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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9화 〉 18. 다른 세계의 마왕 (8) (239/318)

〈 239화 〉 18. 다른 세계의 마왕 (8)

* * *

***

“...맞는 선택일까.”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건 아닌 거다.

“하 몰라, 그냥 믿어보자.”

보랏빛의 여인은 화면을 바라보며 선택을 내렸다.

***

“미친… 새끼.”

쿨럭.

바벨은 지친 몸을 이끌고 러너의 문을 두드렸다.

몸의 일부를 나눠 광군왕의 눈을 돌렸지만 피해는 예상했던 것보다 막심했다.

“진짜 뒤질 뻔했네.”

영혼이 벤시에 의해 강하게 구속돼 있지 않았다면 영혼 일부가 그대로 뜯겨져 나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바벨의 입장에서 이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불운으로 여겨야 할지 의문이 들었다.

쿵. 쿵!

새햐얀 언덕의 허공을 두드린 바벨은 상처를 감싸 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파란 천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벨님?”

“네가 먼저 나왔군. 두 놈은.”

나온 것은 오르덴이었다.

그녀는 새파란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푸른색의 허공의 창을 마구 넘겼다.

“아직 안 오셨어요.”

“그래... “

“...괜찮으세요?”

“말이라도 그렇다 말하고 싶다만, 빈말이라도 괜찮다 하기 힘들...”

바벨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

“찾았네.”

“그러게.”

러너로 돌아오니 커다란 침대에 누운 바벨과 그 주위를 맴돌고 있는 도망자들이 보였다.

다들 침울한 표정에 몇 명은 대성통곡을 하고 있는 걸 보니 참 기분이 이상했다.

학살자인 마왕을 위해 저리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 말이다.

─...설마 비꼬는 거 아니지?

“설마.”

마왕이든 여신이든 똑같은 건 다 아는 사실이니까.

서로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싸우고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 바벨과 네 아버지인 제르노스는 다른 사람이잖아? 같은 마왕이어도 다른 점이 있는 거지.’

바벨은 모든 걸 파멸시키고 초월했지만 제르노스는 자신의 왕국만을 유지하며 세력을 넓혀나갔다.

물론 제르노스가 관리자의 차원 침공을 받지 않았다면… 이라는 전개는 알 수 없지만.

“흥.”

파직.

팔찌의 주위로 검 보랏빛의 장막이 드리웠다.

“아빠는 그럴 악마가 아니거든.”

“그럴 악마는 무슨 악마인데?”

“그야 당연히~”

이렇게 멍청하게 계약해서 붙잡히지 않는다는 소리지.

하페루아는 한심한 눈으로 쓰러진 바벨을 내려다보았다.

‘그 이유였나?’

나는 새삼스레 그녀가 마의 일족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엘레노아가 있어서 그럴 일도 없었어.”

“여신? 그러고 보니 아르테이라가 여신이라고 했나?”

성녀라 불리면서도 동시에 여신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인물.

바벨과의 큰 원한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바벨을 압도할만한 힘을 가진 존재.

‘성녀’라고 하기에는 과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오르덴과 러너의 치료사들이 모여 바벨을 치료한다.

형형색색의 빛이 떠오르고 피로 물든 혈색이 서서히 돌아온다.

나와 하페루아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말을 이었다.

“아르테이라는 뭐지? 성녀? 아니면 여신?”

“......글쎄. 굳이 따지면 둘 다겠지.”

“?”

츠츠츠...

“확실한건 차원 세계에서 처음 마주한 아르테이라는 ‘여신’이었어.”

***

“깨어났구나.”

무거운 눈꺼풀이 서서히 떠지자 소녀는 자신의 앞에 보이는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에 눈을 번뜩였다.

급하게 상체를 일으킨 소녀는 주변을 살폈다.

딱딱한 침대.

성한 곳 하나 없는 회색빛의 열두 기둥.

거미줄이 쳐진 석재 제단.

마지막으로 새햐얀 옷이었지만 잔뜩 누래져버린 옷을 입은 아름다운 외모의 여성까지.

옷은 잔뜩 해졌지만 불투명한 새햐얀 머리카락과 은은한 휘광이 소녀의 복잡한 생각을 하나로 정리해 주었다.

“여신님?”

“그래.”

고요하고 품위 있는 말투.

허나 오랫동안 굶고 지친 사람들 사이에서 살았던 소녀는 감춰진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녀 역시 지쳐있다는 사실을.’

어째서일까.

가족과 함께 굶고 있을 때 여신님께 빌었다.

마을에 마족들이 침공했을 때 여신님께 빌었다.

모두가 죽고 자신 혼자 살아남았을 때 여신님께 빌었다.

여신은 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오크에게 죽을뻔한 위기에 쳐했을때는 여신께 빌지 않았다.

‘어차피 빌어봤자 여신은 답하지 않을 것이기에.’

그런데.

“...왜.”

“응? 분명 상처는 치료했을 텐데.”

“왜, 지, 지금. 에서야... “

소녀는 오랫동안 여신을 믿었다.

태어난 순간 가족들은 여신께 감사를 드렸다. 마을에 풍요가 찾아왔을때 여신께 감사를 드렸다.

