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4화 〉 20. 전쟁 (1)
* * *
***
아스트라를 잘게 쪼갰지만 아쉽게도 죽진 않았다.
그는 차원만 넘지 못할 뿐 완전한 초월자에 가까웠고 ‘격’에 타격을 줄 정도가 아니라면 육체의 죽음 정도는 문제 될 게 없었다.
설산의 사냥꾼의 문제는...
지금 당장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내 코가 석자니까.’
나조차도 함부로 차원을 못 넘는데 어찌 그들을 처리하고 자시고 할 수 있겠는가.
나름의 운과 여러 상황 요소들이 겹쳤기에 쉽게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나 역시도 보험이 여러개 있지 않는 한 그리 당당하게 다닐 수 없었다.
그래도 약속해 둔 게 있으니 일이 다 마무리하고 가도 늦지 않겠지.
“고생하셨어요.”
다윤은 월광의 빛을 뿌리며 내게로 다가왔다.
본래의 목적은 아스트라의 ‘시간 동결’을 통해 기나긴 수행을 겪는 것.
그것들은 오로지 하페루아의 통제에 의해서만 진행됐어야 했으나 아스트라의 개수작 때문에 틀어진 상태였다.
정신 교육(물리)를 몇 번 거치고 난 뒤 그는 다행히 우리가 원하는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공간 자체는 환각 속 쿠베라의 수련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육체 너머의 영혼, ‘격’을 공격하는 것.’
하나의 존재를 넘어 차원을 넘는 공격을 하는 것이 주된 수련의 목적이었다.
제법 긴 시간이 소요되리라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레빗과 채림은 이미 전부터 수련을 계속하고 있었고 베린은 들어보니 제법 오랜 시간을 수련한 상황.
남은 건 나와 다윤이뿐인데 다윤이는 설산의 사냥꾼 속에서 실마리의 대부분을 잡은 상태였다.
때문에 2년이라는 나름 짧은 시간 안에 이루고자 하는 목표치에 도달할 수 있었다.
“네가 더 고생했지.”
물론 이렇게 해도 차원은 못 넘는다.
정확히는 ‘지금’은 넘을 수 없다고 보는 게 맞겠지.
나는 마지막으로 튀어오는 무형의 존재를 베어냈다.
육체가 죽어나가고 그 너머에 있던 무언가도 같이 베어 나간다.
‘격’을 베었다.
다윤이와 함께 푸른 문을 타고 티르빙으로 돌아오자 아스트라가 눈에 보였다.
[드디어 좀 쓸 만해졌군.]
“또 갈라지고 싶냐?”
[...]
***
“힘드러…”
채림은 동글동글한 예티들을 끌어안은 체 푹신한 침대에 누웠다.
그간 있었던 일들은 정말 파란만장했다.
길드장님의 뜻대로 레빗님과 긴 시간을 수련하고 티르빙으로 향했다.
레벨 업을 위해 티르빙의 수많은 아이스 예티들을 사냥했다.
백 마리, 천 마리, 만 마리.
언제까지 잡아야 할지 의문일 정도로.
채림은 자신이 광역 공격에 특화된 마법사라는 것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일전에 마법 대전을 통해 리엔의 마법석으로 마나를 계속해서 보충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쉴틈 없이 빠르게 잡을 수 없었을 거다.
레벨 업을 다하고 아스트라라는 거대한 예티한테 가니 또 설산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다음은… 정신없이 날뛰었다.
“...죽고 싶어…”
늘 느끼는 거지만 매번 정신을 잃고 난리 치는 건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때의 자신은 정말 이해가 안 간다.
“...그래도.”
이번에는 다행히 도움이 되었다.
정령 도시인 리벤디아에서 큰 사고를 치고 많이 힘들었다.
내가 다 망친 것 같아서.
다들 잘 문제없이 잘 해내는데 나 혼자 문제가 많은 사람 같아서.
그래서 레빗님의 어렵고 긴 수련도 별 불만 없이 열심히 해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보상받았다.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해냈다.
엄청나게 강한, 신보다 강한 사람을 이겨버렸다.
비록 혼자서 해낸 건 아니지만 인정받으니 기분이 좋았다.
“헤헤...”
“다들 한가한가 보네.”
말투는 가볍지만 음색은 절대 가볍지 않은 소리에 채림은 고개를 돌렸다.
새햐얀 머리카락과 쫑긋 솟은 여우 귀를 가진 어린아이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 그, 이.”
“이랑.”
“네! 이랑. 님?!”
정신연령과 나이는 12살이지만 실상은 수백 살을 먹은 여우.
이미 길드에서도 자주 보고 리벤디아에서 같이 활동하긴 했으나 그다지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사실 레빗을 제외하면 대부분 그리 친하지 않았지만 이랑은 더욱더 그러했다.
“그냥 편하게 불러. 편하게.”
“아, 그럼. 이랑? 왔나 보네?”
채림은 상체를 일으키며 답했다.
그녀의 입장에서도 어린 모습을 취하고 있는데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는 게 어색했다.
분명 이랑은 따로 할 일이 있다고 티르빙행에 참여하지 않았다.
시간 동결 차원에 있는 시간은 제법 길었지만 현실은 고작 한 달이 지난 상황.
