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2화 〉 19. 태초의 이름 (1)
* * *
***
아르테이라가 광군왕과 한참 혈투를 벌일 당시.
나는 관리자에게 몰래 통신을 걸었다.
[...김윤?]
“아이템좀 쓰러 왔습니다.”
성녀를 속이려면 팔찌의 감각을 차단하더라도 빼거나 파괴하면 안 된다.
위치는 대강 읽을 수 있을 테니 내가 접근하는 건 불가능.
하페루아 역시 마찬가지일테니 성녀를 잡으려면 다른 방법을 사용해야 했다.
[아니, 무슨, 아이. 아.]
소원권과 내용을 확인한 벤시는 황당해 하면서도 꽤나 귀를 귀울이듯 마지막 말을 끝으로 무려 30분간 말을 하지 않았다.
들려온 대답은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왜?]
“뭐가 왜죠?”
[왜, 성녀를 잡으려는 거야? 너희들의 목적은 탈출 아니었나?]
“탈출을 하려면 성녀를 잡아야죠. 그녀가 영향력의 절반 이상을 들고 있지 않습니까.”
성녀 쪽은 이미 영향력의 5할 이상을 모았다.
지금 광군왕을 잡아도 다른 간부들과 분배해서 받을 것이기에 혼자서 50%를 모으지 못한다.
‘아마도 불멸을 가진 녀석이겠지.’
불멸을 가진 초월자는 어지간해서 죽지 않는다.
그러니 한번 죽으면 추방되는 게임에서 그는 ‘영향력 저장고’ 역할을 하기에 최적의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
벤시는 부정하듯 말했다.
[방법은 많아. 네가 이 소원권으로 너희들을 탈출시켜달라고 하면 나는 탈출 시켜 줄 거야. 이건 그런 아이템이니까.]
“안 시켜줄 거잖아.”
[.....]
통신 너머는 침묵에 빠진다.
내 옆에 있던 하페루아는 옅은 웃음을 지었다.
“우리 솔직해 지자고. 벤시. 정말 그녀 뜻대로 바벨을 놔줄 셈이야? 잘 생각해.”
[...하지만 방법이...]
“김윤은 바벨처럼 게임의 보스가 되지 못해. 부품보다는 조종사에 가깝지.”
[......]
“성능 좋은 조종사를 부품에 넣는다고 잘 돌아가는 건 아니야. 무엇보다도 성녀는 그렇다 치더라도 다른 애들은? 다 감당 가능해?”
‘바벨’이 있는 게임을 즐기는 초월자들.
그런 초월자들이 성녀에 의해 순식간에 탈락당하고 게임의 중요 인물을 멋대로 빼 가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초월자들이 과연 벤시의 게임에 돌아올까?
제재를 걸지 않았기에 신고할 명분은 없지만 널리 퍼져있는 만큼 소문이 급격히 안 좋아질 것이 분명했다.
[...내가 뭘 하면 되는데.]
***
“잡았어요.”
[우아아아앙!!]
나는 레빗과의 시야 공유를 통해 현장을 보았다.
사람 크기로 변한 레드 드래곤을 타고 썰매?를 즐기는 채림과 레빗의 시야 속 나를 보고 눈 인사를 건네는 다윤이.
그리고 쓰러진 아르테이라가 보인다.
“다행히 죽진 않았네.”
“성녀니까요. 게다가 시전 시간도 끝나서 채림이의 효율도 급격하게 떨어졌어요.”
내가 소원권으로 빈 건 채림의 시스템 적용을 하지 않는 거다.
지금 이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움직이고, 또 제압할 수 있는 건 채림이 밖에 없었고 나는 채림이의 능력을 적극 활용해 성녀를 제압했다.
시간은 5분 정도가 한계였지만 다행히 제시간 안에 성녀를 잡을 수 있었다.
다 정리되긴 했으나 아직 남은 게 하나 있다.
“믹스는 잡아야지.”
아르테이라와의 계약이 먼저 진행된 터라 그녀가 하려고 했던 일을 내가 이어받아야 한다.
바벨과 달리 그녀는 초월자이기에 무작정 계약을 무로 돌릴 수 없었다.
시야 속 레빗은 하늘빛의 일렁이는 주먹을 치켜 세운 뒤 그대로 땅에 처박았다.
검고 햐얀 부스러기가 아예 가루로 변하는 모습.
그녀는 계속해서 땅을 내리찍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연기는 허공에 흩어져 사라졌다.
“영향력을 얻었다냐.”
“잘했어.”
레빗의 시야에 수 개의 창이 속속히 올라온다.
상대가 가진 영향력을 뺏을 순 없으나 사건. 즉, 이야기를 통해 얻어내는 건 가능하다.
[당신의 설산의 영향력은 15%입니다.]
15%.
불멸을 가진 브테아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죽은 적이 없는 존재이기에 이야기의 값이 꽤나 높았다.
성녀를 대신해 많은 영향력을 들고 있기도 했고.
채림 역시 성녀를 제압해 많은 영향력을 얻었으니 남은 건.
나 25%
채림 30%
레빗 15.5%
믹스 10~20%
나머지 남은 값.
이 정도이려나.
[끼아아아앙!!]
[...돌겠군.]
“어떡할까요. 저희도 갈까요?”
다윤은 매우 신난 채림을 보며 묻는다.
“아니, 너희들은 성녀를 보고 있어.”
깨어나면 물어봐야 할 게 있다.
여신과 마왕의 이야기의 진상 따위가 아닌 ‘어드벤쳐’에 관한.
‘우리와 비슷한 상황를 겪은 이들입니다.’
