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0화 〉 20. 전쟁 (7)
* * *
***
지금의 나에게는 적수라고 할만한 인물이 몇 없다.
월드 어드벤처에서의 최종적 스펙,
수많은 스킬과 가호,
초월자의 힘과 무구들,
마지막으로 최강자의 힘과 특이점까지.
수많은 힘과 능력을 두른 나는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고 적수라 칭하는 이들 마저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
쓸 수 있는 카드가 넘치고 그중에는 ‘반드시’ 이길 수 있는 카드도 존재하니까.
“...너무 안 보인다 했어.”
그렇기에 그 카드는 반드시 쓰여야 할 곳이 있다.
즉, 지금 사용해서도, 사용할 수도 없다는 소리다.
보라색 에테르의 파도를 보았다.
나는 이것을 잘 안다.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저건 지금의 나를 만든 장본인이나 다름없는데.’
무명(無名).
그가 돌아왔다.
“다윤, 이랑! 당장 이리 와!”
압도적인 힘의 무게에 잠시 멍 때리고 있던 둘은 정신을 차리고 내 쪽으로 뛰어왔다.
채림이를 태운 레드 드래곤도 내 뒤로.
나는 여신의 검을 수납하고 다른 무기들을 꺼내들었다.
처음 목표한 세 가지의 힘을.
「▲정령왕 」 「▲성신 」 「▼신성 」
빛의 정령왕과 빛의 초월자. 그리고 여신.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진 세 가지의 빛이 마치 하나처럼 융합된다.
무결하고 찬란한, 찬란하고 화려한 빛이 나와 그 주변에 스며든다.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이곳, 가에데의 영역에 집중된다.
해골 지팡이는 덜그럭덜그럭 움직임을 반복하고 가에데의 몸은 점차 찢어지듯 흩어진다.
로브 속 어둠은 작은 웃음을 지었다.
이윽고 어둠은 폭발했다.
───!
쿠궁… 쿠궁…
***
“...유씨…”
“다윤아.”
나는 잠시 기절한 이들을 깨웠다.
상처는 없다.
그저 초월적인 힘에 순간적으로 기절한 것뿐.
머리를 부여잡은 다윤은 내 손을 잡고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이랑은 아직도 어지러운지 바닥에 누워있었다.
채림이는…
[길드장님…]
“괜찮냐?”
[네에…]
보랏빛의 기운을 잔뜩 머금은 채림.
상태는 역시 멀쩡하다.
오히려 더 쌩쌩해진 듯 이전에 걸어둔 수면 효과는 찾아볼 수도 없었고 소환수들도 채림 못지않게 강화되어 있었다.
나는 채림이의 눈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전과는 다른 황금빛의 눈.
‘무명의 힘이 맞다.’
뭔 짓을 부리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 일에 무명이 관련된 것이 틀림없다.
‘하페루아.’
─우선 저거부터 회수해. 그 후에 이동하면서 알려줄게.
나는 주변을 살폈다.
검은색으로 가득 찼던 영역은 폭탄 세례를 맞은 것처럼 너덜너덜했다.
크레이터처럼 파여진 가운데에는 다 찢어진 로브와 해골 지팡이가 있었다.
전과 다르게 입을 다물고 있는 형태.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가 지팡이를 집어들었다.
“윤씨 그거…”
“문제없어.”
지금은 단순히 좋은 무기일 뿐이다.
무명의 힘은 세어 나오지 않는.
“...암주(??). 어둠의 주인의 해골이야.”
“이랑.”
이랑은 질끈 감은 왼쪽 눈을 부여잡으며 크레이터로 내려왔다.
그녀는 지팡이를 보고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어둠의 주인은 물건이 따로 있지 않았거든. 실종된 뒤로 소식이 없었는데…”
“가에데가 그를 죽이고 만들었나 보네.”
“...맞아. 이미 알고 있었지.”
그런데 막상 눈으로 보니, 좀 그렇네.
이랑은 천천히 다가와 손을 올려 지팡이를 만졌다.
잠시 공명하듯 기운을 느낀 이랑은 손을 때어 그대로 돌아섰다.
나는 축 처진 이랑을 보며 생각했다.
주인들의 물건이 무명과 관련되어 있다면 더 이상 초월자니 고위신의 전쟁이니 하는 건 우선 순위가 아니다.
무명은 ‘계획’을 망가트릴 수 있을 정도의 위험인물.
주인들에게 단서가 있다면 이 물건이라는 것들을 빨리 찾아야 한다.
‘그중 3개는 이미 확보했고 남은 두 개 중 하나는 미르틱에.’
─하나는 땅의 주인, 지주(??)에게 있어.
“채림.”
[네?]
“네가 담고 있는 기운. 혹시 다른 쪽에서 느껴지는 곳이 있어?”
채림은 단순히 힘을 흡수하고 사용하는 정도가 끝이 아니다.
잘만 이용한다면 퍼진 힘의 위치나 원주인이 사용하던 기술을 고스란히 쓸 수도 있다.
[잠시만요.]
채림은 황금빛의 눈을 감았다.
그녀의 머릿속에 폭발적인 기운이 퍼져나갔고 채림의 온몸을 해집고 다니기 시작한다.
[으읏…]
자격이 없는 자는 앞선 가에데처럼 터져나가거나 녹아내리겠지만 채림은 달랐다.
「▲─ 」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던 이 힘은 시전자를 보호한다.
