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5화 〉 18. 다른 세계의 마왕(4)
* * *
***
[당신의 설산의 영향력은 25%입니다.]
[모든 능력치가 10 증가합니다.]
[행동력이 8 증가합니다.]
[설산이 당신에게 기대감을 갖습니다!]
“끄르르륵…”
광군왕와 그의 정예들이 자리를 비운 거처.
마지막으로 남은 사냥꾼이 목숨을 잃고 차갑게 식은 나무 바닥에 처박힌다.
사냥꾼이 득실 득실했던 거처는 형형색색의 파바다로 변해 있었다.
[잘했습니다. 김윤, 하페루아.]
팔찌 너머로 만족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르테이라.
설산을 삼분할 한 사냥꾼 무리 중 하나이자 임시적 협력 관계.
내 손에 들린 찬란한 빛이 번뜩이자 검신에 묻어 있던 피는 언제 있었냐는 듯 사라졌다.
[신기한 검이네요. 빛의 정령왕이 깃든 검이라니.]
“너희 세계에는 없나 봐?”
[정령왕만 없는 게 아니죠.]
팔찌는 무뚝뚝한 말을 내뱉었다.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 그 땅은. 빛과 어둠, 관련된 모두가 죽었거든요.]
너머로 들린 소리는 슬픈 것처럼 들리기도 했으나 어쩐지 만족스러운 것 같기도 했다.
가뜩이나 삭막한 공간이 더욱 삭막해졌다.
주변 정리를 하던 하페루아는 시큰둥하게 피바다를 밟으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옛날 생각이 많이 나시나 봐, ‘여신’님.”
[...전 여신이 아닙니다.]
“흐흥, 그래? 그럼 됐고~”
[......일은 마무리된 거 같군요.]
끄아악…
팔찌 너머에도 비명소리가 조금씩 세어 나온다.
성녀 쪽도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모양이다.
“바벨은?”
[죄인은 광군왕의 추격을 받고 있습니다. 쉽사리 당할 상대가 아니니 당신들은 제 목적을 달성하시면 됩니다.]
“우리의 목적이 뭔 줄 알고?”
[그야… 이곳에서의 탈출 아닙니까? 겸사 겸사 영향력도 모아 정당성도 챙기고요.]
아르테이라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하는 걸로 대답은 대신했다.
탈출은 언제든 할 수 있다.
많은 초월자가 보고 있고 관리자가 제제를 먹인다 하더라도 특이점과 최강자의 힘이 있다면 불가능하지 않으니까.
만일 정식 루트로 들어왔다면 아무리 최강자의 힘이라도 차원을 뚫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우리는 아스트라에 의해 이곳에 들어왔다.
처음 설산에 도착했던 그 장소에 가서 삼격을 쓰면 어렵지 않게 차원의 틈을 낼 수 있으리라.
‘그 삼격이 어렵지만.’
“다음은 어디지?”
[서쪽 입니다. 광군왕의 7번째 거처가 있는 곳이죠.]
“...많이도 있네.”
[네, 그러니 빠르게 처리해야죠. 지금쯤 눈치챘을 겁니다.]
나는 하페루아의 손을 잡고 빠르게 다음 거처로 이동했다.
거처가 있던 자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폭발음과 함께 흔적도 남지 않았다.
***
“크윽…!”
바벨은 어두운 피를 흘리며 설산을 피해 이동했다.
그런 그의 뒤로 검붉은 기운을 가진 남자가 기이한 웃음을 지으며 미친 듯이 질주하고 있었다.
남자가 지나간 자리의 눈은 죄다 파여 사방 팔방으로 퍼져나갔고, 그 주위에는 여파를 피하지 못한 도망자와 사냥꾼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어느새 공격 범위 내에 들어온 바벨의 위로 거대한 무언가가 낙하한다.
「광폭▼▼」
후욱….
콰아아아아아앙!!!
“이, 런 미친놈이!”
바벨은 급하게 수인을 맺어 어둠을 불러냈다.
과거 베타시아 전체를 어둠으로 물들였던 기술.
폭탄 수백 개라도 떨어진 것 마냥 터져나가던 설산이 어둠에 의해 잡아먹히고 위력은 평소의 1/100로 줄어들었다.
“크하하하하!”
물론 그 줄어든 힘조차 버티기 힘들었지만.
쿠구─궁
바벨이 있던 자리는 어느새 커다란 크레이터 생겨있었다.
자신의 몸에 수배에 달하는 거대한 양날도끼를 어깨에 이고 있는 남자는 크레이터의 중앙을 향해 몸을 날렸다.
바벨은 죽지 않았다.
“마왕이라는 녀석이 숨기 밖에 못하는군.”
큭큭큭.
광소에 찬 웃음이 크레이터를 넘어 주변 설산을 장악했다.
그의 말대로 어둠 속에 숨어있는 바벨은 이를 뿌득 갈며 그를 노려보았다.
‘광군왕, 아르도스.’
수십 개의 행성을 단신으로 궤멸시키고, 행성 하나를 문자 그대로 ‘박살’낸 초월자.
고작 이곳에서 게임이나 하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의 녀석이었지만 정작 놈은 만족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디 있나? 내가 설산을 다 들어내야지 나올건가?”
그의 선언에 검붉은 양날 도끼가 웅웅 울렸지만 바벨은 여전히 어둠 속에 숨어 침착하게 사태를 돌아보았다.
러너를 잃었으니 당장 해야 할 것은 단 하나였다.
