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57화 〉 22. 정비 (1) (257/318)

〈 257화 〉 22. 정비 (1)

* * *

***

끝났다.

이격은 세상을 절단하고 무명의 영혼을 베어낸다.

그간의 전투와 베타가 모아둔 에너지를 한계까지 끌어모았다.

하나의 검을 휘두를 때마다 10만에 달하는 에너지가 소비됐다.

특이 저항이 탑재되어 있지 않기에 무명의 본질적인 힘과 관리자의 힘은 흡수하지 못했지만 다른 힘들이 있기에 가능했다.

두 갈래의 검을 내리자 퍼엉─! 소리와 함께 에너지 전송기관이 빠져 나간다.

고작 한번 휘두른 것만으로 고장이 난 모양이다.

털썩.

“다윤아!”

“...졸려요. 좀… 자도, 되죠..?”

안색이 새파래진 다윤이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나를 올려다본다.

이곳까지 오기 위해 소환수들과 수없이 싸움을 이어나가고 오석의 목걸이 중 무려 4개를 깨뜨리기까지 했다.

당연히 괜찮을 리가 없었다.

“응. 쉬어도 돼.”

「▲저장 」

“네…”

스륵.

‘수면’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다윤의 눈을 감긴다.

나는 그녀를 안고 지금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뛰어난 보호막을 걸어주었다.

‘아직 무명은 죽지 않았다.’

정말 끈질긴 놈이다.

영혼이 네 조각 나도 죽지 않는다니.

[.....큭.]

큭큭큭큭….

무명의 웃음소리가 기이하게 울려 퍼진다.

그간 사람들이 알던 묵직하고 조용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

나는 그를 보았다.

무명은 불투명했다.

지금의 무명은 사람이라기보단 ‘힘’으로 이루어진 무언가 같았다.

힘은 쪼개진 영혼을 움직인다.

“그만둬.”

콰아아앙!!!

하늘의 결계가 조각나고 그 사이로 검 보라색의 악마가 내려왔다.

하페루아.

나의 조력자이자 마왕의 딸이다.

“지금 그걸 써봤자 넌 우릴 이기지 못해. 그러니 잠시 기다려줘.”

[하페, 루아. 너의 빚은 갚을 수 없게 됐군.]

“...빚은 나중에 갚아도 돼.”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어찌나 급하게 왔는지 항상 그녀가 걸치던 하얀색 털 목걸이와 은하수 같은 드레스도 입지 않은 상태였다.

대충 걸친 검보랏빛의 정장은 마치 제복 같은 차림이었다.

대충 입었음에도 꽤나 잘 어울렸다.

─김윤.

‘왜.’

─무명을 죽여선 안돼.

‘어째서?’

─놈은 다른 쪽 초월자의 관리하에 있어. 그 초월자는 이곳의 관리자보다도 강해.

하페루아의 표정은 조금 굳어 있었다.

─그게 무명이 어떻게든 멸망을 막으려는 이유야. 조금이라도 멈춘다면 그 자가 무명의 세계를 멸망시킬 테니까.

─사실 우리와 그의 멸망은 그다지 상관이 있지 않아. 문제는 그가 이쪽에 관심을 둔다는 거지.

‘...그럼 어쩌자는 건데?’

─우선…

스르륵.

하페루아의 손길에 파괴된 로루닌의 숲이 조금씩 돌아온다.

땅에는 이질적인 기운이 많아 쉽사리 복구가 안됐지만 그 힘의 주체라 할 수 있는 둘이 영향력을 포기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파여진 땅이 메워지고 잔디가 자라나며 수없이 많은 나무들 역시 자라난다.

‘복구가 아니라 재건이군.’

제아무리 하페루아라도 시간을 되돌리는 격에 일을 하는데 무리가 있다.

과거 망령 지대와 달리 이곳은 수십만의 서버가 합쳐진 통합 서버니까.

재건을 한지 고작 10분.

숲의 8할 이상이 본 모습을 되찾았다.

“무명. 너에게…”

[제안을 하지.]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모습을 띤 무명은 우리를 올려다보았다.

우리는 의외인 듯 서로를 돌아보았지만 무명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김윤에게 ‘열쇠’의 사용법을 알려주겠다. 그러니 너희가 마왕을 잡고 관리자를 만난다면 너희가 얻는 창조 석을 나에게 주어라.]

“...우리가 왜? 너에겐 빚이 있어. 빚으로 열쇠의 사용법을 알려달다 한다면?”

내가 말했다.

비록 무명의 멸망이 우리에게도 피해가 간다 하지만 무명과 동등한 거래를 할 정도로 꿀리는 상황이 아니다.

그에겐 빚이 있고 싸움에서도 내가 승리했으니까.

게다가 하페루아의 말에 따르면 무명은 한번 내뱉은 말은 어기지 않는다.

‘정확히는 과거, 그가 ‘진실’의 초월자에게서 받은 힘의 영향이지만.’

그는 실소를 흘렸다.

[나중에 갚지. 그 빚은 반드시 나중에 갚겠다.]

“뭐?”

[허무 맹랑하게 수천, 수만 년 뒤라고 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이번에는 양보할 수 없다. 나 역시 지켜야 할 것들이 있으니.]

무명의 몸은 흐릿했지만 눈만큼은 뚜렷할 정도로 진지했다.

나는 그의 눈을 보고 깨달았다.

무명은 정의로운 게 아니다.

그는 수만 년을 멸망을 막기 위해 뛰어다니지만 그것이 반드시 세계를 구한다는 숭고한 목적만은 아니었다.

결국 세계와 정의도 자신의 친구와 동료, 가족만 못한 것이다.

