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6화 〉 24. 그녀의 친구, 그녀의 기사 (4)
* * *
***
“윤, 윤아.”
“비켜주세요. 마을로 돌아가 봐야 합니다.”
나는 벌벌 떨리는 손을 감추며 허리춤에 있던 검에 손을 대었다.
고블린의 코를 판 값을 모아 구매한 쓸만한 검.
스릉.
물론 저 기사들이 가지고 있는 휘황찬란한 검에 비하면 쓰레기나 마찬가지다.
“별빛의 사도님은 어찌 도망가려고 하시나요. 당신에게는 찬란한 미래가 펼쳐져 있을 텐데.”
그러나 성녀는 나 따위에 관심을 두지 않는지 감정이 없는 듯한 눈빛으로 하페루아를 흘겨보았다.
내 뒤에서 이를 악무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내가 정해요. 그러니 비켜주세요, 성녀님.”
“......”
“다치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다쳐요?”
성녀는 보기 드물게 눈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사실 하페루아가 말한 건 성녀로서는 제법 웃긴 이야기긴 하다.
하페루아는 4~5년 전에 능력을 받았지만 아무런 지식도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익힌 것에 반해,성녀는 무려 13년 동안 신전의 수많은 지식을 이용해 전문적인 수련을 받았으니까.
제아무리 마법의 종주라 한들 그 차이는 하늘과 땅, 그 이상이었다.
“재밌군요. 사람 하나하나의 반응은 예언으로 알려주지 않으니…”
저벅.
“재밌어요.”
얇고 새햐얀 섬광이 나를 향해 쏘아진다.
공격이라기보다는 귀찮은 걸 치워두겠다는 의도로 보였다.
나는 생채기가 가득한 은빛의 검을 세워 섬광을 막아냈다.
그 여파로 무려 일곱 걸음이나 물러나고 두 팔이 벌벌 떨렸지만 오히려 놀란 쪽은 저쪽이었다.
주위에 서있던 기사들의 눈이 부릅떠지고 성녀 역시 전보다 눈꼬리가 더욱 올라갔다.
“흐음… 평범한 꼬마라고 했는데…”
“....성녀가 사람을 막 죽이려 해도 되는 겁니까?!”
“안되죠. 죽이려 하지 않았어요. 뭐, 가벼운 손장난이었으니.”
푸훗.
“손장난에 개미가 죽긴 하지만요.”
“...역시. 당신들은 못 믿어.”
믿을 수 없다.
저 정신상태가 이상한 성녀와 아무리 사도라고 해도 애들 둘을 잡기 위해 기사 열 이상이 주위를 포위한다.
보통이라면 하나, 둘 정도 보내고 말로 설득하는 게 맞지 않는가?
강제로 끌고 가려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위험해. 역시 하페루아는 신전에 가선 안돼.’
“하페루아.”
“응?”
“꽉 잡아.”
“뭐, 무어으으으아아아!!!”
하페루아의 두 팔이 내 목을 감싼 것을 확인한 뒤 빠른 속도로 달린다.
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지금의 나는 평소보다 두 배. 아니, 세 배는 더 빨랐다.
“...잡으세요.”
우리가 도망치는 쪽에 있던 기사 셋이 나를 잡으러 온다.
“하페루아!”
“알았어!”
별빛의 물결이 흘러가 기사의 눈을 가린다.
살짝 당황하지만 이런 식의 상황이 익숙한지 금세 적응해 우리 쪽을 정확히 쫓아온다.
“하앗!”
퍼엉! 기사의 발밑에서 대지가 폭발한다.
별빛의 마법으로 기사의 밑바닥 흙을 터트린 것.
때문에 기사 셋이 멀리멀리 날아 다시 땅에 처박혔지만 기사는 현대의 탱크라고도 불리는 초인들.
고작 낙사로 죽을 인간들이 아니다.
“...죽진 않았겠지.”
“당연하지. 죽어도 싸.”
