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59화 〉 23. 만상(??)의 도서관 (1) (259/318)

〈 259화 〉 23. 만상(??)의 도서관 (1)

* * *

***

그거 알아요?

수없이 넓고 많은 차원 속에는 모든 이야기를 담는 도서관이 있데요.

그 도서관은 세계를 유영하며 이야기를 모으고 가끔은 사람들을 초대해 도서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해요.

물론 아무나 들어올 수 없어요.

못된 사람이 도서관에 들어와서 이야기를 훔쳐보고 나쁜 일에 쓰면 안 되겠죠?

도서관은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이야기를 보여주는 대신 그 사람의 이야기를 기억해요.

그러니 못된 짓을 하면 자신의 이야기도 못되게 사용되겠죠?

기억된 이야기는 책으로 남아 도서관을 더욱 풍성하게 해준답니다.

이크! 새로운 이야기가 들어온 모양이에요!

전 얼른 그 책을 읽으러 갈게요.

그럼 이만!

***

사락.

사락.

책 넘김 소리가 내 귓가를 찌르고 반쯤 가려진 눈꺼풀 위로는 느린 속도로 돌아가는 나무로 된 펜 실링이 보인다.

워낙 느리게 돌아가서 그런가 특별한 소리 나 바람이 휘날리지 않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앞에는 원목으로 된 테이블에서 책을 읽고 있는 사서가 보인다.

갈색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지고 있는 그녀의 어깨에는 작은 털 뭉치가 올려져 있었고, 그 아래로는 흰색 블라우스와 검은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판타지스러운 외모가 아니었다면 현대인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의 복장.

사락. 사락.

“......”

내가 일어났음에도 그녀는 눈 한길 주지 않고 계속 책을 읽는다.

나는 그녀를 건드리는 대신 주위를 둘러보았다.

책이 가득 찬 책장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고 책장 사이사이마다 갈색의 빗자루들이 먼지를 쓸며 돌아다닌다.

중간중간 빈 공간에는 다양한 의자들이 놓여있고 주인 없는 책들이 펼쳐져 있었다.

아마 누군가 읽고 있으리라.

“건드시면 안 됩니다.”

타악.

내가 책에 가까이 다가서자 그제야 나에게 시선을 준다.

푸르른 눈은 나의 이야기를 훑는다.

「▼▼사서 」

“그 책은 이미 읽고 계시는 분이 있습니다. 다른 책을 추천드립니다만, 굳이 읽고 싶으시다면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아니, 굳이 읽으려던 건 아닌데.”

“그러시군요.”

그녀가 다시 책에 시선을 둔다.

정말 나한테는 조금의 관심도 없는 모양.

그 모습에 반발심이 들어 관심을 끌어볼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저 여자는 나보다 강하다.

정확히는 이 도서관의 주인이 나보다 강한 거지만.

‘함부로 나섰다가 이야기에 갇혀버리지.’

‘만상(??)’의 도서관.

저 평범한 행성에 살아가는 미물인 작은 개미부터 행성을 유린할 수 있는 초월자까지.

수없이 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책 형식으로 담고 있는 도서관이다.

이곳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르고 밝혀지지도 않았지만 어마어마한 강자인 것은 사실이다.

아마 관리자보다도 강하겠지.

관리자는 자신의 힘을 매게채로 도서관의 출입 허가를 받아냈지만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건 아니다.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허가를 받은 6등위 이상의 초월자,

다른 하나는 그런 규칙 따위 무시하는 이레귤러다.

그리고 나와 하페루아는 두 번째 방법을 통해 들어왔다.

과거 하페루아가 차원 유랑자가 되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 도서관의 정보와 힘을 얻어냈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곳에 떨어지진 않았지만 하페루아도 이야기를 뒤지고 있을 거다.

‘그녀의 목표는 관리자의 숨은 이야기. 즉, 관리자의 책이다.’

이곳에 들어온 순간부터 자신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책으로 남으니까.

즉, 나의 이야기도 이곳 어딘가에 있다는 소리다.

‘하페루아는 빠른 시간 내에 읽을 수 있는 이야기를 찾아 힘을 얻으라고 했지.’

터벅. 터벅.

수백, 수천만의 책들이 내 눈에 들어온다.

딱정벌레의 이야기.

인간 기사 콥스의 이야기.

회귀를 거듭하는 등반자의 이야기.

차원을 넘나드는 초월자의 이야기…

수많은 책들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그중 한두 개를 꺼내 대충 훑어보면 현실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소설에 가까운 이야기가 더 많다.

‘이상할 것도 없지. 나도 시작은 게임 세계였으니.’

관리자의 게임은 수없이 많고, 다들 누군가의 ‘판’ 안에 살아간다.

현실의 이야기는 극히 드문 것이 당연하다.

“아니지. 그게 현실이라는 증거는?”

월드 어드벤처를 게임처럼 즐기고 잠에서 일어나면 현실로 돌아왔지만, 결국 우리는 그곳으로 빨려 들어왔다.

지구 역시 관리자에 손에 들어와 있는 상태였고.

책을 덮는다.

