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4화 〉 18. 다른 세계의 마왕 (3)
* * *
“““......”””
조용한 식사 자리.
고급진 스테이크에 나이프를 푹 박은 나는 침묵만 유지하고 있는 이방자들을 바라보았다.
“뭐해? 안 들고.”
“네, 네!”
그제야 이방자들은 제각각 주어진 여러 가지의 도구들로 앞의 스테이크를 먹기 시작했다.
물론 나와 달리 싱싱한 당근을 비법 양념에 푹 절인 뒤 숯불에 노릇노릇하게 구워낸 당근 스테이크였지만.
“...”
“으, 음?! 저, 정말 맛있네요! 하하…”
음식물 파악 불가. 이건 쓰레기가 확─
“그만, 깡통아. 멈춰!”
빅 데이터 로봇의 마이크 부분이 초록색의 점액질 인간에게 막히고 다들 좋지 못한 표정으로 식사를 이어나간다.
그중에는 맛있게 먹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대부분 아무거나 잘 먹는 인외종들이었다.
“저 맛있는 걸 왜 싫어할까?”
“너도 안 먹잖아.”
“그건 그렇지.”
당근 스테이크라니. 누가 그런 끔찍한 걸 개발했단 말인가.
토끼이자 고양이인 녀석의 식성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
그나저나 채림이 레벨 업은 잘 시키고 있으려나.
이곳에서는 따로 연락이 안 되니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통신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탁.
포크를 내려놓고 잠시 생각에 잠긴다.
아르테이라의 목적은 두 가지다.
하나는 자신들을 제외한 모든 사냥꾼의 몰락.
그리고 다른 하나는 바벨을 영원히 사냥감으로 유지시키는 것.
바벨은 이미 사냥감 신세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굳이 사냥꾼들의 몰락을 이끌어내려는 이유는 알 수가 없다.
제아무리 바벨이 종신적으로 이 게임을 굴러야 한다 한들, 사냥꾼의 파멸은 게임을 망치는 행위니까.
자칫 잘못하면 바벨이 풀려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뭘까.’
─당연한 일이야.
나와 마찬가지로 식기를 내려놓은 하페루아는 빈 와인잔을 채웠다.
─이 게임은 상당히 오래되었어. 이미 500년 전에 끝났어야 할 게임이 계속 부분 초기화만 되며 유지되는 중이지.
─벤시는 만족하는 거 같지만 아르테이라는 달라. 그녀는 바벨이 겪고 있는 ‘속죄’가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고 생각해.
‘...그래서 새로 시작하려 한다?’
─맞아.
어느새 조용해진 식탁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향한다.
속으로 대화하는 걸 모른다면 그냥 멍하니 서로를 보고 있는 걸로 보일 거다.
─바벨이 만든 러너는 상당한 세력은 구축했어. 어지간한 사냥꾼은 이를 노릴 수 없지. 설산을 삼분할한 ‘군단’급 집단은 가능하지만 그들 역시 서로를 견제중인 상황이야.
게임이 원활히 진행되려면 사냥꾼은 도망자를 학살하지 않아야 한다.
제아무리 벤시와 계약한 아르테이라라 한들, 게임을 끝내고 싶다고 마구잡이로 잡아 죽일 수 없는 노릇이다.
그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면 다른 쪽 역시 움직일 테고,그들 모두 압도할 정도로 아르테이라쪽이 강한 것도 아니니까.
결국 바벨을 농락하려 했던 것이 도리어 바벨을 편하게 놔둬 버린 셈이다.
─물론 바벨은 여전히 이런 삶을 싫어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다지 나쁜 편은 아니─
“저…”
“?”
오르덴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모든 도망자들과 우리의 시선이 한 데로 쏠리자 그녀는 큼큼 거리며 말을 이었다.
“저희를 어쩌실 생각이신가요?”
“어쩌다니.”
“얘기는 들었습니다. 두 분께서 요즘 유명한 ‘사냥꾼 킬러’라고요.”
“그렇지.”
내 손에 죽은 사냥꾼만 30명이 훌쩍 넘었다.
내 현상금은 도망자에게 있어 인생역전을 노릴만한 금액이자, 사냥꾼에게는 많은 영향력을 얻을 기회이기도 하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혹시 전쟁에 우리를 이용하실 생각이신가요.”
이들의 입장에서 나는 사냥꾼과 싸우지 못해 안달 난 사람처럼 보일 거다.
그런 사람이 러너의 수장 자리를 차지했으니 당연히 전쟁터로 밀어 넣으리라 생각하겠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설마. 너희들이 무슨 수로 사냥꾼이랑 붙어.”
능력치 총합이 7이 체 안 넘는 사람이 90%.
사냥꾼과 대등히 싸울 수 있는 사람은 5%도 안된다.
간부진은 어느 정도 쓸만해 보이긴 하나, 역시 높은 수준의 사냥꾼 앞에서는 명함도 못 내민다.
‘친위대 두 어명에 다 쓸릴 정도야.’
만일 사냥꾼 들이 러너를 적당히 두지 않았다면 진작에 사라졌을거다.
오르덴은 뭔가 반박하려 가느다른 손을 앞으로 내밀다 이내 손을 거두었다.
“왜?”
“...아닙니다.”
‘바벨 님이 있었다면.’
오르덴은 입술을 짓씹었다.
