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2화 〉 18. 다른 세계의 마왕 (1)
* * *
바벨.
행성, 베타시아의 마왕이었던 자.
전 대륙을 어둠으로 물들이고 수만이 넘는 인간들을 참살한 존재.
그들의 수하는 하나같이 끔찍한 외모와 그에 비례하는 강함을 가지고 있었다.
수많은 인간, 영물, 용사, 신 등등… 이 마왕과 그 수하들에게 대적했지만 아무도 마왕을 이길 수 없었다.
그의 손짓 한 번에 수많은 기사와 내로라하는 고수들이 쓸려나갔다.
여신의 선택을 받은 용사는 탑의 절반도 올라가지 못한 체 영혼을 빼앗겨 마왕 군의 병사가 되었다.
영물과 신들도 마찬가지.
그 누구도.
그 어떤 이도 마왕에게 대적하지 못했다.
“이 어두운 대륙을 구원해 줄 이가 아무도 없단 말입니까…”
시체가 가득 쌓인 신전.
여신, ‘아르테이라’는 기도했다.
제발 저 사악한 자를 엄벌할 영웅이 나타나주길.
온몸을 태울 듯이 쏟아진 보랏빛 마력은 흑백의 보호막에 무로 돌아갔다.
[아르테이라!!!]
바벨은 왕좌에서 내려와 우리를 향해 칠흑의 창을 내질렀다.
우리는 피하지 않았다.
일렁~
[큭!]
뒤에 이 모든 걸 막아줄 존재가 있었기에.
팔찌 사이로 옅은 웃음소리가 세어 나왔다.
“오랜만이군요, 바벨. 회의 날 이후로 2년 만인가요?”
[...네년이 미쳤구나.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바벨은 이글거리는 보랏빛의 눈을 부라리며 성녀를 노려보았다.
성녀, 아르테이라는 미소 지었다.
“여긴 당신의 탑. 바벨이 아닌가요?”
[...헛소리하지 말고 본론을 말해라.]
“‘속죄’는 잘 하시고 계시나 여쭈어보러 왔습니다.”
속죄.
수많은 인간들을 참살하고 온 대륙을 어둠으로 물들인 죄.
영웅들을 죽이고, 영물들을 죽이고, 밤하늘 별처럼 무수히 많은 신들을 죽인 죄.
바벨은 코웃음을 쳤다.
[누가 누구에게 말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아르테이라. 그것이 내 입에서 나올만한 말이냐?]
“당신이 뭐라 하든 당신의 죄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헛소리.]
쿠웅!
바벨의 199층이 요동쳤다.
[죄라 하면 본디 선악을 구별할 심판자가 있는 법. 지금 그 심판자가 이곳에 있는가?]
“네. 당연히 심판자는 있습니다.”
[그것이 누구냐. 설마 너라고 하지 않겠지?]
“당연히.”
스윽.
팔찌를 찬 두 명을 잠시 주시한 아르테이라는 텀을 가진 뒤 입을 열었다.
“저입니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당신만큼은 유일하게 심판할 자격이 있습니다.”
[미친년.]
“앞서 말했듯이 당신이 부정하든, 긍정하든 죄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흑백색의 두 쌍의 팔찌가 빛이 난다.
“속죄의 심판도 여전할 것이고요.”
[...]
“하지만.”
“당신에게 죄를 삭감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뭐?]
“이들.”
김윤과 하페루아.
“제가 보낸 이들은 당신이 그토록 혐오하는 ‘사냥꾼’을 물리칠 카드입니다. 당신의 바라는 계획에 큰도움이 되겠죠.”
[너의 무엇을 믿고 이들을 쓴단 말인가.]
“그건 바벨. 당신이 하시기 나름이겠죠.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이들은.
“우리와 비슷한 상황을 겪은 이들입니다.”
성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우리라니.]
“...”
아주 예나 지금이나 제멋대로군.
바벨을 혀를 찼다.
