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3화 〉 24. 그녀의 친구, 그녀의 기사 (1)
* * *
***
언제부터 가지고 있었는지는 모른다.
태어날 때부터.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이전 일지도 모른다.
하나의 육체 이전에 영혼이라는 것이 최초로 생겨날 때부터 각인되어 있는 무언가.
모든 차원을 아우르는 동시에 거스를 수 있는 힘.
우리는 그것을 특이점이라 불렀다.
***
“실패했네.”
이야기 속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소식을 듣고는 사냥을 이어나간다.
아직까지는 나의 기억 속에 있는 내용들.
하지만 무언가 다른 점도 있다.
‘...다르다 느낀 적이 없다.’
그때의 나는 마왕 토벌이 실패할 거라는 점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근본이 다르느니 차원이 다르다느니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즉, ‘내’가 느낀 생각은 지금의 내가 기억하는 것과 다르다.
‘이것이 하페루아가 바꾼 과거인가. 그런데 왜 그렇지 못하도록 바꾼 거지?’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묘한 가시감이 있었다.
시작은 테라딘.
리비엔에게서 처음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묘하게 익숙했다.
그다음은 로루닌.
그녀를 처음 만나 죽을 위기에 처했지만 정말 죽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굉장히 반가워하는 눈치기도 했다.
최강자의 기억 속에서는 이야기를 나누며 더없이 친숙하게 느껴졌고.
‘대체 뭐야?’
도대체 뭘 하려는 건가.
또 이걸 왜 그동안 언급하지 않은 건가.
“누구야!”
파앙!
‘나’는 최상위 악마 출몰 지대에서 사냥 중 갑작스레 나온 악마를 향해 화살을 쏘았다.
레벨은 밀릴지언정 공격력 자체는 상위 천명 안에 들어갈 정도로 강했다.
타악.
“안녕.”
“...!”
나의 눈이 커진다.
눈앞의 나타난 악마 여자, 하페루아가 빛의 화살을 맨손으로 잡았기 때문이다.
검보라색의 찰랑거리는 긴 머리카락은 은하수처럼 반짝였고 붉은 두 눈은 빛이 났다.
붉은빛을 내뿜는 작은 뿔은 양쪽으로 솟아있었다.
얼굴은 어떠한 종족, 성별,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그 누가 보더라도 홀릴 정도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침착했다.
과거에 그녀만 보면 헤벌레 흘렸던 나와는 사뭇다른 태도다.
그래, 마치 최근까지의 나처럼.
“악마? 아니면 커스터마이징?”
“널 오랫동안 찾아왔어. 나의 기사.”
“...? 뭔 NPC야? 새로 나온 건가?”
나는 경계한다.
당장이라도 대지 포화를 쓸 수 있는 무기를 비롯해 현재 입고 있는 그라티아의 갑주를 한 번 더 체크한다.
물론 눈앞의 저 악마는 분명 마기를 가지고 있을 것이기에 유효한 방어는 되지 않겠지만 없는 것보단 낫다.
그녀가 다가온다.
나는 곧장 대지 포화를 사용한 뒤 레인저의 스킬인 벡스텝을 이용해 뒤로 물러난다.
파박!
그런 뒤 나가는 두발의 유도 화살.
최종 스펙까지 오른 벡스텝은 두발의 유도 화살이 나가는 효과가 있다.
티티팅~
“허…”
그리고 당연하게도 튕겨나가는 화살들.
하지만 피해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내가 얼마나 너를 찾았는지 알고 있니?”
“...?”
그녀의 손이 조금씩 변칙적인 힘에 타들어가고 있다.
성지.
지금의 나는 배우지도, 깨우치지도 못한 초월자 그라티아의 힘이다.
“수백, 수천 번을 과거로 돌아가 너를 찾았어. 최강자 이름과 그의 걸맞은 재목을.”
“...”
“그저 이름만 같고 힘만 잘 쓸 수 있으면 안 돼. 불의에 저항할 수 있는 인성이 있어야 해. 그렇다고 너무 정의롭기만 해서도 안되고.”
“...뭔 소리를.”
“자기를 위하면서도 동시에 힘을 올바르게 쓸 수 있는 인간. 그와 같으면서도 그처럼 무너지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인간.”
하페루아는 미소 지었다.
“김윤. 나의 기사.”
드디어 자신의 동반자를 찾아냈다고.
‘보고 싶었어.’
***
나이트가 쓸 최고의 창을 구했다.
그 어떠한 것도 꿰뚫을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로운 최강이자 최고의 무기.
하지만 최강의 무기인 만큼 최고의 주인을 요구했다.
처음에는 하페루아 본인이 사용하려고 했다.
‘최강의 힘.’
흔히 말하는 ‘천명’이 같으면 그 힘을 쓸 수 있다는 차원의 법칙.
시작된 이름이 같다면 그 최강자의 힘이라도 사용할 수 있지만 하페루아는 이레귤러다.
모든 법칙을 뒤트는 변칙자.
때문에 그녀는 직접 법칙을 뒤틀어 최강의 힘을 사용했다.
그리고 실패했다.
최강의 힘은 제아무리 이레귤러라고 해도 함부로 사용하려 들 수 없었고, 하페루아는 그 대가로 많은 시간을 회복에 전념해야 했다.
다행히 과거에 개입할 수 있는 그녀에게 시간은 넘쳐나는 것이었다.
‘역시 이름이 같아야 해.’
