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76화 〉 25. 진심 (3) (276/318)

〈 276화 〉 25. 진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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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애의 신전은 다른 여타 신전과 달리 꽤나 특이했다.

연분홍의 석조 건물들이 원형으로 지어져 있었고 위쪽은 새가 부리로 파먹은 듯이 뾰족이 들어가 있었다.

‘하트 군.’

“여기가 자애의 신전…”

나는 자애의 신전의 정원을 걸었다.

분홍이 특유의 색감인 만큼 정원의 식물도 모두 분홍색이라 다소 어지러운 감이 있었지만 행동에 제약이 생길 정도는 아니었다.

정원의 끝에 다다르자 호호 웃는 사제들이 보인다.

대충 셋 정도.

의례 때는 보지 못한 사제들이다.

그들은 나를 보자마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내 신체와 의중을 파악하는듯한 눈빛.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누구니? 여기 함부로 들어오면 곤란하단다.”

그중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큰 키를 가진 여성 사제.

마치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한 말투에 살짝 미간이 찌푸려졌으나 의례때 오지 못했다면 충분히 그리 생각할 만도 하다.

보통 신전은 민간인의 출입을 금하니까.

“별빛의 신전의 수호기사 김윤입니다. 검신의 사도로 임명받았죠.”

손목에 찬 연푸른 팔찌를 보여주자 사제들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사, 사도님.”

“사도님. 무슨 일로 자애의 신전에 찾아오셨습니까.”

“자애의 성녀님께 전달할 중요한 서신이 있어 직접 찾아왔습니다. 자애의 성녀님은 어디 계시죠?”

“......”

급격히 싸늘해진 주변.

순간 냉기의 성녀라도 온 건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 였지만 정말 기온이 떨어졌다기보다는 분위기가 얼었다는 표현이 맞으리라.

큰 키를 가진 사제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자애의 성녀님은 중요한 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서신을 주시면 제가 추후에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아니요. 이 서신은 기밀이 담긴 서신입니다. 오직 성녀님만이 받아야 합니다.”

“...저희는 멋대로 서신을 읽어보지 않습니다. 신전의 모든 이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런 건 여러분이 정하시는 게 아닙니다.”

다소 엄격하고 깐깐한 태도.

나도 굳이 좋게좋게 넘어가면 좋지만 부단장과 신전의 사제들로부터 배운게 있다.

이런 기밀이 걸린 중요한 일을 멋대로, 또 편하게 넘긴다면 분명히 더 큰 화가 되어 불편한 일이 생길 거라고.

무엇보다도 이 사제들은 뭔가 달랐다.

‘별빛의 사제들과 뭔가 느낌이 달라.’

별빛의 사제들은 정말로 성녀와 나를 축복하고 아끼는 느낌이라면 자애의 사제들은 묘하게 꺼림칙했다.

아직 뭔가를 보지 못했지만 내 느낌은 그러했다.

“기도는 언제 끝나십니까.”

“...기도는 오늘 하루를 지나 내일 낮까지 이어질 예정입니다.”

“그럼 내일 낮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정말 그리하시겠습니까? 아직 나이도 어리신데 일찍 주무셔─”

우우웅…!

갑작스러운 기세에 큰 키의 사제가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선다.

평범한 인간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기운이 사제와 그 주변에 불안한 표정으로 대기하고 있던 두 사제를 덮쳤고 머지않아 사제들은 풀썩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식은땀은 잔뜩 흘리는 사제들.

그제서야 나는 아주 일부만 운용하던 기세를 가라앉혔다.

“착각하지 마세요.”

“......”

“나는 단순한 전령으로 온 게 아니라 별빛의 신전의 수호기사, 검신의 사도로 온 겁니다. 나를 무시하는 태도는 나만이 아닌 별빛의 신전 역시 포함되어 있습니다.”

“......”

