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5화 〉 25. 진심 (2)
* * *
***
의례는 성공적으로 진행됐다.
장소는 예언의 성녀에게 정체를 들켰던 그때와 같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두 명의 사도의 탄생에 기뻐했다.
수많은 이들 앞에서 검기를 뿜어내자 대다수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고 하페의 마법 역시 그러했다.
그리고 여전히 뒤에 병풍처럼 서있는 자애와 달빛, 두 명의 성녀.
잠깐 말이라도 걸어볼까 생각했지만 워낙 할 게 많았고 신분상 하페의 수호기사이기에 말을 걸기에는 그림이 이상했다.
예언의 성녀는 별빛의 성녀인 하페에게 축복을 내려주며 가벼운 예언 하나를 남기곤 의례를 이어나갔다.
“으… 왜 이리 할 게 많아.”
“곧 끝나니 조금만 참아.”
나는 하페의 소곤거리는 투정을 받아주며 의례의 마지막 순서.
예언의 성녀의 예언이 있었다.
백색의 머릿결을 가진 그녀는 잠시 우리를 한번 쳐다보더니 이내 알듯 말듯 한 표정을 짓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전에 예언의 신님께 예언을 받았다 일렀습니다. 저기 계시는 별빛의 성녀님과 검신의 사도님이죠.”
조용한 의례장.
성녀는 계속 말을 이어나간다.
“저는 이것이 앞으로 다가올 위험을 위한 방패라고 생각합니다. 예언의 주기가 짧아지고 신의 사도는 점차 늘어나고 있습니다.”
마치 누군가를 대비하는 것처럼.
다들 말은 안 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잠들어 있는 마왕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비록 수백 년 전 일이긴 하나 요즘 들어 각국의 정세에 미묘한 전운이 돌고 있으니까.
아마 이 의례를 끝으로 가득이나 값이 오르고 있던 식료품이나 병장기의 값이 더 비싸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쪽은 제법 강하니까요.”
다소 오만할 수 있는 말이지만 화려한 휘광을 내뿜는 그녀는 그만한 말을 내뱉을 자격이 있었다.
그녀는 유일하게 ‘시간’을 다룰 수 있는 신의 사도니까.
“그럼. 이것으로 의례를 마치겠습니다.”
침묵이 감도는 의례가 끝이 났다.
***
“마왕은 이미 깨어났습니다.”
주르르륵.
의례가 끝나고 잠깐 예언의 성녀와 독대하던 내 입에서 오렌지 주스가 흘러내렸다.
성녀의 눈썹이 꿈틀거리더니 이내 내가 내뱉은 주스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니, 그게 무슨.”
“영지민들의 불안을 덜기 위해 말은 하지 않았으나 이미 마왕은 깨어나 제힘을 회복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아마 조만간 소집령이 떨어지겠죠.”
여러 가문과 국가를 넘어, 인류 전체의 연합군으로.
“마음의 준비는 하시라고 미리 일러두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굳이 그런 말을 하셨습니까. 불안을 덜기 위해서라면 아예 말하지 않는 게 좋았을 텐데요.”
성녀는 다가올 위험이니, 예언의 주기가 짧아지니 하는 불안한 말을 내뱉었다.
사실상 마왕이 곧 부활한다는 말과 같지 않은가.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다릅니다.”
“다르다고요?”
“다가올 위협은 아군을 끈끈하게 만들어줍니다. 더불어 그들의 위협을 막아줄 방패들이 있다면 더더욱 그렇죠.”
백색의 눈은 고요하게 깜빡인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위험은 다릅니다. 아직 준비되지도 않은 지금 시점에서의 마왕 부활은 그들이 뭉치기도 전에 흩어지게 만드니까요.”
“...하지만 마왕이 부활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쳐들어올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마왕은 강하다.
하지만 마왕이 위험하고 두려운 존재인 건 단순히 마왕만의 문제가 아니다.
‘마왕군.’
마왕의 수하들인 간부 악마들과 그의 수족인 마족.
그리고 여태껏 이지 없이 날뛰기만 했던 수많은 몬스터들이 마족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다는 점이다.
아무리 마왕이 힘을 회복하는 중이더라도 그 수하들은 아니니까.
“제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예언의 성… 아!”
그래, 성녀에게는 예언이라는 ‘미래’를 볼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렇다면 마왕의 활동 시기 역시 예측할 수 있을 터.
예언의 성녀는 보기 드문 웃음을 자아냈다.
“마왕은 당장 나서기보다는 동면 상태를 벗어나 현재의 육신에 적응 중입니다. 적어도 당분간은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그게 얼마나 되죠.”
“짧으면 6개월. 길면 2년이 최대입니다. 물론 그 수하들은 그보다 빨리 움직이겠죠.”
“......”
“이미 하위 몬스터들은 전보다 활발한 기세로 날뛰는 중입니다. 때문에 후작령에서도 기사들의 파견이 급증한 상태죠.”
6개월.
너무 짧다.
힘이 강해지긴 했다만 아직 내가 생각하던 힘의 반의반도 도달하지 못했는데.
“걱정되시는군요.”
“...그렇습니다.”
“당신의 능력은 매우 우수합니다. 당신이 보필하는 성녀 역시 그러하죠.”