‘한 달 만에 일이 다 정리가 됐나…?’
“김윤은?”
“길드장님은 수련 중이신데…”
“이미 왔다.”
채림과 이랑의 고개가 돌아간 곳에는 김윤과 다윤이 있었다.
그 둘은 꼭 붙어있었는데 역시 봐도 봐도 잘 어울리는 커플이었다.
채림은 뭔가 몽글몽글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지만 이랑은 모습 따위는 중요하지 않은 듯 바로 본론을 꺼냈다.
“김윤.”
“어.”
“도와줘.”
“어?”
“엄마가 위험해.”
이랑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표정이었다.
***
고위신들의 전쟁.
원래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고위신들은 서로의 영역을 고수하며 싸우지 않는다.
영역은 자신의 힘을 기르는 주된 요인이지만 모든 자연을 자신의 영역으로 만들 수 없고, ‘마왕’이라는 공통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마왕이 무명에 의해 죽고 나서도 그들은 싸우지 않았다.
허나 지금은 달랐다.
마왕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 아래 최상위 악마들도 움직이지 않는다.
탑에 틀어박힌 이들은 나올 생각도 없이 꼼짝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신들의 활동 범위를 넖혀주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만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초월자가 너무 많아.”
지금 이 땅의 초월자만 열이 넘는다.
여신과 마왕, 그리고 정령왕들을 제하더라도 당장 만난 초월자만 해도 성신의 메티아스, 수뇌의 네르토르, 시간의 아스트라…
그 외에도 메인 퀘스트를 깰 당시 마주한 초월자만 둘이 더 있다.
이 외에도 더 있을지도 모르지.
이랑은 분홍빛의 눈을 번뜩이며 말을 이었다.
“원래는 이렇게 많이 없었어. 내 말이 맞지?”
“그래.”
이전, 그러니까 시즌 1의 어드벤처는 앞서 말한 세가지 부류를 제외하고도 ‘홀리에린’ 외에 초월자가 없었다.
전부 그냥 몬스터, 혹은 특별한 지위를 부여받은 NPC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행성에 초월자가 넘쳐난다.
“공식적으로 나온 초월자만 열둘이야.”
그 말에 베린의 머리 위에 있는 세피드는 재미난 듯 웃었다.
그녀 역시 이곳의 초월자중 하나다.
‘도망쳐 온거지만.’
“열넷이지.”
“응?”
“하페루아와 제라드도 있었잖아. 제라드는 죽었지만.”
하페루아는 정체를 숨겼기에 그렇다 치더라도 제라드는 고유 힘 자체가 초월이었다.
초월자가 가져야 할 ‘고유’보다는 ‘초월’그 자체에 신경 쓴 악마.
그것이 제라드였다.
“...아무튼 너무 많아서 문제야. 고위신들이 자연을 나눠가지기에는 초월자들의 입김이 너무 쌔.”
본래 고위신들은 행성에 손꼽히는 강자들이었다.
그런데 초월자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그 강자 순위가 밀린 상황.
초월자들은 신들을 업신여기고 지배하려 들진 않지만 불만과 격차가 점차 심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가장 피해를 보는 건 다름 아닌 이랑의 부모인 이린이었다.
이린은 과거 행성의 3할을 보유하고 있던 신.
비록 지금은 그 영역이 많이 줄어들긴 했으나 여전히 많은 대륙을 보유하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맞아. 그래서 초월자들이 엄마의 땅을 노리고 있어. 정확히는 다른 고위신 모두의 땅을.”
“그러는 이유는?”
지난 십수 년간 안 그러다가 이제 와서 그러는 이유가 있을 텐데.
스윽.
이랑의 자그마한 손가락이 나를 향한다.
“...나?”
“네가 오보로스를 죽였잖아.”
오보로스는 초월자가 아니지만 나름 이름있는 고위신으로 행성의 1할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죽으며 영역은 주인 없는 땅이 되었고 그 땅을 차지하려 고위신들의 회의가 진행되었다.
그 회의에는 고위신만이 있지 않았다.
“초월자들이 고위신의 영역에 관심을 두기 시작 한거야.”
본래 초월자들은 ‘분리 차원’이라는 공간에서 산다.
정령왕들이 리벤디아에서 사는 것처럼,
메티아스가 홀리에린에서 사는 것처럼.
때문에 초월자들과 고위신들은 큰 접점이 없었지만 세계의 겹침이 일어나고 난 뒤로 교류와 왕래가 잦아졌다.
결국 이러한 상황은 예정된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 기폭제 역할을 내가 하게 된 거고.
“분리 차원이 있는 초월자들은 문제가 없어. 그들은 굳이 이 땅에 관심을 안 두니까. 문제는.”
“이곳에 사는 초월자 들이구나.”
본래 초월자들은 하나의 행성에서 살았다.
다들 각자만의 이유로 다른 공간을 마련해 넘어갔지만 여전히 예외는 있는 법이다.
“누군데?”
이랑은 스윽 고개를 돌렸다.
우리의 시선은 이랑의 시선을 따라가고 이윽고 한명 에게로 향했다.
채림이었다.
“저, 저요?”
“네르토르.”
채림이 가진 삼지창의 주인.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