“기도가 끝나는 내일 낮까지 자애의 신전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때까지 자애의 신전을 좀 둘러보겠습니다.”

“...예.”

사제는 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숙였고 양옆에 사제들은 양팔을 붙잡으며 나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

“후우…”

나는 잔뜩 긴장되어 있던 숨을 천천히 내쉬며 자애의 신전의 벽면에 손을 기댔다.

“예언의 성녀는 이걸 어떻게 숨 쉬듯 하는 거지?”

이런 걸 표정의 변화 하나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나는 땀에 젖은 머리를 대충 정리하며 자애의 신전을 걸었다.

신전의 내부는 별빛의 신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색상만 다를 뿐 기다란 복도에 각각의 시설이 적재적소로 배치되어 있었고 가끔 보이는 사제와 기사들은 나를 보면 공손히 인사했다.

아마 앞선 사제들로부터 말을 전달받을 것이리라.

‘괜히 건들지 말라는.’

“여기는… 도서관인가?”

나는 책이 많은 공간에 들어왔다.

가운데는 비어있고 주변으로 수많은 책장이 둥글게 놓인 모습.

그러나 딱히 누가 읽은 것 같은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구색을 맞추는 용도의 공간.

“무슨 일로…”

이제 보니 졸고 있던 사제 하나가 보인다.

아마 올 일이 전혀 없는 곳이겠지.

“성녀님은 이곳을 잘 이용 안 하십니까?”

하페는 많이 들락날락하던데.

예언의 성녀 역시 항상 마주할 때마다 탁자에 책이 한두 권씩 놓여있었고.

도서관의 사제는 손을 마구 저으며 고개 역시 저었다.

“아, 아뇨! 이용 많이하십니다. 기도가 없는 날에는 수십 권의 책을…”

“...그렇습니까?”

“네!”

나는 대충 알겠다 하며 고개를 끄덕인 뒤 도서관을 나왔다.

그 뒤에도 성녀가 갈법한 공간은 전부 가봤지만 딱히 성녀가 이용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사제와 기사들의 이용은 많았지만 신의 힘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대체 뭘 하고 지내는 거야?”

점점 안 좋은 느낌이 내 뇌리를 찌른다.

그렇게 점점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던 찰나.

─그만해주세…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

하지만 목소리에서 나는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성녀다.’

나는 급히 안쪽으로 들어갔다.

기도실 안에서 그만해달라고?

대체 뭐를 그만해…

“사도님.”

터억.

“여기는 출입 금지입니다.”

부단장과 맞먹을 정도의 체구를 가진 기사가 나를 가로막았다.

기사의 신의 힘이 없다면 부단장과도 맞먹을 정도의 수준.

주변을 둘러보니 전보다 훨씬 많은 기사들이 이 앞을 지키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죠.”

“무슨 짓이라뇨. 성녀님은 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은빛의 검을 꺼내들었다.

은빛의 검에는 연푸른 검기가 솟아올라오고 내 몸에 가득 찬 기운이 강렬한 기세로 변환되어 주위를 장악했다.

기사들은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 친다.

유일하게 가만히 있던 내 앞의 기사는 한숨을 내뱉었다.

“자애의 신님은 자애의 성녀님께 고난을 겪게 합니다. 성녀님은 아직 정신적인 성장이 덜 되셨기에 약한 소리를 하는 게 당연─”

“아뇨.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신의 고난이나 수련은 흔치 않지만 그렇다고 적지도 않다.

신중 일부는 자신의 힘은 준비되고 자격이 있는 자만이 받을 수 있다 생각하고 고행을 겪어야만 힘을 내어주니까.

하지만 방금 들은 목소리는 고행 같은 것이 아니었다.

“목소리에 다른 목소리가 섞여있었습니다. 이곳의 사제, 혹은 기사의 목소리를 말이죠.”

“...!”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기운이 더 강렬해진다.

“뭘, 하고 있는 겁니까.”

