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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0화 〉 17. 설산의 사냥꾼 (9) (230/318)

〈 230화 〉 17. 설산의 사냥꾼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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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산은 어지간한 나라 여러 개를 붙인 것만큼의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나름 스텟을 올린 사냥꾼조차 설산을 한 바퀴 돌려면 3일을 꼬박 달려야 할 정도.

물론 이동 관련 아이템이나 초월의 힘을 사용한다면 시간이 단축되겠지만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곳을 넓었다.

파앙!

켕!

“잡았나?”

“못 잡았어.”

주환이 쏜 화살의 목적지를 확인한 비샨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냥꾼이 잘 오지 않는 설산의 외각.

야생동물을 사냥하던 주환은 다리를 스친 사슴을 아쉬워하며 화살을 회수했다.

“사슴이 아니고 고라니였어.”

“고라니는 사슴이든 맛만 좋으면 된 거지.”

주환은 피식 웃으며 활시위를 겨눴다.

작가에게 5700자를 시원하게 박고 이곳에 떨어진 뒤로 신이란 신은 다 찾아 원망했지만 어찌어찌 살아갈 수는 있었다.

■ 도망자 / 화살은! 되돌아오는 거야!

┏ 효과: 빗나간 화살은 ‘반드시’ 돌아옵니다.

┣ 행동력: 적을 처치할 시 행동력 1 소모.

┗ 구매가: 500 Point / 화살 1 Point

■ ※ 불펌 금지!

무려 500포인트 짜리 활.

잡지만 않는다면 무제한으로 화살을 쏠 수 있는 매우 유용한 무기.

평범한 도망자들은 꿈도 못 꿀 가격대의 장비였지만 주환은 시작부터 이 활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이 정도면 알아서 살아가겠지? 하고 던져준 느낌으로.

‘살기는 무슨. 희망고문하려고 준 거겠지.’

분명 주인공은 대단한 특전과 직업을 얻고 날아다니더만, 자신이 받은 거라곤 고작 활과 화살이 전부였다.

그래도 이 활 때문에 지난 5년간 살아남은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래도 멀리 도망은 안 갔네. 내가 잡을 게.”

쩌정!

비샨의 손끝으로 내리는 눈의 결정들이 한데 모였다.

모인 결정들은 얇은 고드름이 되어 저 멀리 도망가고 있는 고라니의 다리를 노렸다.

피피빅!

화살을 스쳐 움직임이 둔해진 고라니의 다리에 고드름이 박히자 고라니는 균형을 잃고 그대로 눈밭에 슬라이딩을 했다.

그 모습을 본 비샨과 주환은 빠르게 달려가 고라니를 제압해 숨통을 끊었다.

“...생각보다 크기가 작은데.”

“그러게 분명 멀리서 볼 때는 엄청 커 보였는데.”

비샨은 아쉽다는 듯 쥐똥만 한 마력을 운용해 고라니를 얼리기 시작했다.

이러면 부패를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을 거다.

“...나도 마법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너도 배워.”

“그게 되면 이미 5년 전에 썼지…”

활을 지급받은 주환과 달리, 비샨은 마력을 얻고 마법을 쓸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때문에 처음에는 비샨이 새롭게 빙의된 소설의 새 주인공인 줄 알았다.

마법을 쓰고 불합리한 도망자 신분에서 살기 위해 노력하는 주인공.

아마 자신은 원작을 읽지 않은 그녀의 보조를 위한 조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주인공이면 5년 동안 뭔가 변했겠지.”

“...인정하기 싫지만 맞는 것 같네.”

변한 건 없다.

주환은 활 솜씨가 좋아졌고 비샨은 마법 실력과 캐스팅 속도가 빨라졌다.

그게 다였다.

활의 위력은 강해지거나 빨리 지지 않았고,

마력은 5년 전과 크게 달리 지지 않고 메테오나 폭풍을 일으키기는커녕, 모닥불 하나 피우는 게 전부였다.