그 말.
무슨 말이었을까?
***
믹스를 처리하려고 했지만 이미 그는 설산의 사냥꾼을 떠난 지 오래였다.
그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몇 안 되는 간부들까지 떠난 상황.
벤시는 그들에게 안 좋은 통보라도 받았는지 피눈물 흘리며 꺼이꺼이 울었지만 내 알바는 아니었다.
하페루아에게 듣기로는 나름의 비용을 내고 플레이하고 있다고 하던데, 멋대로 나가면 그러한 비용을 배로 지불해야 한다.
하지만 시무룩한 벤시를 보니 손해를 벤시 쪽에서 본 모양이다.
믹스를 비롯한 사냥꾼 집단은 나름 중요한 축에 속했기에 가지고 있던 많은 영향력이 소실됐지만, 벤시는 믹스를 탈락한 걸로 처리해 보상을 나와 성녀에게 나누어 주었다.
“오셨어요.”
“응.”
그리고 나는 성녀의 앞에 서있다.
“...하필.”
“큼.”
내 옆에는 바벨이 있었다.
참고로 그는 무릎을 꿇고 있었다.
굳이 서 있게 둘 필요는 없었으니 그냥 꿇리는 게 나을 거 같았다.
허탈하지만 한편으로는 후련해보이는 성녀의 모습을 보니 어느 정도 맞는 판단인 거 같기도 하다.
“언니가 저를 배신했군요. 예상했던 일이었습니다.”
“배신은 아니지. 단지 아이템의 사용만 도와준 거니까.”
내가 얻은 1회 소원권은 정말 극악의 극악의 극악의 확률로 나오는 아이템이라고 한다.
로또를 3번 연속 맞을 확률보다 낮다고 하니, 이 정도는 당연히 들어줘야지.
참고로 아르테이라의 몸에는 수많은 장비들이 사슬처럼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전부 힘과 격의 운용, 행동을 막는 장비들.
군단급 소속이었던 아르테이라와 그 간부들이 가지고 있던 ‘구속’용 장비였다.
“축하합니다. 초월자도 아니면서 내로라하는 초월자들을 굴복시켰군요.”
“...”
“당신들. 여기 우연히 들어온 게 아니죠?”
“뭐, 조금은.”
아스트라에 의해 빨려 들어오긴 했으나 결과적으로 수련을 위해 들어온 셈이니까.
지금 당장 벤시가 우릴 막더라도 충분히 대항할 수 있을 대책도 가지고 있다.
아르테이라는 나와 하페루아를 돌아보다 눈을 부릅뜨고 있었던 바벨을 보았다.
마왕과 아르테이라의 시선이 맞 부딪힌다.
“...웃기죠?”
“뭘 말인가.”
“당신은 여전히 뭘 잘 못한건지 몰라요. 그러고 뻔뻔히 나와 어머니를 증오하죠.”
어머니.
아마 여신을 뜻하는 거겠지.
하지만 그 여신은…
“네가 죽였지 않나. 소녀야.”
소녀는 어머니를 죽였다.
***
4번째 시작.
예고된 약속의 날이 지난지 고작 하루.
바벨의 최상층에 앉아있는 마왕은 자신의 앞에 찾아온 거대한 빛을 보고 침음을 삼켰다.
푸른빛의 머리칼도, 회색빛의 머리칼도 아닌 여인.
그녀의 빛은 찬란하고 반짝였지만 역설적이게도 어두웠다.
「▼─암 」
[...왔나.]
[......]
[그게 너의 답인가?]
바벨은 자신의 앞에 선 ‘아르테이라’를 보았다.
물론 그가 아는 여신으로서의 그녀는 아니었다.
아르테이라는 수천 년간 쌓아올린 힘의 집합체를 단번에 뚫고 올라올 능력이 없었으니까.
악마 간부 둘, 셋에도 쉽게 당할 여신.
허나 아르테이라는 모든 걸 찢어발기고 자신의 눈앞에 당도했다.
소녀는, 아르테이라는 말했다.
[당신이 말한 답을 고민했습니다. 헛소리라고 생각했지만 수천 년의 반복을 겪다 보니 뭔가 잡히긴 하더군요.]
여신과 마왕.
둘은 항상 대립해야 하며 힘의 균형 역시 동일해야 한다.
가끔씩 차이가 나는 경우가 있지만 서로 한대씩 주고 받을 만큼의 균형은 갖춰야 한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베타시아는 어째서 이리도 차이가 나는걸까.
[답은 간단했습니다. 애초부터 여신은 스스로의 자격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여신이 아닌 그저 누군가의 믿음으로, 혹은 창조됐다고 믿는 존재. 그것이 그녀의 정체 였습니다.]
'설령 그녀가 진짜라 하더라도.'
어둡지만 밝은 두 가지의 실이 하나로 통합되며 그녀의 주변을 계속해서 맴돈다.
마왕의 거대한 검은 몸체의 찌릿한 감각이 돌고 바벨의 층은 거칠게 준동했다.
드드드득!!
바벨의 탑이 서서히 기울며 수많은 물건, 생명체, 격들이 사방팔방으로 휘날린다.
[웃기지도 않는군.]
바벨은 피식 웃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의 손아귀로 초월의 힘이 깃들기 시작한다.
[그런건 답이 아니다 애송아. 내가 어미와 같은 존재를 먹어치운다고 해도 여신이 되는─]
[아르테이라.]
「▼─암 」
치직.
「▲명암 」
[그게 내 이름입니다.]
천명(?名)은 처음부터 나를 여신으로 임명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