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38화 〉 18. 다른 세계의 마왕 (7) (238/318)

〈 238화 〉 18. 다른 세계의 마왕 (7)

* * *

***

소녀의 마을이 사라진 지 한 달이 흘렀다.

소녀는 아침에 일어나 파리가 날리는 감자를 털어낸 뒤 조심스레 타오르는 불길에 가져다 댄다.

마을에 타오르는 불은 마족 중 하나인 불의 악마라는 자가 심어놓고 간 불이었다.

연료도 없이 계속해서 타오르는 불은 마을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화력이 강했으나 불의 옆에는 피로 물든 강이 흐르고 있었다.

피의 악마가 만들어낸 강.

때문에 불은 마을 전체로 퍼지지 않고 강 주변만을 태우고 있었다.

타닥. 타닥.

다 익은 감자를 조심스레 먹기 시작한다.

평범한 불이 아닌 만큼 소녀에게 서서히 마(?)의 기운이 스며들었으나, 심한 정도는 아니었고 설령 안다 하더라도 먹어야 했다.

‘죽을 수 없어.’

이대로 죽는 건 너무 억울하다.

가족의 복수를,

마을의 복수를,

...조금은 어렵겠지만 인류의 복수를 위해.

소녀는 살아야 했다.

깨작 깨작 하나의 감자를 해치운 소녀는 다시 터덜터덜 걸었다.

오늘은 옆 마을로 가서 식량을 구해야 한다.

자신이 살던 마을의 식량은 오늘로 다 떨어졌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아… 하아…”

옆 마을은 꽤나 멀리 떨어져 있다.

작은 발로 나아가기에는 꽤나 무리가 있는 거리.

허나 소녀는 계속해서 걸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소녀는 살던 마을과 비슷한 풍경의 마을을 발견했다.

“아, 아아….”

그리고 아직 떠나지 않은 거대한 크기의 검붉은 오크 하나도.

오크는 죽은 지 얼마 안 된 시체를 뜯어먹다 소녀를 발견하곤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거대한 마수들에 비하면 평범한 발걸음.

쿵!

쿵!

그러나 소녀의 귀에는 마치 천지가 흔들리는듯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눈물 콧물을 흘리는 소녀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바닥에 놔뒹구는 작은 나뭇조각을 피가 날 정도로 쥐었다.

엄지와 검지로 소녀의 옷가지를 잡은 오크는 그대로 입을 벌려 입안에 넣으려던 순간.

푸욱.

“끼웨에에엑!!!”

소녀의 나뭇조각이 오크의 눈을 찔렀다. 오크는 비명을 지르며 소녀를 벽에 내던졌다.

콰아아앙!

“끼윽… 커억...”

벽에 처박힌 소녀는 온몸이 부서진 채 피눈물을 흘리며 코뿔소처럼 달려드는 오크를 보았다.

“끅... 끅…”

웃음이 났다.

눈물이 났다.

살고 싶었는데.

살려고 썩은 음식까지 먹으며 발버둥 쳤는데.

‘죄송해요.’

소녀는 서서히 감기는 눈을 감으며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깨어났구나.”

여신을 만났다.

***

“이제 안 보이네.”

멀리까지 날아온 하페루아는 나를 눈밭에 내려놓았다.

[남은 행동력 (4 / 13)]

나를 잡고 날아다닌 건 하페루아지만 그 비용을 내가 대신 지불했기에 행동력이 꽤나 줄어든 상태였다.

적어도 당분간 싸우는 건 좀 무리겠지.

나는 아르테이라가 준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믹스의 공격을 막느라 제법 힘이 소모된 팔찌.

아마 두어 번만 더 막으면 부서질게 분명했다.

“이제 어떻게 하지?”

[...우선 저희가 광군왕을 잡겠습니다. 당신들은 정비 후 믹스와 남은 사냥꾼들을 맡아주세요. 믹스는 굳이 잡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알겠어.”

[한동안 바빠질 예정이니 위험한 일이 아니면 연락은 하지 말아 주세요.]

“그래.”

뚜욱.

팔찌는 반투명해지고 자잘한 소음이 들리던 통신은 잠잠해졌다.

삭막한 바람 소리만 들리는 설산.

나는 하페루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우선 정비 좀 하고 움직이자.”

‘성녀가 우리 뒤통수를 칠 모양인데.’

하페루아 역시 나를 돌아봤다.

“러너로 돌아가는 게 좋겠지.”

─애초에 그녀랑 같은 편도 아니었잖아?

말과는 전혀다른 생각.

희미해진 팔찌가 조금 움직이는 걸 보고 나는 옅은 웃음을 삼켰다.

아르테이라는 높은 수준의 초월자기에 어설픈 통신 장비를 사용하면 금방 들킬 수 있다.

하지만 나와 하페루아는 ‘맹약’에 의해 서로가 연결되어 있는 상태.

제아무리 아르테이라라 한들 생각으로 대화하는 걸 읽을 수 없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다시 돌아갈 수 있겠지?”

‘벤시가 우릴 막을 가능성이 있을까?’

“아마도 그렇겠지.”

─글쎄. 제아무리 벤시라고 해도 바벨처럼 묶어두는 건 힘들걸.

애초부터 성녀와는 같은 편이 아니었다.

서로 목적이 맞아서 같이 행동했으나 애초에 성녀는 우리를 팔찌로 묶어두며 이용하려 들었으니까.

성녀의 진짜 목적은 바벨의 강탈.

그녀는 우리에게 계획을 설파하며 자신의 진짜 목적을 알아차리지 못하길 바랐으나 좀만 생각하면 금방 나올 수 있는 답이었다.

그리고 그 바벨을 대체할 만한 사람은 나밖에 없겠지.