그 망할 년을 당장 찢어 죽이고 싶어도 힘이 필요했다.
무엇보다도…
[용사와 마왕의 딸? 어떻게 그런 조합으로 다닐 수 있지?]
바벨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용사와 악마는 물과 기름과도 같은 존재.
서로 죽고 죽이는 적대적인 관계가 되는 것이 기본적이다.
물론 가끔씩 용사가 역을 타락해 마왕의 편에 서거나 악마가 귀화해 백의 악마가 되는 경우도 종종 있긴 했다.
하지만 이들은 변하지 않았다.
용사에게서 마기가 짙게 느껴지긴 하나 신성에 비하며 정말 작은 크기였다.
악마는 신성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세상에는 예상치 못한 상황이 많아.”
600살은 넘게 먹고도 12살처럼 행동하는 여우도 있는데.
내가 그리 말하며 웃자 하페루아는 가만히 나를 노려보았다.
“왜.”
“설마 같이 엿먹이는 거 아니지?”
“설마.”
물론 하페루아는 이랑은 비교도 못할 정도로 오래 살긴…
꽈아아악…
“닥쳐, 김윤…”
“...알겠으니 놔.”
분명 방어가 15에 달했는데 왠지 꼬집힌 부분이 욱신거렸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본 바벨을 기가 차다는 듯 왕좌로 돌아가 풀썩 앉았다.
[하페루아. 그리고 김윤.]
“어.”
“응.”
[난 말이지. 여신과 관련된 놈을 좋아하지 않아. 그런 놈들은 죄다 쓰레기 같은 놈들이거든.]
바벨을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곤 불쾌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페루아는 안면도 있고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다. 헌데 용사인 너를 믿고 도울 이유를 모르겠군.]
“나도 마기 쓸 수 있는데.”
내 몸에 잠든 악마를 끌어내면 충분히 가능하다.
물론 이렇게 말하니 중2병 같지만 사실인데 어쩌겠는가.
=...
“뭐.”
[그런 어쭙잖은 걸로는 안돼.]
바벨의 보랏빛 눈이 번뜩였다.
[구역질이 난다. 거지 같은 여신의 힘이.]
“내 힘은 아르테이라의 것이 아닌데?”
[같은 빛이라는 것이 중요하지.]
예외는 없다는 듯 잠시 놓아두었던 창을 움켜쥔 바벨은 하페루아를 돌아봤다.
[네 사정은 대충 알고 있다, 하페루아. 네가 이 거지같은 신분으로 돌아온 이유도 네 고향 행성과 관련 있겠지.]
“맞아.”
[허면 당장 옆에 있는 놈을 죽여라. 그리한다면 이곳에서 벗어나고 반드시 너의 일을 도와주겠다.]
“흐음?”
[추가로 너의 행성의 여신도 죽여주지. 엘레노아라고 했던가.]
하페루아는 태생이 악마.
마(?)의 일족이다.
비록 오래된 인연이라지만 마의 군주, 마왕의 딸로서 여신의 대리자인 용사보다 다른 세계의 마왕인 자신 쪽에 더 가까울 것이라 확신했다.
바벨은 여기서 추가 제안을 걸었다.
[더불어 내 고향 행성도 너에게 주지.]
“행성?”
[그래, 너 역시 억압받던 굴레에서 벗어나고 난 뒤 그 후의 상황을 생각해야 할 거다. 그때가 되면 많은 재화와 공간이 필요하겠지. 그 대가라 생각하면 된다.]
“...흐음~”
고민하는 듯한 하페루아.
바벨은 그녀가 흔들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녀의 능력인 ‘맹약’이 걸린 이마가 계속 번뜩이고 있었으니까.
하페루아는 풋. 웃음을 터트렸다.
“글쎄, 내가 굳이 기존 계약자를 파기하고 널 새로운 계약자로 만들 이유가 있을까? 차라리 쓴다면 오히려 ‘완전한’ 초월자가 더 낫지 않아?”
[...그놈들이 네 일을 들어줄 것 같나?]
