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1화 〉 23. 만상(??)의 도서관 (2)
* * *
***
“하페루아. 나는.”
“알아요.”
스윽.
하페루아는 힘을 거두었다. 무형의 구들이 힘을 잃고 바스러지고 하펠론을 진동시키던 마기 역시 준동을 멈추었다.
“여기 있는 아버지도 진짜라는걸. 다만 그걸 말하는 게 아닌 걸 잘 아시잖아요.”
“......”
여기 있는 어드벤처 행성의 마왕 제르노스도 진짜.
어디 갔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 것으로 추측되는 제르노스도 진짜다.
제르노스의 기억과 습관, 능력을 모두 가진 진짜 같은 가짜.
가짜가 한없이 진짜와 같다면 그걸 가짜로 불러야 하는가.
하페루아는 이미 많은 부류의 인간들과 그 외의 존재를 보았기에 이런 제르노스가 한없이 익숙했다.
“그 여자는 어딨죠.”
“곧 올 거다. 하페루아. 그동안 무사했구나. 정말 다행이다.”
“무사… 네. 무사하긴 했죠.”
무사만 한 게 문제지만.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처음 이곳에 돌아올 때만 해도 감격에 차 기쁨을 느꼈지만 아버지인 제르노스를 보고 깨달았다.
‘아직도 이곳은 그 여자의 손아귀에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자신을 부른 이유는 이레귤러의 위험성을 두려워하는 그녀가 자신을 통제할 방법을 찾은 것이리라.
그녀는 하펠론을 나섰다.
마기와 신성이 보은하던 행성은 이제 시스템이라는 거대한 힘이 장악하고 있다.
걸어가는 모든 곳마다 시스템의 힘이 서려있다.
고향 행성은 그동안 자신이 겪어오던 곳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서 와. 하페루아.]
펄럭. 거친 선이 몰아치고 자신의 앞에 새까만 형체 하나가 내려앉았다.
검은색 크레파스로 잔뜩 난리 친듯한 형체.
언뜻 보기에는 어린아이 같기도 했다.
처음 마주했던 관리자와 묘하게 다르긴 하지만 느껴지는 힘은 눈앞의 아이가 관리자라는 사실을 확실시하게 해주었다.
“...무슨 짓이야?”
[무슨 짓이긴? 고향에 오고 싶어 하지 않았어?]
“날 쫒아 내놓고?”
셀 수도 없이 긴 시간을 차원 유랑자로서 살아가게 해놓고 이제 와서 말인가?
하페루아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공격은 할 수 없다.
[......헤헤.]
강하다.
「▲─ 」
무언가 있다.
지금의 자신은 결코 범접할 수 없는 무언가가.
그녀는 숨을 삼키며 뒤로 물러섰다.
특이점을 쓴다면 어찌어찌 유효타를 먹일 수 있을 것 같지만 ‘고작’ 유효타다.
그 뒤에는 금방 제압당할 것이 뻔하며 고작 한대 때리자고 그간의 고생을 한 게 아니다.
[그럼 우선… 너에게 역할을 줄게. 이번에 게임이 정식으로 승격돼서 새로운 시즌을…]
하페루아는 멋대로 떠들어대는 관리자를 보며 생각했다.
‘반드시 나락 끝까지 떨궈버리겠다고.’
***
에피소드 17, 귀환이 끝이 났다.
2시간 정도라고 했지만 워낙 집중해서 보다 보니 20분보다 짧은 것 같았다.
어쩌면 바깥의 시간이 2시간 흐른다는 이야기 일 수도 있다.
이야기는 다음 에피소드로 넘어간다.
에피소드 18은 익숙한 이야기였다.
최강자 김윤은 용사라는 신분으로 소환된 후 멋대로 징용되는 것을 꺼려 하며 용사 신분을 거절하고 도시에 틀어박힌다.
하지만 자신을 챙겨주던 사람들이 모두 죽은 뒤 생각을 고치며 새로운 사람들을 이끌고 나아간다.
과거 미르틱 로니움을 통해 보았던 내용.
그때는 내가 개입하는 바람에 마왕이 죽고 최강자가 나에게 검술 강기 책을 넘겨주지만 현실은 정상적으로 진행되었다.
하페루아는 마왕의 딸로서 용사의 전진을 저지한다.
그녀는 서큐버스나 마물을 보내 용사들을 막고 직접 인간사의 개입 했다.
마왕 역시 성에만 있지 않고 가끔식 나서서 마을이나 도시를 쓸어버린다.
대표적인 것이 천상의 도시인 오르바틴이 멸망한 일이다.
마왕이 직접 오르바틴의 천사들을 모조리 참살한 것.
물론 이건 여신과 다 협의된 상황이었다.
여신은 피눈물을 흘렸지만 이미 행성 전체가 관리자의 손아귀에 떨어진 상태였고 그녀로서 저지할 방법이 없었다.
마왕 역시 관리자가 원했기에 한 것.
이때까지만 해도 관리자의 개입이 당연했고 지금과 비교해도 굉장히 어려운 수준의 난이도였다.
수많은 용사가 죽어나갔다.
최강자는 그들이 죽을 때마다 그들을 애도하며 가슴속에 묻어 두었다.