먼저 죽이려 하지 않았는가.
아무튼 정당방위다.
나는 뒤따라오는 기사를 슬쩍 노려본다.
별빛의 힘에 눈이며 팔과 다리에 모두 제약을 받고 있지만 역시 기사는 기사라는 듯이 그런 것들을 거의 무시한 체 나를 따라잡기 직전이었다.
“꼬마야. 지금 네 등 뒤에 업은 분은 위대한 사도님이시다. 너 따위가 함부로 할─”
“어쩌라고.”
“...뭐?”
‘나’는 이를 악물었다.
“어쩌라고! 니들이 그렇게 잘났어? 신의 힘을 등에 업었다고 니들이 신이 된게 아니란 말이야!”
이대로 가단 잡힌다.
이 말도 안 되는 속도도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아마 하페의 힘이겠지.
하페의 신이했든 하페가 했든 어쨌든 지금 이 힘을 최대한 이용해 벗어나야 해.
좀 더…
좀 더 빨리!
“포기해라! 너흰 어차피 벗어날 수 없어!”
제발…!
티각.
「...
“뭣…”
파아아앙!!!
기사의 시야의 절반을 메우던 나는 하나의 점으로 변해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스르륵…
」...
“...제기랄. 성녀님한테 깨지겠군.”
***
“하아… 하아…”
“윤아…”
“하페에…”
지켰다.
지켜내었다.
시야가 흐려지고 숨이 미친 듯이 올라온다.
온 팔과 다리가 바들바들 떨린다. 세상이 돌고 있다.
돌고 있네. 진짜.
“윤아… 죽는 거 아니지…?”
하페는… 울고 있네.
투명한 눈방울이 내 가슴팍을 잔뜩 두들긴다.
어지럽다.
진짜 어지러워.
“안 죽어…”
분명 지켜보고 있는 나까지도 머리가 팽팽 도는 거 같은 느낌이다.
점점 이 이야기를 지켜볼수록 나도 동조되고 있다.
정확히는 본래의 것을 찾아가는 게 맞다고 봐야겠…
“유, 윤아? 김윤! 김윤!! 일어나! 제발…”
***
아침인가.
햇살이 내 눈을 마구 찌르고 몸 역시 온몸을 찌르는 것 같다.
내 가슴팍이 묘하게 무거운데…
“...”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검 보라색의 머리와 가느다란 두 팔이었다.
가슴팍은 알 수 없는 물기로 축축했다.
“하페…?”
“...!”
“계속 그러고 있던 거야?”
벌떡 일어난 하페의 두 눈은 퉁퉁 부어있다.
웃긴 건 그렇게 부해졌는데도 외모가 줄어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말 사기적인 외모다.
“웃겨. 하페.”
“...너. 진짜!”
하페의 두 팔이 나를 와락 안는다.
나는 그런 그녀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그 이후로 한참 동안 하페를 달래주어야 했다.
또 울려고 하길래 더 이상 울면 탈수라도 올까 봐 웃긴 얘기를 해서 울음을 막았다.
때문에 등작 몇 대를 맞았지만 이 정도면 나름 괜찮은 교환이다.
끼익…
“...아직 안 왔네.”
“응.”
언제 들어왔는지 기억도 안 나는 집의 문을 열고 나가니 평화로운 마을의 풍경이 비쳤다.
우리의 정체를 모르지 않을 텐데.
아무런 일도 없으니 마치 어제의 일이 꿈만 같다.
“꿈은… 아니겠지.”
“그렇겠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우리의 소재지까지 알고 있다.
아무리 놓쳐도 왜 밤낮이 바뀔 동안 찾아오지 않았는가.
“독안에 든 쥐라 이거지.”
어차피 도망칠 수 없다.
이미 위치와 가족 관계, 행동 패턴 같은 것도 전부 알고 있을게 뻔하고 설령 도망친다 한들 금방 잡힐게 분명했다.
어제와 같은 일도 한두번이지, 매번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부모님을 버릴 수 없어.”
