 가서 말려줘야 해!”

“야! 지금 그게 중요해? 비샨 누나랑 주환이 형이 다쳤는데!”

“언니 언니! 나 언니가 말해준 마법 연습 다 했다. 이제 고드름 만들 수 있어!”

“난 불도 만들 수 있거든? 얼음보단 불이 더 쎄지!”

“아니거든! 얼음이 더…”

아이들은 제각각 말을 내뱉는다.

평소라면 전부 조용히 시킨 뒤 시답잖은 얘기를 거르고 앞으로의 생존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어줬을 테지만…

“고생이 많네.”

“...네.”

비샨은 남자의 작게 내뱉은 말에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

그는 안고 있는 이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연푸른 색의 머리카락과 작은 원양의 뿔을 가진 이아는 헤헤 웃었다.

딱 봐도 인간이 아닌 아이.

이곳에 처음 떨어지고 제법 놀랐지만 애초에 이 쉴터를 비롯한 설산에는 인간보다 외계인들이 더 넘친다.

물론 그들 입장에서는 자신이 외계인이겠지만.

뒤늦게 정신없이 아이들의 얘기를 들어주던 비샨에게 남자가 말했다.

“잠깐 얘기 좀 하지.”

그것은 마치 사형선고 같았다.

­

=...미쳤어.

붉게 물든 설산.

토잉은 눈밭으로 위장해 모든 상황을 지켜보았다.

처음 만날 때만 해도 힘이라곤 없다시피 할 정도로 약했던 녀석이 사냥꾼 넷을 죽였다.

더불어 ‘특수’ 등급인 사냥꾼의 채찍마저 파훼하고 아이템을 강탈했다.

차원 유랑자라 하기에는 너무나도 강한 능력.

‘힘을 숨기고 있었나? 그러면 왜 불법으로 참여한 거지?’

저 정도 능력이 된다면 굳이 불법적으로 들어올 필요 없이 정식 루트로 참여하면 됐을 텐데.

=이상해.

이상하다.

확실히 이상하고.

‘...저 정도면 ‘러너’에 합류하면 큰 힘이 될 거야.’

매력적 이었다.

사냥꾼의 적은 도망자만이 아니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며 힘의 균형을 유지한다.

때문에 도망자들의 최대 집단, ‘러너’는 큰 견제를 받지 않고 성장했다.

하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도망자 신분이다.

만일 설산을 삼분하고 있는 사냥꾼 집단이 ‘도망자 척살령’이라도 내린다면 한달 안에 모든 도망자는 전부 죽어나갈 것이다.

‘관리자가 그리 놔두진 않겠지만…’

사냥감 없는 사냥꾼은 의미가 없다.

그들도 그걸 알기에 러너를 적당한 선에서 놔두지만 최근 들어 그들에 대한 견제가 심화되고 있다.

영향력.

이 게임의 핵심이자 최종 목표라고 불리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목표는 간단하다.

도망자든 사냥꾼이든 영향력을 50% 이상 모으면 승리한다.

때문에 사냥꾼 무리들은 서로를 견제하며 어떻게든 영향력을 모으기 위해 노력한다.

여기서의 영향력은 단순히 지분이라기보다는 ‘이야기의 값’이다.

더 흥미롭고, 더 색다르고, 더 어려운 이야기를 써내려 갈수록 영향력이 오른다.

당연히 영향력을 가진 상대를 죽인다고 그 영향력을 뺏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단지 ‘사냥꾼이 사냥꾼을 죽였다!’ 라는 이야기의 값을 받는다.

그렇기에 사냥꾼들은 근사한 이야기를 꾸밀 세력을 성장시키며 영향력을 모아 나간다.

여기서의 도망자는 철저히 조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지만…

도망자가 영향력을 모으기 시작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바벨 님께 알리자.

러너의 수장이자 내로라하는 강한 사냥꾼과도 대등한 싸움이 가능한 유일한 인물.

‘...이제는 안 유일하지만.’

토잉은 눈덩이를 굴리듯 조심스레 도망자들의 집단, 러너로 몸을 움직였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