죽음을 외면했던 최강자는 죽음을 짊어지고 나아간다.
그러길 십여 년쯤, 마침내 진정한 마왕을 만나고 그를 베어내며 초월자의 자격을 얻어낸다.
“...?”
나는 여기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 이 책은 하페루아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최강자의 이야기만을 보여주고 있었다.
의문이 들었지만 최강자의 정보도 나에겐 유용해 딱히 멈추진 않았다.
이야기는 계속된다.
최강자는 스스로 문을 열었다.
관리자의 도움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월드 어드벤처는 유저를 위한 게임이 아닌 관리자만을 위한 게임.
처음부터 평범한 인간이었던 최강자는 수준 이하의 힘만 받아 돌아가거나 아니면 영원히 이곳에 귀속되는 식으로 남았어야 했다.
실제로 관리자는 그럴려던 생각이었던 것 같았으나, 어째서인지 마왕을 잡자마자 최강자는 스스로 차원의 틈을 열고 다른 세상으로 넘어갔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어드벤처는 분리된 차원이 아닌 온전한 차원.
그것도 초월자가 얼마안 된 이가 본연의 힘으로 차원의 구멍을 낸 것이다.
‘삼격… 이겠지.’
나 역시 몇 번 써보았기에 그 힘을 잘 안다.
타악.
하페루아는 최강자가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이건 과거다.
하페루아가 관리자로 인해 다시 차원에 오게 된 것은 시즌 2가 시작되기 직전.
시즌 1은커녕 소위 말해 ‘베타테스트’라고도 할 수 있는 최강자의 이야기는 시간상으로만 따져도 천년이 넘는 과거였다.
하지만 하페루아는 말했다.
‘자신은 언제나 하나다.’
특이점의 ‘고유’한 특성을 깨우친 이레귤러는 아무리 자신을 분리한다 한들, 완전히 나누어지지 않으며 원한다면 언제든지 개입이 가능했다.
그것은 공간과 시간, 차원을 넘어서는 법칙이다.
그제서야 나는 왜 최강자의 이야기가 지금까지 나왔는지 알 수 있었다.
“...이런 일이 있었구나.”
‘하페루아’는 과거의 일을 수습했다.
그녀는 자신이 뿌려둔 씨앗을 통해 많은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다.
첫 번째는 희망이 조금도 보이지 않던 상황에 동앗줄 하나를 찾았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관리자가 현재 부재중이라는 것이다.
그 증거는 ‘이전’의 하페루아의 정보들과 ‘지금’의 하페루아의 정보가 달랐다.
왜 자리를 비웠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자신을 농락시키기 위함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상관없다고 보았다.
“함정이든 아니든.”
그건 중요치 않다.
눈앞의 과일 아래에 평지가 있든 절벽이 있든 굶어죽을 것이 뻔하다면 선택하는 편이 옳다.
『그녀는 과거에 개입했어요.』
내 눈앞에 흘러 지나 간 한 문장이 내 심장을 찌르듯이 지나간다.
알고는 있었다만… 직접 보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과거’ 속 하페루아는 ‘미래’가 되어 최강자의 힘을 기록한 책을 꺼내든다.
최강자와 수십, 수백 번 직간접적인 전투를 통해 알아낸 책.
그녀는 생각했다.
‘나이트의 창은 구했다.’
이제 창을 쓸 나이트만 구하면 된다.
하페루아는 반파된 마왕성을 무심히 내려다보았다.
마왕은 죽었다.
그리고 다시 부활한다.
이미 수십 번 겪은 사실.
그때부터 하페루아는 제 모습을 감추었다.
자신의 흔적과 알려진 정보, 그녀의 영향 안에 들어가 있는 교묘하게 바꾸거나 삭제했다.
과거의 관리자가 알지 못하도록 그녀는 충실히 관리자가 부여한 역할에 다했다.
만일 지금도 관리자가 있다면 이런 짓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과거를 뒤바꾸는 일은 필연적으로 미래에 영향을 주고 그 변화를 일으킨 사람보다 더 '높은 차원'에 있다면 어긋남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으니까.
만일 누군가 어긋남을 눈치챈다면 과거를 뒤바꾸는 행위는 그 즉시 실패로 돌아가 치명적인 페널티를 입을 것이다.
그것이 거대한 차원 세계의 시간이 유지되는 이유였다.
하지만 하페루아가 바꾸자 했던 것은 어드벤처 행성과 그 주위뿐.
관리자가 없는 지금, 그녀의 어긋남을 눈치챌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완벽했다.’
이후 그녀를 아는 사람은 극 소수에 불과했고 용사들은 그녀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한 가지 변수가 있다면 무명이었으나 시간을 뒤 바꿀 때 그는 행성 차원에 존재하지 않았고, 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안정화가 되어있는 상태였다.
더불어 무명과 관련된 내용은 거의 그대로 두었으니 그가 의심할 일을 원천봉쇄한 것이다.
하페루아는 완벽을 추구했다.그리고 실제로 완벽했다.
이제 그녀의 이야기는 나를 통해 시작되고 있다.
[EPISODE 22, 역사 개변을 모두 읽었습니다.]
[다음 에피소드를 읽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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