“...나도.”
게다가 우리가 어찌어찌 도망친다 한들 가족은 어떻게 되겠는가.
분명 좋게 끝나지 않겠지.
“......”
화가 난다.
왜 우리가 도망쳐야 하는가.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하페는 그저 신이 멋대로 뿌린 힘을 타고났을 뿐이다.
그것이 남들에게 이용되어야 하는 그 어떠한 의무도 없다.
적어도 해야 한다면 하페 스스로의 의지로 행해야 한다.
“누군가가 강제로 하는 게 아니라.”
“맞다. 성녀는 강제할 수 있는 게 아니지.”
휙! 나와 하페의 고개가 빠른 속도로 돌아간다.
마을이 워낙 작고 태어날때부터 살아왔기에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는 전부 익히고 있다.
뒤에서 들린 목소리는 처음 듣는 이방인의 목소리였다.
노란기가 있는 머리칼을 가진 다부진 체격의 기사.
은빛의 갑주를 입고 한 손에는 투구를 들고 있었다.
나보다도 머리가 한 개 이상, 하페와는 거의 두 개 수준 차이가 났다.
“기사…!”
나는 반사적으로 하페를 뒤로 숨겼다.
하페는 불안한 듯 내 소매를 잡았다.
“사이좋은 아이들이구나.”
“안 가요.”
“왜 안 가려 하니.”
“안 갈 거니까요.”
“그러니까 왜.”
“...안 간다면 안 간다는 줄 아세요!”
하페와 기사의 신경전이 계속 된다.
한참을 실랑이 벌이던 기사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들고 있던 투구와 창, 단검 등을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철컹.
“?”
갑주까지 벗고.
옷은 검회색의 평범한 옷이었다.
갑옷을 벗으니 가뜩이나 다부졌던 체격이 더욱더 커 보였다.
스윽. 내 등 뒤로 튀어나온 얼굴이 좀 더 사라졌다.
기사는 한쪽 무릎을 꿇어 시선을 낮추자 그제야 제 얼굴을 드러냈다.
“진정하렴. 난 ‘대화’하려고 온 거다. 너희들을 해치려 온 게 아니라.”
“대화?”
나의 눈썹이 올라간다.
“사람을 죽이려 해놓고 대화요?”
“...그 부분은 안타깝게 생각한다. 에린 성녀님은 오래전 많은 예언을 통해 지식을 얻고 난 뒤 생명과 비생명의 경계선이 희미해졌거든.”
기사는 정말 안타깝다는 듯 표정을 지었다.
“물론 신전의 사제들은 그편이 더 좋다고 생각하지만 인간적인 면이 더 있으면 좋겠다는 나의 바람도 있지.”
“......”
“성녀님은 사도를 당장 잡아오라고 말했지만 이대로 가봐야 좋은 꼴을 못 보겠지.”
스윽.
커다란 손이 하페에게 향해진다.
“약속하마. 무엇 때문에 안 간다 하는지 모르겠다만 너를 해칠 일은 없을거다. 너의 주변 가족과 친구들도 다칠 일이 없다고 맹세하마.”
기사는 성호를 그으며 기사의 맹세를 취했다.
맹세는 기사의 명예가 걸려있기에 어지간하면 어기지 않는다.
어지간하다면 말이다.
“더불어 너를 억압하거나 핍박하는 일도 없을 거다. 네가 하는 일은 그저 마법적인 능력 활용과 앞선 의례처럼 선전에 나서주는 일이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
“......”
“정말이다.”
“......그럼. 조건이 있어요.”
하페는 무언가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결심한 듯 내 옆으로 나선다.
“조건?”
“함께 가요. 혼자선 못 가요.”
자그마한 손이 내손을 잡는다.
“둘이 함께 있어야 해요. 따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옆에.”
하페의 두 붉은 눈은 단호했다.
이 조건이 아니면 절대 가지 않겠다는 모습.
기사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안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