“하지만 아직은 약합니다. 저와 하페에겐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좀 더 강해져 마왕이라는 대적과 맞서 싸울 수 있을 정도로.
“흐음…”
톡, 톡.
“그렇다면… 제가 좀 도와드리죠.”
“?”
“대신 저의 부탁을 들어주시겠습니까?”
***
“뭔 얘기하고 왔어?”
고개를 갸웃 거리며 물어보는 하페.
나는 예언의 신전을 벗어나 하페와 함께 대기하고 있던 마차를 탈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뭔데 그래? 중요한 얘기야?”
“장막 좀 쳐줘.”
“장막? 응.”
마차의 안쪽으로 별빛의 성운이 들어서고 마차 바깥쪽으로 조금의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마왕이 이미 깨어났어.”
“...!”
“동면 상태에서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휴식을 취하는 중이지만 머지않아 활동을 시작할 거야.”
“진짜? 그러면 당장 쳐들어 가는 게 맞지 않아?”
“나도 그 생각을 하긴 했는데…”
마왕이 부활했다.
그는 이제 막 깨어났고 힘을 기르고 있는 중이다.
만일 내가 인간 쪽에서 두터운 인망과 힘을 가지고 있고 군사를 이끌 결정권이 있다면 당장 마왕성을 습격했을 거다.
힘을 회복한 마왕보다 덜 회복한 마왕이 더 이기기 쉬울 테니까.
하지만.
‘어째서 안된다는 거죠?’
‘인간군은 서로의 이득을 계산하는 중입니다. 마왕군은 비슐 왕국의 북면에 위치해 있고 비슐 왕국은 제브니아 왕국과 휴전 상태죠.’
‘...설마.’
‘가장 먼저 마왕이 날뛴다면 피해를 입을 곳은 비슐 입니다.’
더불어 남면에는 바다가 위치해 있는데 무역 왕국 미라크와도 아직 협정이…
“...복잡하네.”
“맞아.”
당장 인류가 위험에 처했는데 각자의 이득만을 취하려 들다니.
아무리 수백 년 전의 일이라고 해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근데 그렇다고 그들을 빼고 전쟁을 할 수도 없다.
비록 힘이 약하더라도 마왕의 힘은 강하고 인류의 절반. 아니, 7할 이상은 모여야 승부가 가능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고려하면 당장 나설 수 있는 건 3할이 전부다.
나머지는 각국의 이득과 상황을 고려하고 있는 중이고.
“가장 큰 문제는 마왕군과 맞닿아 있는 비슐이야. 연합군을 마왕에게 보내려면 국문을 열어야 하는데 제브니아와 휴전 중인 상태에서 나라를 열리가 없어.”
말이 휴전 상태지 사실상 전쟁 중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의 사이는 극에 달했고 마왕군이 준동한다면 예언이 없었다면 반년 안에 전쟁이 일어났을 테니까.
바다 역시 해로(??)를 장악하고 있는 미라크 왕국은 협정과 자본을 빌미로 쉽사리 열어주려 하지 않고 있고.
이렇게 시간이 지연되고 있는 와중에도 마왕의 힘은 점점 강해지고 있다.
“...다른 방면은? 동쪽이랑 서쪽도 있잖아.”
“다 산이야.”
과거 마왕과 여신이 혈투 중 만들어진 두 개의 검은 산.
워낙 지형이 험난하고 높이도 다른 산보다 세 배 이상은 높아 쉽사리 진격할 수가 없다.
그냥 산도 아니고 마왕에 의해 만들어진 산.
그 안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아무도 모른다.
“......”
“......”
덜컹덜컹.
마차는 고요히 신전을 향해 나아간다.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
여신의 희생과 계약으로 신들은 인간계에 개입할 수 없다. 그들이 개입할 수 있는 건 오직 자신의 사도들뿐이다.
나는 장막을 치워달라 말한 뒤 마차 너머를 바라봤다.
아직까지는 푸르른 하늘은 창공을 비추고 찬란한 도시에 느껴지는 평온함이 우리를 감쌌다.
‘아직까지는.’
“강해져야 돼. 하페.”
강해져야 한다.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 」
***
별빛의 신전에 돌아온 뒤 하페는 짧은 휴식을 거치고 마법 수업에 들어갔다.
나 역시 부단장에게 검술 수련을 받아야 하지만 이번에는 시간을 비웠다.
“자애의 신전…”
예언의 성녀 에린에게 받은 부탁은 데브론 후작령의 두 신전의 성녀에게 편지를 전달하는 일이다.
그냥 편지라면 사제들이나 심부름꾼을 시켜 보내면 되지만 굳이 나에게 부탁한 걸 보니 중요한 서신에 가깝겠지.
다른 이들은 결코 보면 안 되는.
‘그래서 무슨 내용입니까?’
‘비밀입니다.’
‘...제가 열어본다면요.’
‘상관은 없습니다. 다만 각오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말이죠.’
‘...?’
“...으음 보고 싶은데.”
뭔 내용일까.
결국 나에게 이 일을 맡겼다는 건 나는 이것을 알 자격이 있다는 것 아닌가?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결국 편지를 열지 못하고 자애의 신전으로 향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