육체는 부서지지 않는다.
[...두 곳. 두 곳이에요.]
“두 곳?”
채림은 두 가지의 마력의 실을 뽑아 각자의 위치로 쏘아냈다.
실은 단순히 경로만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대략적인 위치와 그곳의 풍경을 나타내었다.
하나는 협곡과 그 아래에 구름이 가득한 고원.
고위신들의 회의 장소이자 나와 레빗이 푸른 나뭇가지를 구하러 갔던 장소다.
다른 하나는…
“...!”
“저기… 설마.”
“...설마가 맞는 거 같네.”
불타오르는 숲.
그러나 이랑에게는 더없이 익숙한 곳.
“녀석들이 위험해.”
천주가 이린의 땅에 있다.
***
고원의 깊은 지하 공동.
바로 위층에는 회의실이 있지만 현재는 전부 빠져나간지 오래였다.
이곳의 주인인 지주는 벽을 열어 숨겨진 문을 통해 더 깊은 지하로 걸어 내려갔다.
뚜벅. 뚜벅.
뚜벅.
[오셨군요.]
“.......”
[가에데가 죽었습니다. 당신의 말을 듣지 않은 모양입니다.]
주어진 한계를 알고 있음에도 그런 선택을 하다니.
수천 년을 산 초월자라 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리숙한 선택이었다.
지주는 갈색빛의 눈으로 어둠 속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에게 초월의 경지를 알려주고 물건에 힘을 불어넣어 준 인간.
비록 인간이지만 절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건 자신도 알고 다른 초월자 모두가 안다.
“...천주는?”
[용신은 여우신을 상대하고 있습니다. 진작에 결판이 났을 테니 지금쯤이면 흡수가 완료되었겠지요.]
“그렇군.”
[한데… 뭐 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뭐지?”
어둠 속 보이는 황금빛의 눈과 그 빛에 희미하게 보이는 코트가 일렁인다.
어느샌가 나타나 주인들의 물건에 힘을 불어넣고 그 물건을 다른 고위신들에게 전해준 존재.
당연한 말이지만 주인들은 이미 죽었다.
비록 자신은 처음부터 지주였으나 그것은 눈앞의 남자가 먼저 찾아와 제안을 걸었기 때문.
만일 지주를 찾아오지 않았다면 자신 역시 초월자가 된 다른 고위신의 양분이 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당신은 용사 아닙니까? 그런데 왜 이런 짓을 하는 겁니까?]
“그게 중요한가?”
[아뇨. 중요하진 않습니다. 다만 순수한 궁금증입니다.]
정말로 궁금했다
여신의 선택을 받은 용사.
비록 용사가 차고 넘쳐서 악의를 가진 용사가 제법 많지만 저 정도로 강하다면 여신의 시선을 안 끌래야 안 끌 수가 없다.
그런데 고위신을 죽이고, 또 그들을 이용하려는 것을 보면 여신의 사도라기보다는 마왕의 수하에 가까워 보였다.
황금빛 눈은 반쯤 감기다 낮은 목소리를 내었다.
“시간이 없다.”
[네?]
“그렇게만 알아둬라. 다른 초월자들은 어떻게 됐지?”
[아. 이미 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다만 물건들을 빼앗긴 게 좀 크긴 하지만…]
“......”
[...아마 문제는 없을 겁니다.]
지주는 그리 말했고 어둠 속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곤 이내 사라졌다.
***
용신은 강하다.
고위신보다도 높은 존재라 불리는 정령왕들과 동일한 시간대를 살아온 존재 중 하나.
세간에는 만일 그가 고위신의 틀을 벗어나 초월자가 된다면 앞서 말한 이들보다 그 이상의 힘을 얻을 거라 추측했다.
그 추측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용신 」
용의 입에 남색의 마나가 들이차고 하나의 목표를 향해 브레스가 날아간다.
브레스의 경로에 모든 것이 삭제된다.
공간을 가득 메우던 마나, 불타는 재, 공기, 초월의 힘 등등…
용은 이번에야말로 저 이상한 고양이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흐아아야아냐…”
파시이이이…
하지만 이번에도 똑같았다.
양팔을 교차시켜 또 한 번 공격을 막아낸 고양이 수인.
그러나 완전히 막아내진 못한 듯 새햐얗던 팔을 빨개져 있었다.
“아프다냐!”
[크르르르…]
용신은 남색의 날개를 펄럭였다.
광풍이 터져나가고 불타오르는 숲은 바람에 못 이겨 사방 팔방으로 터져나간다.
불꽃과 불꽃이 만나 연쇄작용을 일으키고 주위에 폭발이 일어난다.
레빗은 상대를 바라보았다.
정상이 아닌 상태.
조종은 아닌 것 같고 단순히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다.
이성 없이 말 그대로 본능대로 행동하는 모습.
흔히들 말하는 이지가 없는 몬스터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용신은 그렇지 않다고 들었는데냐…’
용신은 일만이 넘은 햇수를 산 만큼, 그리고 용안을 가진 만큼 지혜의 신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존재다.
그런 존재가 저렇게 단순한 괴물처럼 군다면 필시 누군가가 그의 정신을 뒤흔들어 놨다는 거다.
그리고 레빗은 그 존재를 잘 알고 있다.
“복수다냐!”
과거 무명의 공격을 막기 위해 앞섰다가 그대로 튕겨나가 기절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묘─ 」
지금은 다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