김윤은 모르지만 오르덴과 러너 사람들은 안다.
러너가 버틸 수 있던 이유는 바벨의 고유한 힘 때문이라는 것을.
그의 ‘층탑’이 바벨이라는 탑과 시너지를 내서 가능했던 일이라고.
하지만 바벨은 이미 쫓겨났고, 새로운 수장을 받아들어야 한다.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계획대로 진행 되고 있군요.]
설산의 깊은 지하, 성녀의 거처.
빛 한줌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 머리카락을 가진 성녀의 뒤로 친위대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친위대는 가면을 하나 쓰고 있었는데 아래쪽에는 흐릿한 형태의 태양이, 위쪽에는 깊고 거대한 어둠이 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르테이라를 도와 뛰어난 요새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글쎄요…”
[바벨이 러너를 잃었으니 다들 그를 노릴 겁니다. 그 틈을 타 저희는 목적을 이루면 됩니다.]
이곳의 핵심 도망자인 바벨을 풀어둔다.
그를 잡을 수 있는 건 광군왕과 또다른 군단급 믹스, 그리고 그들의 정예뿐.
그들의 입장에서는 김윤과 하페루아보다 바벨이 더 맛있는 먹잇감이니 당연히 그를 노릴 것이다.
그 틈에 김윤을 움직여 그들의 본진을 습격한다.
이름하여 '빈집털이'.
사냥꾼은 사냥꾼을 공격하는데 많은 페널티가 부여되니 도망자를 이용하는 방식이다.
후에 그들이 찾아오더라도 이미 세력 면에서는 충분히 우위에 있으니 문제 될 것은 없다.
“......”
하지만 아르테이라는 뭔가 찝찝함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계획대로 되고 있음에도.
‘아이야…’
“...간부들을 소집하세요.”
[네?]
달그락. 그녀는 책상 서랍 속에서 오래된 로자리오를 꺼내었다.
거처를 밝히는 유일한 백색의 빛이 십자가 모양의 로자리오를 반짝이게 만들고, 그 자그마한 공간 사이로 ‘아르테이라’의 모습이 비친다.
“변수를 대비해야겠습니다.”
“...이게 너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네.”
나와 하페루아는 탑의 177층. 통제실에 도착했다.
통제실에는 식사 자리에서 보지 못한 도망자들이 제법 많았는데 그들은 한숨도 쉬지 않고 수천, 수만 개의 화면을 관찰하고 있었다.
“이거 엄청비싼건데 용케도 구했네.”
설산을 관찰할 수 있는 도망자 아이템.
나름 값어치를 하는 물건인데다 한두 개가 아니라 여기 있는 걸 다 합치면 5만 포인트를 훌쩍 넘을 거다.
이 비싼 걸 어떻게?
“바벨 님이 오랫동안 구축해둔 것이죠. ...솔직히 이걸 우리에게 나눠주었다면 좋았겠다만…”
오르덴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아꼈다.
확실히 그만한 포인트를 스텟 강화에 사용했다면 사냥꾼 따위를 능가할 정도로 강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걸 관리자가 가만히 놔둘리가 없지.
하페루아는 화면을 띡 띡 넘기며 말했다.
“이건 너희가 없었을 때부터 있던 거야. 오직 ‘관찰’을 위한 장비. 관리자가 이것만 남겨두고 매번 초기화 시킨 거지.”
“...”
“그… 래도 나름 인정은 있었네. 아, 인정이 없으면 이런 식으로 가두지 않았으려나.”
큭큭 웃던 그녀는 계속해서 화면을 넘기다 한 화면을 나에게 보여줬다.
샛노란 섬광이 점칠 되고 이윽고 하나의 인영이 그대로 땅으로 쓰러진다.
“다윤이.”
“쟨 또 왜 저러고 있데.”
하페루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퀘스트를 깨라고 했지 위험하게 사냥꾼과 싸우라는 소리는 안 했으니까.
“애초에 예상한 거 아니야?”
“그랬지. 너도 반쯤 동의했잖아?”
“...”
확실히 이곳에서는 퀘스트 정도로는 성장이 힘들다.
게다가 다윤의 초월의 힘을 생각하면 무언가를 찾는 퀘스트 보다는 전투가 훨씬 수련에 적합하다.
다만 목숨이 위험하니 조금은 사리길 바랐다.
“네가 준 아이템들이 얼마인데. 오히려 너무 과했어. 그러니 제 주제를 모르고 더 날뛰지.”
“언제는 죽도록 굴러야 한다며?”
“제 능력 선에서 말이야.”
뭐가 됐든 다윤이는 무사했다.
왜 저기 있는지 모를 비샨이 다윤을 부축하고 있으니 아마 좀만 쉬면 금방 회복될 거다.
“데리고 올거야?”
“...아니.”
다윤이는 내 옆에 나란히 있을 정도로 강해지길 원했다.
그랬기에 지난 모든 메인 퀘스트가 끝난 이후에 따로 떨어져 긴 시간 동안 수련을 했고, 돌아와서도 수련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 데려오면 다윤의 성장을 막는 꼴이 된다.
오히려 내가 할 일은 지금 당장 다윤이 상대할 수 없는 강자들의 시선을 끄는 일이다.
나는 곧바로 정비를 마친 뒤 다시 사냥에 나섰다.
***
그리고 3일 후.
사냥꾼의 8할이 목숨을 잃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