하페루아는 내 눈을 바라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내 판단에 맞기겠다는 소리.

“...좋아. 일이 끝나면 내어줄게. 그 대신 빚은 두개로 받지."

[...?]

“잊은 건가? 너로 인해 고위신들이 대거 죽었다. 그중에는 나의 인연이 있는 자들이 제법 있었다.”

이랑의 어머니인 이린은 간신히 살았다 하더라도 용신이 죽었다.

용신은 청린과 홍린의 아버지.

레빗에게 죽긴 했어도 결국 이용당해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 무명에 의해 희생된 셈이다.

무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 빚은 너에게도 갚고 그쪽에게도 따로 갚겠다.]

“좋아.”

[우선 열쇠를 사용하기 위해선…]

나와 하페루아는 사용법에 대해 들었다.

굉장히 복잡한 방법이었지만 하페루아가 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거다.

무명과 하페루아. 그리고 나는 추가적인 맹약을 맺었다.

맹약의 내용은 일이 끝난다면 얻는 창조석 모두를 무명에게 주는 것.

무명은 반대로 우리의 부탁을 두 번 들어줘야 한다.

단, 무명의 행성의 존폐와 관련된 부탁이나 ‘목숨’자체를 요구하는 부탁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역시 무명의 목적은 세계의 구원만이 아니다.

그 구원에는 자기 자신도 반드시 포함되어 있다.

세계의 구원자에게는 좋은 요소가 아닐지 몰라도 인간적인 모습으로만 본다면 그의 성격은 제법 마음에 들었다.

다 구원하고 본인이 죽는다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

그런 건 구원이 아니다.

[그럼…]

파락.

무명의 황금빛 눈이 서서히 감기더니 이내 육체와 영혼들은 유려하게 춤을 추듯 어디론가 흩어져 갔다.

흩어져 간 자리 위로는 주황빛의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명계로 갔어.”

“명계?”

“그는 실패하면 안 되니까.”

죽은자들의 땅, 명계.

죽은 수많은 영혼들과 용사인 유저, 자연을 잃은 신 등등… 이 머무는 곳이다.

전에 명계의 꽃을 얻고 명계의 문을 두드리기까지 했다.

“돌아가지만 않으면 실패가 아니야. 죽어도 명계에서 시련을 통해 다시 부활할 수 있거든.”

“하지만 돌아오지는 않고?”

“그래.”

어디까지나 무명은 ‘도전자’라는 명목으로 이 게임이 끝날 때까지 명계에 체류해 있을 거다.

“그럼… 끝이 났네.”

“이제 중간이야.”

“...언제쯤 끝이 날려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

이랑은 꿈을 꿨다.

꿈속에서 자신은 누군가를 쫓았다.

상대는 어머니의 숲에서만 자라는 과일을 가지고 도망친 오라버니와 여동생.

그들은 가지각색의 능력과 위장을 하며 그녀의 눈을 피했지만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재빠르게 뛰어 그들을 붙잡고 과일을 뺐었다.

어머니는 웃고 오라버니와 동생은 고개를 숙이며 막내 동생은 힐긋 보더니 작게 웃음 지었다.

평화롭고 행복한 나날들.

그래, 평화롭다.

아주 평화로워 하는데…

‘건방진 미물 따위가 하늘을 넘보는구나.’

거대한 용이 보인다.

용은 어머니를 향해 브레스를 내뿜고 날카롭고 위압적인 앞발 톱을 내지른다.

어머니는 공격을 하지만 자신의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쉽사리 공격하지 못하고 몸을 수그리기만 한다.

어머니의 육체가 점차 피투성이가 된다.

용은 공격을 멈추지 않는다.

‘안돼…’

‘그만 죽어라!’

“안돼애애애애!!!”

허억.

이랑은 벌떡 일어났다.

따스한 빛이 내려와 이랑의 눈을 괴롭힌다.

이랑은 눈을 찡그리자 전경이 한눈에 보인다.

새햐얗고 푹신한 털과 익숙한 건물들과 그 사이를 누비는 사람들.

천공의 섬 위에 있는 김윤의 길드다.

“하아… 하아… 꿈?”

“오늘도 안 일어나면 그냥 갈려고 했는데.”

“넌…”

작은 아이와 더 작은 아이가 자신을 내려다본다.

베린과 세피드.

레빗과 함께 용신과 싸우고 있던 녀석들이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 된 거지?

“일은 잘 끝났어. 김윤이 이 일을 저지른 무명을 잡았거든.”

[작별 인사를 하러 왔어.]

“작별… 인사?”

이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작별이라니.

아직 마왕은 물론 그 계획이라는 것도 시작하지 않았을 텐데 왜 작별이라는 걸까.

베린을 말했다.

“마왕을 잡을 때까지 나와 세피드는 다시 수련에 들어갈 거야. 안쪽에서 얼마만큼의 시간이 될지 모르니까 미리 인사하러 온거지.”

[난 지금도 충분하다 보는데… 뭐, 우리 계약자 께서 원하시니 어쩔 수 없지.]

그들은 떠났다.

정말 인사만 하러 온 건지 별다른 말없이 그냥 떠났다.

이랑은 새햐얀 털 뭉치를 올려다본다.

엄마는 무사하다.

다행이었다.

정말로.

그녀는 건물 밖으로 나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들 분주히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

평소와 같은 평화로운 기운은 어디 가고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이랑은 길드의 회의 장소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김윤과 악마, 다윤이 수많은 자료를 띄우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우선 두 달 정도는… 아, 이랑. 일어났네.”

“여우. 너무 오래 잔 거 아니야? 다친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한 달을 자다니.”

“...난 원래 많이 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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