이들은 주인공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분들이 도움 주시긴 했잖아.”

한 달 전, 쉴터에 나타난 은인.

처음에는 양식업자인 줄 알고 기겁했지만 도망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아이템을 사용함으로써 오해를 풀 수 있었다.

그분들에게 어찌 강해질지 물었지만 딱히 명확한 해답을 주지 않았다.

‘정 강해지고 싶다면 스텟을 올려야지. 이곳은 평범한 인간들도 내로라하는 초월자를 찍어 누를 수 있는 곳이거든.’

김윤이라는 남자는 그리 말했고.

‘글쎄. 너희가 하위 게임에 있었다면 달리 말했을 테지만… 지금으로선 그다지 도움이 안 될 거야. 정 원하면 기존의 능력을 갈고 닦는 걸 추천해.’

하페루아라는 여자는 그리 말했다.

모호한 대답을 해주는 대신 주환에게는 활을 더 잘 다룰 방법을,

비샨에게는 여러 가지 마법에 대한 지식을 주었다.

솔직히 말하면 기왕 도와주는 김에 좀 더 도와주면 좋겠다만, 이 정도가 한계인가 보다.

“으… 난 아직도 모르겠더라. 활을 백날 쏜다고 극적인 변화가 생길 것 같지 않은데.”

피잉~

주환은 활을 치켜올려 목표물 없이 허공에 쐈다.

화살은 빠른 속도로 날아가다 이윽고 다시 주환의 손으로 돌아왔다.

피잉~

다시 쏘아지는 화살.

그것을 반복하다니 보니 어느새 비샨은 손을 털고 일어났다.

“다 얼었어?”

“응. 쉴터에 도착할 때까지는 멀쩡하겠지.”

비샨은 고라니를 미리 준비한 조잡한 지게에 매었다.

기존의 신체 능력치를 고려하면 주환이 드는 것이 맞으나 스텟으로 인해 달라진 육체는 비샨이 훨씬 더 강했다.

“...내가 들까?”

“됐네요. 나나 지켜줘. 혹시 사냥꾼이라도 만나면 냉큼 버리고 도망쳐야 하니까.”

“에이. 최근에 외각 쪽에는 보이지도 않더만. 사냥꾼들 죄다 그분들 쫓고 있는 거 아냐?”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에이, 설마…?”

비샨! 피해!

주환이 파동의 중심지에서 급하게 벗어나며 외쳤다.

저 멀리서 밀려오는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는 노란빛의 마력.

비샨은 어렵게 잡은 고라니와 지게를 냉큼 포기하고 범위 바깥으로 아껴둔 초단거리 이동 아이템을 사용했다.

기왕이면 고라니도 같이 타면 좋겠지만 부피와 무게에 제한이 있었다.

콰아아아아!!!

비샨과 주환이 간신히 피한 자리는 깊게 파져 타버릴듯한 연기가 세어 올라오고 있었다.

주환은 질린다는 듯이 말했다.

“...진짜 고래 싸움에 개미로 살기 힘들다.”

“시끄럽고. 우선 피하자.”

보통 사냥꾼들이 도망자를 잡을 때 이리 무식하게 공격하지 않는다.

도망자는 기본적으로 사냥꾼보다 모든 면에서 약하다.

행동력만 무한하다면 99% 확률로 잡힐 사냥감들.

그런데 이런 광범위 공격을 쓴다는 건 파리를 잡기 위해 집을 미사일로 날려버리는 것과 같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건 우리들을 노린 게 아니었다.

“근처에 그분들이 있는 거야?”

“나야 모르지. 그보다 휩쓸리면 우리 진짜 죽어.”

비샨은 골렘을 소환했다.

설산 한복판에 커다란 골렘을 소환하는 건 미친 짓이었다.

아무리 설산이 넓다고 하더라도 2층 빌딩만 한 골렘을 소환하는 건 너무 티가 나니까.

하지만 이미 싸움 범위 안에 들어온 상황이기에 최대 속도로 벗어나는 방법밖에 없었다.