포인트를 최대한 모아 엔드 스펙에 도달하는 것.
또다시 도망자를 모아 세력을 규합하는 건 무리가 있었고 차라리 김윤처럼 약한 사냥꾼들을 잡아 ‘영향력’을 모으는 방법밖에 없었다.
지금처럼 혼란스러운 상황이라면 어렵지 않게 모을 수 있을 테니까.
문제는 사냥꾼의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광군왕 같은 미친놈들이 자신을 쫓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르테이라, 아마 그년의 술수겠지.’
그 미친년이 기어코 일을 벌이고 말았다.
바벨은 화에 치밀어 오르다 가도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그는 모든 걸 참살시킨 마왕이지만 아르도스처럼 광기에 사로잡힌 야만인은 아니다.
그랬기에 바벨은 이 상황의 흐름을 대부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봐. 아르도스.”
“이제야 나올 생각이 들었나?”
“닥치고 내 말을 들어라. 지금 너희 거처와 수하들이 죄다 파괴되고 죽어나갔을거다.”
“...뭐?”
아르도스의 어깨에 있던 양날 도끼가 까딱거렸다.
“지금 성녀, 그년의 술수로 모든 사냥꾼이 공격을 받고 있다. 성녀는 내가 러너를 잃고 설산을 배회한다는 사실을 퍼트렸겠지. 맞지 않나?”
“...계속 지껄여봐라.”
“지금쯤 너를 비롯한 군단급과 그 하위 사냥꾼 무리가 죄다 습격을 받았다. 너는 미친놈이라 전투가 시작되면 부하 따위에 신경을 안 쓰지만 아마 이미 수십 차례 연락을 받았겠지?”
그에 아르도스는 진작에 꺼둔 연락망을 확인했다.
수백 통의 연락과 피로 점철된 듯한 음성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
“지금 우리끼리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성녀 그년의 손에 계속 놀아나기 전에 반격을─”
콰직!
정확히 어둠 속에 숨은 바벨의 위치를 저격한 아르도스는 혀를 차며 도끼를 다시 회수했다.
“그게 뭐가 어쨌다는 거냐. 습격을 받았으면 받은 거지.”
종이 한 장차이로 공격을 피한 바벨이 피를 토하듯 외쳤다.
“그게 중요하다! 이 멍청아! 날 잡아도 아르테이라에 의해 그대로 죽을 거다!”
“멍청한 건 너겠지. 그년은 날 못 이겨. 아니 누구도 날 못 이겨.”
카륵.
도끼의 양날 부분이 점점 커지고 그의 주위 공간이 불안정하게 요동치기 시작한다.
“난 최강이다 이 벌레 새끼야.”
콰훙!
양날 도끼는 바벨을 짓뭉개고 산산조각 내었다.
***
“대장 뭔가 이상한데.”
추적자, 지스리는 아까부터 통신망이 마비된 것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바벨이 러너에서 추방당한 것이 알려진 지 3일째.
김윤을 쫓던 대부분의 사냥꾼들이 노선을 바벨 쪽으로 틀었고 믹스를 포함한 그 무리도 그들 중 하나였다.
광군왕을 비롯한 정예 몇 명도 참여했고 성녀 쪽의 정예들은 많이 참여하지 않았으나 그 하위 사냥꾼들은 많이 참여했다.
세력이 가장 적었던 믹스 쪽은 하위 사냥꾼들을 대부분 거처에 둔 체 정예들만 추격에 나섰다.
평소라면 적당히 사냥하고 상황을 봤겠지만 바벨은 달랐다.
‘녀석을 잡는다면 ‘승리’까지도 노려볼 수 있다.’
그랬기에 추격에 나선 것인데…
“모두 응답이 없나?”
“응.”
“......습격인가.”
믹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검을 들었다.
그의 대검 사이로 검푸른 마나가 터져 나왔고, 설산의 작은 언덕 뒤에 있던 사냥꾼 하나가 그대로 휩쓸려 싸늘한 시신으로 변했다.
사냥꾼이 사냥꾼을 사냥하는데 많은 페널티가 부여되지만 믹스에게는 페널티 따위야 문제 될 수준이 아니었다.
시신의 가슴팍에는 빛과 어둠을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재밌게 돌아가는군.”
처음부터 함정이었나.
믹스는 피식 웃으며 대검을 쥐었다.
대검의 손잡이는 비명을 지르듯 꽈드득 소리를 내질렀다.
시신의 상태를 살피던 지스리는 믹스를 돌아보며 붉은 마나를 거두었다.
“대충 파악했는데 정확히 어디 있는 건지는 알 수가 없어. 저쪽에도 정보를 뒤트는 초월자가 몇 있어가지고.”
“성녀의 거처는 알 수 없나?”
“대장도 알잖아? ‘지하’는 진입할 수 없어.”
위치와 좌표가 계속해서 변하는 곳.
어찌어찌 진입한다고 해도 수만 개의 ‘지하’가 미로처럼 퍼져 금방 길을 잃을게 분명했다.
부순다고 해도 수만개 전부를 부술 수 없는 노릇이니.
“우선 성녀와 그 무리가 있는 장소는 총 다섯 곳이야. 이미 지나친 곳일 수도 있어. 감시인원은 그리 중요한 인물이 아니거든.”
“상관없다. 제일 빠른 곳부터 간다.”
위치를 공유 받은 믹스와 정예들은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광군왕의 7번째 거처가 있는 곳으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