그다음에 한 일은 ‘김윤’과 같은 이름을 가진 이들에게 힘을 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평범한 인간이었지만 최강의 힘의 일부를 받고도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초월자가 되지 않는 한 그들은 강해지지 않았고 마왕인 제르노스조차 이기지 못했다.
그녀는 고민 끝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한 명의 ‘김윤’을 초월자로 만들었다.
그리고 행성이 멸망했다.
‘.....’
최강이라는 거대한 힘에 취한 그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멋대로 다루었고, 결국 제 손으로 행성을 멸망시켜버렸다.
그녀는 한 번 더 실패했다.
다행인 점은 과거의 관리자가 아무리 영향을 받더라도 현재의 관리자가 모른다면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현재’의 행성 차원에는 등위가 한참 낮은 관리자의 분신만이 존재하니까.
그 과거를 없던 것으로 돌린다면 관리자는 눈치채지 못한다.
좋은 정보를 얻은 그녀는 그 이후로도 여러 가지 실험을 반복했다.
한 명의 김윤이 안된다면 여러 명의 김윤을.
여러 명이 안 된다면 최강자와 비슷한 힘을 가진 이들을.
대표적인 힘이 바로 월광 검사였다.
최강자를 동경한 다른 차원의 검사.
그의 힘은 최강자를 모방했기에 꽤나 유사했고, 힘의 수준 역시 제법 높았다.
하지만 그 힘은 최강자의 것만큼 날카롭지 않았다.
관리자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최고의 힘을 이용해야 했다.
“스페어로 남기자.”
그녀는 월광 검사를 이용한다는 생각을 접었다.
이름을 직접 지을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천명은 하늘이, 차원이 정하는 운명.
누군가 개입한다면 필시 최강자의 힘을 공유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많은 실패를 겪었다.
시즌 2로 넘어간다면 더 이상 과거를 돌릴 수 없다.
그때가 된다면 이미 차원 곳곳에 구멍이 난 상태고 관리자 역시 개입할 수 있을 거다.
즉, 시즌 1. 시즌 1 전까지가 하페루아에게는 마지막 기회였다.
얼마나 돌아가고 만들고 힘을 주고를 반복했을까.
그녀는 ‘나’를 보았다.
평범한 인간.
평범히 활을 쏘며 게임을 즐기는 평범한 인간.
“...찾았어. 아니, 저거…”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특이점이잖아.”
심지어 이름이 김윤이다.
왜 지금에서야 찾았을까.
왜 수백, 수천 번을 돌아가면서 눈치채지 못했을까.
다른 이들이라면 몰라도 특이점을 가진 자신이 모를 리가 없었는데.
그녀는 같은 이레귤러로서 묘한 가시감을 느꼈다.
어쩌면 ‘지금’ 이 남자가 나타나는 게 운명일지도 모른다.
단순히 개별 차원의 시간이 아닌 전 차원의 시간을 통 들어 지금에서야.
하페루아는 ‘나’를 지켜보았다.
특이점을 가진 그였지만 오히려 특이점을 가졌기에 더욱 위험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창을 온전히 다룰 수 있는 자이지만 그만큼 다루기도 어렵다.
이미 그런 사례들을 충분히 겪어오지 않았는가.
꽤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그는 에픽 특성과 활을 가지고 잘 활동하다 무명이 마왕을 잡은 뒤 평범히 살아간다.
시즌이 종료되고 아무런 활동 없이 지구에서의 삶을 이어간다.
하페루아는 그의 시작 지점으로 돌아간다.
다시 한번 더 그의 이야기를 본다.
그에게 조금의 힘을 건네주기도 하고 몸과 얼굴을 가린 뒤 나타나 앞으로의 일을 언급하기도 한다.
그때마다 나는 그녀의 마음에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그러길 수십 번,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는 처음으로 직접 모습을 드러내기로 한다.
이번에는 게임의 이야기 아닌 조금은 다른 과거로.
***
[EPISODE, 42 그녀의 친구를 읽으시겠습니까?]
나는 선택을 망설였다.
그녀와의 기억이 조금씩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하페루아와 나는 제법 오랜 시간을 보낸 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조금은 두려웠다.
‘...이거 끝나면 하페루아 어떻게 보냐.’
머리를 긁적인다.
그리고 허무의 공간 속, 닿을 리 없는 벽면에 몸을 기댄다.
생각한다.
왜 그녀는 과거를 숨겼을까.
처음부터 알았다면 조금은 편했을 텐데.
어쩌면 이 도서관을 계기로 내가 과거를 읽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을지도 모른다.
“...읽지.”
내 시야가 점멸한다.
[독자와의 인물 동조를 확인.][해당 이야기를 김윤 시점으로 변경…]
뭐?
***
“김윤! 김윤! 일어나!”
내 손이 꼼지락 거린다.
두 눈이 깜빡이고 어린 육체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연스레 허름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내 앞에는 열다섯쯤 되었을까 생각이 드는 어린 하페루아가 있다.
갈색의 천 조각을 덧댄 평민의 옷.
얼굴 역시 꿰좨좨했으나 본판이 워낙 뛰어나서 그런가 그녀의 미모를 가리지는 못했다.
“오늘은 도시에서 기사님이 오시는 날이잖아! 얼른 구경 가자.”
“오늘이었나? 좋아.”
그녀와 나.
하페루아와 김윤은 작은 마을의 소꿉친구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