어떤 사소한 일이라도 여신께 감사를 드렸다.

나쁜 일이 일어날 때는 여신께 충분한 감사와 믿음을 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믿음은 가족이 모두 죽고 점차 흐려졌다.

“왜. 왜, 왜! 지금 와서야 응답해 주신가요! 좀 더 일찍… 아아아…”

소녀는 울었다.

오랫동안 믿은 여신님께 불경한 짓을 하는 것에 울었다.

자신을 구해준 여신님께 몹쓸짓을 하는 것에울었다.

모든 걸 잃은 자신에게, 여신에 대한 믿음을 잃은 자신에게.

‘왜 이런 불신자를 구해주신 거냐고.’

더 목놓아 울었다.

“...미안하구나.”

여신은, ‘아르테이라’는 소녀를 끌어안았다.

소녀는 계속해서 울었다.

***

베타시아 행성은 몰락하고 있다.

기본적인 마왕과 여신이 공존하는 행성에는 균형이 항상 유지된다.

그들은 서로 힘의 균형을 유지하며 각자의 영역을 공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베타시아는 달랐다.

마왕은 넘볼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고,

여신은 차마 무어라 말하기 힘들 정도로 약했다.

마왕의 간부 둘이면 여신을 가볍게 이길 정도.

그런 상황에 여신이 마왕의 대적자가 되는 건 불가능했다.

여신은 자신의 피조물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고 수많은 대책을 구사했다.

자신의 힘을 한데 모아 강한 피조물을 만든다든지,

그 힘을 온전히 자신에게 모아 마왕을 직접 공격한다든지,

그 도 안되면 다른 차원의 존재를 불러와 상대한다든지.

그 방법들은 당연하게도 통하지 않았다.

강한 피조물은 마왕의 평범한 피조물에 그대로 찢겨나갔다.

여신이 직접 강림했지만 간부들조차 뚫지 못하고 퇴각했다.

용사라 불리는 외차원의 존재는 마왕이 세운 ‘탑’을 오르다 타락해 마왕의 편이 되었다.

세계는 점차 멸망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여신의 세계가.

“...어째서 이런 시련을 주시나요.”

여신은 모든 이들의 믿음의 대상이다.

그런 여신에게 도저히 이겨내지 못할 상황이 온다면.

여신은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점은 세계의 9할을 점령한 마왕이 무슨 속셈인지 점령 활동을 멈추고 자신의 탑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마치 이 세계에 더 이상 흥미가 없다는 듯.’

하지만 그래봤자 상황은 달라질 게 없었다.

여전히 여신은 약하고, 마왕은 강했다.

여신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신전에 틀어박혔다.

나갈 수도 없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마족들과 마왕 숭배자들이 돌아다닌다.

믿음이 흐려져 힘도, 격도 줄어든 그녀로서는 상급 악마도 상대하기 벅찼다.

그렇게 멍하니 신전에 틀어박혀 ‘눈’을 통해 밖을 보던 그때.

‘제발…’

소녀를 만났다.

***

평소라면 기도에 일일이 응할 수 없었다.

여신의 세력이 강성할 때는 기도 인원이 너무 많아 일일이 들어줄 수가 없었고,

여신의 세력이 몰락할 때는 그들의 손을 전부 들어줄 수가 없었다.

자신의 구원을 바라는 이들이 너무나도 많았기에.

그렇게 시간은 지나고 기도를 바라는 이들은 줄어들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구원을 바라는 이가 있다.

‘힘…’

소녀는 힘을 바란다.

가족을 죽인 마족을.

마을을 망친 악마를.

세계를 몰락시킨 마왕을.

이들을 죽일 힘을.

“......미안 하구나.”

하지만 여신은 그런 부탁을 들어줄 수 없었다.

여신이 할 일은 그저 소녀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여신은 보았다.

끼웨에에엑!

소녀의 저 작은 손으로 해낸 업적을.

여신은 마지막 남은 힘을 모두 끌어모아 소녀를 이동시키고 치료했다.

아르테이라는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높은 존재에게 빌었다.

‘이 소녀의 꿈이 부디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빌었다.

***

“깨어났네.”

바벨은 치료를 끝마치자 눈을 떴다.

그는 우리를 보고는 오만상을 지었다.

“망할…”

“네가 찾아와 놓고 뭔 망할이야?”

내 말에 바벨의 심장에 깃든 문양이 빛을 발했으나 딱히 제재를 가하진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고.

“성녀와 같은 편이 아니었나? 왜 여기 있는 거지.”

“안 그래도 그걸 좀 물어보려고.”

하페루아가 만난 아르테이라는 초월자가된 아르테이라다.

그렇기에 초월자가 되기 이전의 아르테이라에 대한 정보는 알 수가 없다.

이미 그 행성의 생명체는 아무도 없었고 누군가의 개입이 있었던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단 하나.

그때의 일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가 있다.

“성녀는 여신인가? 정체가 도대체 뭐야?”

“......”

바벨은 나의 질문의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거지 같은 년을 내 입으로 꺼내야 하나?”

“안 열면 강제로 열게 해줘야지.”

“...내가 베타시아를 완전히 정복한 때였다.”

다른 세계의 마왕은 '성녀'를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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