“당연히~ 안 들어 주겠지.”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니.
[그래. 그렇다면 군말 말고 놈을 죽─]
“근데 있잖아.”
그녀의 손이 김윤의 팔 사이로 들어온다.
“뭔가 착각하고 있네.”
[뭐?]
“넌 절대 내 일을 못 도와.”
불완전한 초월자도.
완전한 초월자도.
그 누구도.
“날 도울 수 있는 건 오직 ‘김윤’ 하나뿐이야.”
하페루아의 눈이 곡선을 그렸다.
하페루아가 폭탄 발언을 던진 이후로 바벨과의 말싸움이 이어졌다.
나는 남일 보듯이 지켜보다 분에 찬 바벨이 칠흑의 창을 들었다.
[그래, 네가 그러하다면 나 역시 제약을 걸어야겠다.]
“제약?”
내가 묻자 바벨은 왕좌에서 내려왔다.
[그래, 제약.]
바벨은 기다란 창을 내 심장에 가져다 대었다.
「▼▼층탑 」
[너에게 탑의 저주를 걸겠다. 그러면 넌 나에게 종속되어 내 명령을 따라야 한다.]
“안된다니까. 바벨. 이 녀석은 내꺼야.”
[걱정 마라, 하페루아. 내가 소유한다 한들 너의 종속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명령의 우선순위를 논하면 내가 위겠지만 너를 해하는 일은 없을 거다.]
“뭔 소리야. 난 내 거야.”
[네 의사를 묻는 게 아니다. 용사.]
파칵!
정말 내 의사를 묻지 않겠다는 듯 칠흑의 창이 내 심장을 비집고 들어왔다.
「▼▼층탑 」
「▼저장 」
일렁.
두근. 두근...
심장을 움켜쥐듯 강한 압력을 뿜어내던 칠흑의 창은 그대로 흡수되어 사라졌다.
바벨의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 무슨 짓을!]
“다른 맛 포션은 안 나오려나. 죄다 딸기맛이니...”
바벨과 하페루아가 대화하는 사이 먹어둔 능력 개방 포션.
덕분에 초월 수치가 바벨보다 훨씬 높아졌고 그 간격을 빌미로 어렵지 않게 ‘층탑’을 흡수할 수 있었다.
흡수한 칠흑의 창을 역 소환한 나는 그대로 바벨의 심장을 향해 창을 던졌다.
바벨은 자신의 층의 마력을 급증 시켜 창의 속도를 늦춰냈다.
하지만.
[하페루아!]
“미안. 바벨. 근데 내 일은 김윤만 도울 수 있다니까.”
하페루아의 마법에 의해 다시 빨라진 창은 그대로 바벨의 심장을 꿰뚫었다.
「▼저장 」
=히, 히익!! 바벨님!!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토잉은 통통 튀며 창에 꿰뚫린 바벨 님에게 다가갔다.
이럴 순 없었다.
바벨 님이 쓰러지다니.
‘군단’급 사냥꾼의 정예, 혹은 그 보스와도 견줄만한 분이 이리 쓰러질 리가 없었다.
아무리 적이 ‘사냥꾼 킬러’라고 하더라도.
“오호…”
이건 말도 안 됐다.
=어떻게 된 거야! 착하신 바벨 님을 죽이다니!
“안 죽였어. 단지...”
나는 씩 웃었다.
“이제 이 탑은 내 게 된 거지.”
[찬탈! 도망자 최대 무리, ‘러너’를 얻자!]
[‘군단’급 무리의 수장 직위, 1000 Point, 설산의 영향력 8.5%를 획득했습니다.]
[설산이 당신을 뚫어져라 바라봅니다.]
[모든 스텟이 6 상승합니다.]
[최대 행동력이 4 증가했습니다.]
[당신의 군단급 소속, ‘러너’의 수장입니다.]
[러너 소속, ‘바벨’(상태이상)을 퇴출하시겠습니까?]
[Yes / Yes.]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