─알아도 상관없다 생각할걸. 아무리 날뛴다 한들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

하나의 게임 속의 관리자와 반초월자는 상상을 초월할만한 차이가 난다.

지금의 나는 어지간한 초월자보다 우위의 힘을 가졌으나 벤시가 마음먹고 제재를 가하면 위험에 처할 수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특이점이 있다.

정말로 벤시가 나를 억압하려 들려면 특이점을 이용해 제재를 무로 돌릴 수 있었다.

“...우선 회수할 건 다 회수해야겠지.’

내 목적은 영향력의 50%를 모으고 우승을 하는 것.

허나 대부분의 사냥꾼이 전멸당하고 성녀 쪽이 우위에 선 상태.

이미 5할 이상의 영향력을 모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러니 영향력을 모으려면 성녀와의 대적이 불가피했다.

나는 심장에 새겨진 문양을 확인했다.

「▼▼층탑」

바벨은 여전히 살아 있다.

‘바벨을 찾아야겠어.’

─김다윤부터 찾지그래? 이제 그냥 놔두면 정말 죽을지도 몰라.

‘다윤이는 따로 맡겨놨어.’

지금쯤이면 올 때가 됐지.

나는 나와 연결된 존재의 감각을 느끼며 러너로 돌아갔다.

***

[...우선 알겠어. 하지만 내가 나서주진 않아.]

“당연하죠. 언니. 일이 마무리되면 받으러 가겠습니다.”

[......]

뚜욱.

벤시의 통신이 끊겼다.

계획대로 벤시의 허가를 받아냈다.

다소 불만이 있는 것 같지만 그녀로서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고 결국 바벨을 내어준다는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허나 게임이 완전히 종료되지 않는 한, 게임의 가장 큰 부품 중 하나인 바벨을 무작정 빼낼 수는 없는 일.

바벨을 받으려면 게임을 종료시켜야 했다.

‘제가 우승하면 바벨의 영혼을 건네받기로 계약했으니, 문제는 없겠죠.’

다만 광군왕과 믹스는 처리해야 했다.

계약 조건 중에는 성녀와 대적할만한 모든 인원이 무력화돼야 한다는 조건이 걸려있었기에.

‘깐깐하시긴.’

결국 포기는 하 돼 일말의 희망을 기대하고 있다는 거다.

혹시나 저 건방진 성녀를 이기고 계약을 무로 돌릴만한 구세주를.

“이미 늦었습니다.”

믹스는 간부의 대부분을 잃고 방황 중.

김윤과 하페루아는 팔찌의 구속에 의해 자신의 말을 따르고 있고,

광군왕은 성녀와 간부들에 의해 토벌당할 위기에 처해있다.

그 누가 성녀를 막을 수 있겠는가.

아무도 막을 수 없다.

그리고 정확히 하루 뒤, 성녀 일행은 광군왕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아르도스. 바벨은 어디갔습니까?”

전투가 크게 벌어졌는지 곳곳이 파여있는 설산.

그 중앙 작은 언덕에는 거대한 양날 도끼를 이고 있는 광군왕이 앉아있었다.

분명 광군왕은 바벨을 상대했다.

그러니 이곳에는 바벨이나 바벨의 시신이 남아있어야 한다.

바벨이 죽는다고 해도 상관은 없었다.

‘초월’을 시작한 영혼은 그리 쉽게 영멸하지 않는다.

더불어 모든 초월자는 게임의 참여를 위해 힘이 제한된 상황.

6등위 초월자인 아르도스라고 하더라도 지금 상태로 바벨을 영멸시키는 건 불가능했다.

“내가 죽였지.”

“...그렇습니까?”

“그래.”

아르도스는 답지 않게 무덤덤하게 말했지만 성녀는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거짓이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당신이 죽였다면 지금 그렇게 태평히 앉아있을 리가 없으니까요.”

비록 바벨이 러너에서 쫓겨났지만 여전히 이곳의 주요 인물 중 하나 인 것은 사실.

바벨을 잡았다면 적지 않은 량의 영향력을 얻었을거다.

하지만 아르도스의 기운은 일전에 만난 것과 다른 점이 없었다.

영향력으로 추가 스텟을 얻지 못했다는 소리.

“당신이라면 직접 몸을 움직여 저희를 죽이러 왔을 테죠. 그러나 가만히 있는 건 뭔가를 기다리고 있던 것 아니겠습니까? 아마 저흰 아니겠죠.”

“성녀. 말이 많아졌군.”

쿵!

“날 잡으러 온 거 아닌가? 그럼 들어와라.”

“...가세요.”

파악!

시작은 불멸을 가진 친위대였다.

그의 손짓에 설산에 잠든 무수히 많은 생명체 들이 깨어났다.

그들은 일제히 아르도스를 향해 각자의 무기를 들고 달려들었다.

“흠…”

콰훙!

콰가가가가가가!!!

단 한 번의 휘두름에 군단이 쓸려나가고 수비를 하던 친위대가 하나가 그대로 찢겨 나갔다.

[...역시 아르도스인가.]

[물러서라, 브테아.]

가면을 쓴 친위대는 ‘지하’를 끌어올렸다.

어두운 지하가 지상을 뒤바꾸고 아르도스를 아래로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콰자자작!

지하가 부서졌다.

어둠 파편 뒤로 광기에 찬 표정을 지은 아르도스는 아르테이라를 향해 달려들었다.

성녀는 조용히 눈을 감고 선언했다.

“...빛은 어둠을 몰아내고, 어둠은 빛에 굴복하리라.”

쩌적.

[명암(??)의 선.]

「▼명암」

아르테이라의 흑백(?白)의 빛이 아르도스의 심장을 꿰뚫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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