비샨은 석제 골렘의 뒤에 주환을 태우고 얼마 남지 않은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골렘은 깜빡거리는 연녹색의 빛을 밝히며 쿵쿵! 타격 지점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기세 좋게 나아가던 골렘은 푸시시… 소리와 함께 이동속도가 급격히 둔해졌다.

“설마 충전 안 했어?”

“여기서 쓸 생각을 안 했지...”

“...일단 내리자.”

골렘은 약한 사냥꾼의 공격 정도는 막아낼 정도로 견고하지만 저 싸움의 여파는 결코 ‘약한’ 사냥꾼이 아니었다.

비샨은 골렘이든 사람이든 저 공격에 닿으면 그대로 한 줌의 먼지가 될 거라 확신했다.

골렘을 해제시키고 남은 행동력을 확인했다.

[남은 행동력 1 / 5]

‘...’

골렘을 소환시키느라 너무 많은 행동력을 잡아먹었다.

아마 얼마 못가 그대로 ‘절대 구속’에 걸리리라.

“주환아.”

“이걸 어떡… 응?”

활을 들고 안절부절 하는 녀석.

비샨은 그런 모습에 피식 웃었다.

항상 주인공~ 주인공~ 하면서 정작 주인공 다운 면모는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모습에 더 호감이 갔다.

이 비인간적인 사냥꾼들 사이로 유일한 인간을 마주한 것 같아서.

“내가 도망가라고 해도 안 도망갈 거지?”

“어.”

주환은 단호했다.

녀석은 항상 그랬다.

그녀는 웃으며 주머니 속에서 천 하나를 꺼낸 뒤 그대로 눈밭에 깔고 앉았다.

주환이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자 비샨은 탁탁 옆자리를 쳤다.

“기왕 갈 거면 편하게 가야지. 늘 각오했던 일이잖아?”

“...그래.”

주환은 옆에 앉았다.

저 멀리서도 공격의 여파가 이쪽까지 섬짓섬짓 다가올 정도.

아무리 백날 노력해도 저들의 발끝조차 도달하지 못할 거 같다.

비샨은 판타지 영화를 보듯 멍하니 싸움의 장면을 바라보았다.

‘나는 왜 이곳에 나왔는가.’

살고 싶었다.

그리고 도와줄 이를 만나 살았다.

책임져야 할 이들이 늘어났고, 식량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밖으로 나와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식량도 많고 쉴터의 위치도 은인분들에 의해 가려진 상황.

살고자 한다면 나올 이유가 없었다.

고기를 먹고 싶다는 이유로 나오긴 했지만 그건 그저 빠져나오기 위해 급조한 핑계에 불과했다.

‘강해지기 위해.’

도망자라는 신분임에도 절대 넘볼 수 없는 사냥꾼을 능가하는 그 강함에 반해서.

‘개미는 개미인가.’

아, 저기 노란빛의 섬광이 이제 우리 쪽으로 다가온다.

더 피할 행동력도, 그럴만한 의지도 별로 없다.

아이들은 은인분들께서 보살펴 주시겠지.

떠 맡기는 것 같아 죄송하지만 어쩌겠는가.

사람은 원래 이기적이다.

그리고 그건 우리도, 저 너머의 괴물들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콰아아아아아앙!!!

마침내 쏘아진 섬광은 두 눈을 감은 비샨과 주환을 갈기갈기 찢어…

“아, 보는 건 처음이죠? 두 분은 처음이 아니시겠지만.”

“...어?”

“설마…”

찢어 놓지 않았다.

푸샤샤샤샥! 소리와 함께 눈 밭에 쏘아진 다윤은 드러누운 채로 자신의 위에 있는 둘을 올려다보았다.

“다행이네요. 하필 떨어진 게 여기라.”

눈을 털고 일어난 그녀는 저 너머의 강대한 기력을 내뿜은 남자를 향해 달빛의 검을 세웠다.

「▼▼월광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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