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화 〉 18. 다른 세계의 마왕 (9)
* * *
***
‘그때의 나는 초월의 가능성을 보았지. 더 이상 행성에는 관심이 없었거든.’
바벨은 완벽한 정복자였다.
행성 그 누구도 자신의 대적자가 될 수 없었고, 그 무엇도 자신의 위험 요소가 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수하들을 만들었다.
자신을 숭배하는 이들에게 힘을 부여해 자신을 따르게 하였다.
그렇게 그들은 정복 활동을 시작한 지 30년 만에 전 세계의 9할을 점령할 수 있었다.
그래, ‘행성’내에선 완벽한 점령이었던 셈이다.
‘그랬기에 나는 이전부터 느끼고 있던 다른 것에 관심을 두었다.’
초월.
하나의 생명을 넘어,
하나의 행성을 넘어,
‘하나의 차원을 넘을 수 있는 존재.’
바벨은 초월자가 되고자 했다.
더 이상 이런 하찮은 필멸자들의 발버둥에서 벗어나 눈을 뜨기 위해.
그는 의미 없는 정복 활동을 멈추고 바벨에 틀어박혀 연구를 시작했다.
주요 능력이자 핵심인 ‘탑’에 초월의 길이 있다고 보았기에.
정확히는 반만 맞았다.
그의 말대로 핵심인 탑은 ‘층탑’이 되어 바벨의 초월의 힘이 되었으나 특별한 교류와 공유가 없었기에 완전히 초월하지 못했다.
그의 힘은 2등위의 초월자를 넘을 정도로 강했으나 ‘격’ 이 힘과 동일시될 정도로 높아 지지 않았다.
‘그때 성녀가 왔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바벨은 저 차원 너머의 초월자들에 비하면 필멸자에 불과하지만 그 역시 수천 년을 살았다.
그랬기에 아마 수십 년이 지났을 거라 생각했다.
누구일까.
그의 탑인 바벨을 열고 바벨을 상대하러 온 이가.
자신의 부하들에게 전부 정복활동을 멈추고 탑에 접근하지 말라 하였다.
그랬기에 지금 활동할 수 있는 건 ‘이지’가 없는 몬스터들이나 여신 숭배자들 밖에 없었다.
모습을 본 바벨은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탑의 문을 연 것은 수많은 성기사 부대나 여신, 다른 세계의 용사 같은 게 아니었다.
성녀.
새햐얀 수의를 입고 목에는 빛나는 황금빛의 로자리오를 차고 있다.
양팔에는 얇고 투명한 팔찌를 각각 하나씩 차고 있으며 머리카락은 회색빛을 띄었다.
누가 봐도 신실한 성녀라 할만한 자태.
머리카락만 푸른색이었다면 여신이라고도 해도 믿을법한 모습이었다.
바벨은 당연히 흥미를 가졌다.
무려 수십년만에 찾아온 여신의 수하.
물론 그 짧은 시간 동안 수복이 됐을 거란 생각은 안하지만 그래도 수많은 악마들을 뚫고 혼자 온 거라면 심심풀이 정도는 가능하겠지.
그는 탑의 층을 줄이고 바로 성녀를 맞이하려고 했다.
혹여나 수많은 함정에 목숨을 잃을까 봐.
‘......’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성녀의 로자리오가 빛을 발하고 팔찌와 푸른 눈 역시 빛을 발하자 바벨의 층이 수수깡처럼 무너져 내렸다.
어느새 수백 개의 층을 자랑하던 바벨탑은 고작 1층과 최상층 하나만을 남기고 있었다.
‘미친년이었지.’
바벨은 무너진 바벨탑에 당혹하다, 저 아래서 치고 올라오는 성녀를 향해 검은 파동을 날렸다.
파지직. 소리와 함께 당연하다는 듯이 찢어지는 파동.
성녀의 손에 깃든 신성한 빛은 파동을 찢고 바벨의 심장을 노렸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닿지 않았다.”
최상층에는 지난 천 년간 연구한 수천, 수만 개의 무기와 마법진, 격, 생명체… 등등이 있었다.
바벨이 위험에 처하자 그것들을 순식간에 성녀에게 달려들었고, 성녀는 큰 피해를 입으며 바벨탑 아래로 떨어졌다.
하지만 바벨은 웃을 수 없었다.
‘대체…’
대체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런 여인 하나가 바벨탑의 꼭대기에 올라올 수준이 되냐고.
그는 기함을 내뱉으며 밖으로 나갔다.
“천년이 지났지.”
그 말에 나는 물론 하페루아 까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천년이 지나?”
“...그 당시 너무 물아 상태에 빠져있었다. 고작, 고작 수십 년 정도가 아니었지.”
세계는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악마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이제는 중소 마을 정도로 작아진 마왕성 주변에는 빛으로 가득 찬 군대가 마왕성 만을 노려 보고 있었다.
마왕에 의해 파괴적인 힘을 자랑하던 몬스터들은 고작 견습 기사들의 수련 용도로 사용되는 수준.
이를 본 마왕은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을 내지을 수밖에 없었다.
“왜 천년이나 지났는데 초월을 못했어?”