애초부터 현실과 이곳을 구분하는 것도 웃기는 이야기다.

이제 와서 그런 걸 나누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고.

나는 책장의 중간중간 붙여져 있는 구분된 목록을 확인했다.

─A12963 회귀 / 초월자.

앞선 영어와 숫자는 책장의 순서, 회귀와 초월자는 분류 카테고리 일 것이다.

나는 좀 더 책장을 넘었다.

─A14817 아포칼립스 / 일반, 초월자.

─A18515 문명 / 일반, 초월자.

─A22241 용사 / 일반, 초월자.

멈칫.

나는 하나의 책 앞에 멈춰 섰다.

[A22241 ­ 118871 / 하페루아.

분류 / 용사 ­ 일반, 초월자.

미완결.]

하페루아.

그녀의 책이다.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책의 가장 끝부분을 열었다.

『하페루아는 관리자의 오래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녀가 파악하지 못한 진의를 찾아내고 오래된 숙원을 이룰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그녀는 모든걸 할 준비가 되어 있…』

책의 글자들은 계속해서 써 내려간다.

이렇게만 본다면 책의 크기가 한없이 길어져야 할 것 같지만 사실 책의 굵기는 얼마 되지 않았다.

한 손에 여유롭게 집을 수 있는 정도의 굵기.

보려고 하지 않는 내용은 종이 안에 담겨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책을 앞으로 넘겼다.

저 이야기는 하페루아가 잘 해낼 것이다.

하페루아에게는 힘을 얻어낼 것을 약속했지만 도서관의 실체와 내용을 듣고 다른 것을 계획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알고 싶다.’

하페루아는 나의 생각을 읽고 과거를 알지만 나는 그녀의 과거를 알지 못한다.

물론 그녀는 나에게 이미 과거의 이야기를 말해주었고 추가적인 내용도 그 이후로도 자주 얘기해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분명히 말하지 않은 과거가 있었다.

그걸 위해 일부로 생각을 뒤바꿔 나의 진의를 감추었다.

그녀에겐 미안하지만 이런 식으로 라도 기억을 봐야겠다.

더불어 이곳에 들어온 뒤로 하페루아의 연결이 끊겼으니 나를 막을 방법은 없다.

도서관은 통신과 연결을 모두 차단한다.

이곳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는 건 오직 자신뿐이다.

“그럼…”

나는 원하는 부분을 펼치고 두 눈을 감았다.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다.]

***

『EPISODE 17, 귀환.』

『하페루아는 차원의 추방으로 인해 수백, 수천 번의 소멸할 위기에 처했으나 자신의 오래된 능력과 특이함을 이용해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그녀는 마침내 높은 등위의 초월자가 되었으나 여전히 행성에 미련이 많았습니다. 그런 그녀의 생각을 알아준 것일까요? 그녀는 어째서인지 다시 본래의 차원으로 넘어올 수 있게 되었답니다.』

[당신은 A22241 ­ 118871 / 하페루아의 이야기를 보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소모 시간은 두 시간 정도입니다.]

[이야기를 그만두고 싶을 때는 언제든 저를 찾아주세요!]

어두운 공간 속, 작은 불빛에 의존하고 있는 흰색의 털 뭉치 사이로 작은 두 개의 검은콩이 깜빡였다.

털뭉치는 나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이윽고 토옹­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

치직. 어두운 시야가 한 번 더 점멸하고 다른 공간이 눈에 보인다.

어두운 마왕성. 아니, 마왕탑 하펠론.

그 위에는 허공에 그려진 포탈 위에서 떨어지는 무언가가 보인다.

자칭이지만 자칭이 아니라고 해도 믿을 법한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그녀.

하페루아다.

“으읏!”

쿠당당! 그녀는 포탈에서 뱉어지듯 하펠론의 꼭대기 층에 떨어졌다.

그녀는 습관적으로 자신의 힘을 두르며 경계 상태에 들어갔다.

수십 개의 무형의 구가 하페루아의 위로 떠오르고 그녀의 검 보랏빛 머리카락은 한 올 한 올이 은하수처럼 빛난다.

그녀의 손에는 검은색과 은색이 인상적인 레이피어가 들리고 그녀의 붉은 눈과 뿔은 거대한 마기를 내뿜었다.

마왕탑 하펠론은 갑작스런 거대한 마기에 벌벌 떨듯이 진동한다.

그런 그녀의 앞에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남자가 보인다.

“하페루아.”

“...아버지?”

자신과 같은 검보라색 머리카락과 붉은 눈.

붉은색의 뿔은 하늘로 높이 솟아 있었고 검 보라색의 큼직한 왕좌 옆에는 비슷한 높이의 거대한 대검이 걸쳐있었다.

와락.

하페루아는 셀 수도 없이 긴 시간 만에 보는 아빠를 안았다.

다시 돌아오기 까지 너무나 오랜 시간이었다.

정말로 보고 싶었는데…

“......”

그러나 이내 인상을 찌푸리고 몸을 떼어낼 수밖에 없었다.

“...가짜구나.”

그토록 만나고자 했다는 아빠가 진짜가 아니기에.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