***

나는 신전을 믿지 않는다.

처음 보았던 신전의 사제들 역시 그러했고 그 때문에 하페와 도망치칠 생각까지 했으니까.

이를 악물고 기사를 이겨 수호기사로 하페의 옆에 설 수 있게 되었지만, 돌이켜보면 내가 없었어도 하페가 위험에 처할 일은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신전의 기사들은 믿을만했고 사제들은 제 본분을 지켰으니까.

하지만 나는 조금은 다르게 생각했다.

‘만일 우리에게 그만한 힘이 없었다면.’

‘별빛의 사도가 다른 여타 신전들처럼 ‘귀하지’ 않았다면.’

그래도 우리를 그렇게 존중하고 배려해 주었을까?

나는 어릴 적 도시에서 보았던 사제들과 기사들을 떠올렸다.

묘하게 탐욕에 깃든, 꿍꿍이가 있는 모습을.

그리고 그 사제들은 자애와 달빛의 일원이었다.

“비키세요.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습니다.”

“...망할 꼬맹이가 겁도 없이!”

후웅! 빠르게 치고 오는 기다란 대검.

대검에는 불그스름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검기.

지금 기사는 나에게 검기를 사용했다.

카가각!!

나의 연푸른 검기와 기사의 붉은 검기가 맞닿고 주위 일대의 마력이 진동했다.

힘이 제법 거샜다.

부단장을 힘으로 누를 수 있을 정도로.

나는 몸을 낮추어 대검의 쇄도를 막아내며 말했다.

“별빛의 신전에 대한 적대 행위, 기밀이 담긴 서신을 들고 온 전령에 대한 공격 행위.”

“뭐라는 거냐 꼬맹아.”

카앙! 여태껏 나를 짓누르던 대검이 허무하게 뒤로 튕겨나가고 기사의 두 눈이 찢어질 듯이 커진다.

“지금부터 정당방위란 소립니다.”

화륵! 연푸른 검기가 불길처럼 타올랐다. 타오른 검기는 일직선으로 질주하다 마치 뱀처럼 휘어 기사의 옆구리를 노렸다.

“크윽!”

대응할 틈도 없이 당한 기사.

“단장님!”

“저 녀석을 막아라! 절대 기도실 안으로 들여보내선 안돼!”

대기하고 있던 열셋의 기사들은 각자의 검을 들고 내게로 달려왔다.

좁은 복도는 아니지만 단장과 나를 포함해 열 다섯이 치고받기에는 좀 좁은 공간.

“좀 줄이자.”

“도망치는 거냐!”

“아니.”

나는 뒤로 몸을 쭉 빼며 타오르는 검기 역시 뒤로 쭉 뺐다.

검기는 마치 살아움직이는 생명체처럼 요동치기 시작했고 나의 내지름에 적을 향해 비상(?上) 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언제부턴간 자연스레 익힌 기술.

일격(一?).

변형식(???) ─ 용비검(??).

“피, 피해라!”

옆구리의 상처를 수복하던 단장이 급히 일렀지만 이미 늦었다.

용이지만 용은 아닌 연푸른 형상의 무언가가 앞서 다가오는 기사를 유린했다.

급하게 검을 막는 세 명의 기사를 향해 각자 왼팔과 오른팔. 두 다리를 물어뜯었다.

한순간에 마나를 쓰는 정예 기사 셋은 피를 잔뜩 흘리며 바닥에 쓰러지고 뒤이어 다가오는 두명의 기사 역시 충격파에 의해 벽면에 처박혔다.

“후우…”

‘죽이진 않는다.’

처음 마주하는 적의.

저들은 나의 팔 다리를 자르는 한이 있더라도 나를 잡을 생각이지만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저들을 벌하는 건 내가 할 게 아니다.’

나는 어디까지나 하페의 검.

아직 완벽한 판단이 떨어지기 전까지 멋대로 재단해서는 안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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