“혼자 방구석에 있다고 초월하는 건 아니야. 물론 그런 경우가 있긴 하지만 바벨은 아니었던 거지.”
하페루아는 나의 의문에 답했다.
바벨은 얼굴을 찌푸렸으나 어느 정도는 수긍하는 태도였다.
“천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들의 군대는 나를 두려워했다. 바벨에 도전한 것은 성녀 하나. 그 외의 인물은 아무도 바벨에 오지 않았지.”
물론 성녀가 그리 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지만 성녀가 실패한 이후에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으니까.
바벨은 다시 바벨탑으로 돌아갔다.
저들을 쓸어봤자 어차피 다시 피어날 존재들이다.
무엇보다 저들은 쓸모가 있었다.
「▼▼층─」
***
“......”
“...성녀님?”
“네. 기사단장님.”
성녀의 공격이 실패한지 세 달째.
여신에 의해 무려 천 년 동안 봉인되어 있던 마왕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의 곁을 모신 성녀는 직접 마왕의 재 봉인을 위해 갔으나 치열한 접전 끝에 마왕에게 상처를 입히고 후퇴했다.
성녀 역시 제법 상처를 입었으나 여신님의 가호로 회복할 수 있었다.
...그렇게 사람들은 믿고 있었다.
“슬슬 공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왕이 언제 다시 세상을 공격할지 모릅니다.”
그날 이후로 천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마왕의 공포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여신과 성녀는 늘 마왕의 위험성에 대해 언급했으며 자식을 낳으면 자식에게, 그 자식이 자식을 낳으면 다음 자식에게 까지도.
계속해서 마왕의 위험성을 상기시켰다.
세계는 여전히 마왕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지만 무려 천년이 지났다.
때문에 인간들 중에는 다른 마음을 품는 이들도 있었다.
‘사실 마왕, 별거 없는 거 아니야?’
아무리 천년을 살아온 성녀라 하더라도 혼자서 마왕에게 상처를 입힐 정도라면 군대를 이끌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혹은 자신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라고.
성녀와 여신이 들으면 무슨 소리냐며 당장 참회 시킬 만한 일이었지만 그들 하나하나의 마음을 구속하진 않았다.
‘...위험해. 아직 마왕은.’
지난 천 년 간 여신의 곁에서 수련하고 그분의 빛을 받아들였다.
인간으로서의 틀을 벗어나 장생종이 되어 마왕의 목을 베어버릴 날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충분히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여전히 너무 강했다.
게다가 성녀는, 소녀는 보았다.
최상층에 도달하자 수만 개의 무언가들이 일제히 달려드는 것을.
마왕은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마왕이 정복활동을 멈추고 무려 천 년간 칩거에 들어간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막아야 한다.
‘뭔지 몰라도 만약 실행된다면…’
소녀는 천 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런 소녀의 고개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 아. 이거 다 들리나 모르겠군.]
자신의 머릿속에 울리는 중후하고 끔찍한 목소리에.
마왕성 주변은 물론 저 행성 반대편에 있는 농부들에게도 들렸다.
모두가 혼란스러워하는 그때, 마왕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없는 사이 악마들을 모두 죽이고 인간 문명을 재건시킬 줄이야. 제법 놀라웠다. 그대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짝. 짝. 짝. 짝.
규칙적인 박수 소리가 들리고 수많은 이들은 각자의 말을 내뱉었다.
“뭐, 뭐라는 거야!”
“마왕이 미친 건가?”
“다들 조심해! 정신 공격일 수도 있어!”
각자 귓가를 틀어막고 마법을 이용해 정신 공격을 차단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머릿속을 울리는 마왕의 말을 막을 수 없었다.
[기회를 주겠다.]
[바벨을 올라라.]
[험난하고 위험한, 고되고 어두운 바벨을 올라 나를 만나라.]
[그리해서 내 목에 칼을 겨눠라.]
한 문장 한 문장이 수많은 이들의 머리와 가슴에 박힌다.
지금 이 순간, 마왕은 모두의 곁에 있었다.
[지금부터 딱 50년을 주겠다. 바벨의 탑을 올라 나를 마주하는 이가 단 한 명도 없다면.]
꿀꺽.
[천 년 전 일이 되풀이될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한다.]
[탑을 올라라. 인간들아.]
마왕의 선언(??)이 세계를 울렸다.
***
“...그래서 어떻게 됐지?”
“어떻게 되긴.”
바벨은 별거 없다는 투로 말했다.
“올라온 놈이 없어서 대부분을 죽였다. 그리고 세계가 재건될 때까지 기다렸지.”
마왕(?王)은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천 년간 여신과 인간들은 강해졌지만 마왕은 더욱 강해졌다.
더욱 강해진 악마들과 몬스터들이 날뛰었다.
다시 한번 인간들이 죽어나가고 인류 멸망이 코앞까지 다가올 무렵.
마왕은 다시 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살아남은 이들은 다시 문명을 재건한다.
“그 짓거리를 3번쯤 반복하던 때. 나는 마주했다.”
성녀도 여신도 아닌 무언가.
초월자의 거의 도달한 자신을 압도할 만한 무언가.
“괴물을.”
‘아르테이라’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