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77화 〉 25. 진심 (4) (277/318)

〈 277화 〉 25. 진심 (4)

* * *

***

“...대단하구나. 그 나이에 형상검을 쓸 수 있다니.”

“형상검?”

“허! 뭔지도 모르면서 기술을 익힌 거냐?”

단장은 대검을 어깨에 걸치며 기가 찬다는 듯이 혀를 내둘렀다.

그는 주춤거리는 기사들을 본 뒤 그들을 뒤로 물렸다.

평범한 기사들로는 나를 막을 수 없으니.

기사는 강렬한 기합과 함께 다가왔고 나는 검을 치켜세웠다.

「▼─ 」

***

“괴물 같은 놈…”

“......”

마지막으로 가로막은 기사를 베어낸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정신과 육체는 지쳤지만 내 몸속에 가득 찬 연푸른 힘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거의 무한에 가까운 양.

‘...확실히 전보다 강해졌어.’

육체의 성장만 잘 이루어진다면 이 무한과도 같은 힘을 아무런 제약 없이 쓸 수 있으리라.

“끄으윽…”

“들키면…”

비명과 신음 소리를 내뱉는 기사들.

그리고 저 안에 있는 성녀 역시도.

나는 망설임 없이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

“어떻게 온…”

“기사들은 뭘 하느라 저런 꼬맹이 하나를…”

“위험…”

성녀의 주위를 둘러싼 대사제들과 일부 기사들이 당황하며 말을 내뱉고 있었지만 내 귀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

“아흐으아…”

제단의 가운데에 알몸으로 누워있는 성녀.

처음 이곳에 들어올 당시, 그리고 기사들을 상대할 때만 해도 나는 그런 가정을 하고 있었다.

성녀에게 성 착취적인 무언가를 하고 있을 거라고.

사제들의 눈초리도 심상치 않았고 자애의 성녀기도 하니 얼토당토않는 이유를 덫붙혀 그런 짓을 저지를 확률이 높을 거라고.

‘차라리 그런 거였다면.’

머리에 피가 솟구친다.

성녀의 육신에 새겨진 ‘각인’

하페에게 수업을 가르치던 마법 사제를 통해 ‘힘의 추출’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각인이요?’

‘네. 과거, 그러니까 불과 300년 전까지만 해도 신의 사도는 신전에 위치하지 않았습니다. 신전은 이름뿐이고 지금과 같은 위치를 가지지 않았지요.’

‘신은 인간계에 개입할 수 없고 신의 사도는 신의 힘을 얻었지만 신의 보호를 받지는 못했습니다. 때문에 신의 힘을 노리는 이들에게 많이 노출되었지요.’

각인은 그런 자들이 만들어낸 끔찍한 마법입니다.

“...사도님?”

‘신의 힘의 총량은 줄어들지 않는다’는 법칙을 이용해 만든 생명 마법.

흑마법에 가까운 마법으로 300년 전 이후로 엄중히 금지된 마법입니다.

“이, 이건 별개 아닙니다. 그저 성녀님이 그리하신다…”

각인은 시전자에게 극한의 고통을 줍니다.

사지를 뜯어내고, 그 뜯어낸 상처를 벌레가 파먹는 것과 같은 고통을 주지요.

신의 힘은 사도와 일체 되어 있으니 힘을 빼낸다는 건 육체의 일부를 빼낸다는 것과 같습니다.

신의 힘이 사라진 육체는 반동을 견디지 못하니까요.

“으… 아…”

힘은 정신이 멀쩡할 때만 빼낼 수 있으니 각인 역시 깨어있을 때만 가능하죠.

그렇게 뽑혀진 힘은 다시 시간을 지나 차오르고 뽑아낸 힘은 연금술을 통해 다양한 것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다이아몬드 목걸이.’

‘금 장식 반지.’

‘값비싼 보석과 비싼 천 등등.’

전부 주변의 사제들이 착용하고 있는 물건들이다.

“어쩐지.”

이곳에 오면서 본 사제들 역시 각자 반짝이는 장신구 하나쯤은 가지고 있었다.

대사제나 기사라면 몰라도 일반 사제들은 그러한 사치품 하나 얻기 힘들 텐데.

두근.

“오해십니다.”

두근, 두근.

“이건 성녀님께서 원하신 겁니다. 자신의 쓸모를 이런식으로라도 쓰고 싶다고.”

인자한 표정의 대사제.

휘황찬란한 로자리오를 목에 매고 있는 흰머리와 긴 수염을 가진 노인 사제.

그를 보니 역겨워서 구역질이 났다.

“틀렸어.”

하페, 미안.

「▼─ 」

이건 참을 수 없다.

“이런 건 희생이 아니야.”

연푸른 선이 성녀의 몸에 박혀있던 7개의 각인을 모두 박살 낸다.

붉은색의 글자가 새겨진 원형의 각인들이 흩어지고 텅 빈 동공과 가냘픈 신음 소리만 내뱉던 성녀의 얼굴이 안정을 되찾는다.

나는 빠르게 달려가 성녀를 들쳐업고 안전한 뒤쪽에 놓았다.

중간에 대사제들이 마법을 몇 개 날리긴 했지만 힘을 퍼트려 공격을 모두 무로 돌렸다.

‘적’을 살핀다.

대사제 다섯과 기사 일곱.

그 외 비전투 사제는 열둘.

“사도님. 자애의 신전을 적으로 돌리시는 겁니까?”

“지랄.”

내 입에서 나왔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의 험한 말.

예언의 성녀에게 쫒길 때도 나오지 않았던 말이 지금은 너무나도 쉽게 나온다.

“누가 누구를 적으로 돌려. 이 개자식들아.”

예언의 성녀도 알고 있었을까?

“...전쟁이 코앞입니다. 이런 식으로 ‘인간’의 분열은 옳지 않습니다.”

“니들은 인간이 아니야. 괴물이지.”

“...후회 안 하십니까.”

알고 있었겠지.

‘예언’의 성녀인 그녀가 모를 리가 없으니까.

나는 전보다 훨씬 강렬한 검기를 내뿜으며 생각했다.

‘에린 론브디아. 너도 해명을 해야 할 거야.’

이걸 왜 이제 와서야 처리를 맡기는 이유를.

왜 지금까지 이러한 악행을 두고 봐왔는지를.

“...어쩔 수 없군. 적당히 제압하려 했거늘.”

대사제는 어느새 소환한 지팡이를 꺼내며 바닥을 쿵! 쳤다.

뒤쪽으로 빛이 나는 석제 골렘이 소환되고 그 주변의 사제들은 골렘에게 각각 마법을 걸어주었다.

“죽여라.”

쿵! 쿵! 기도실을 박살 내며 뛰어오는 골렘.

나는 손목을 꺾어 은빛의 검을 회전시켰다.

일대의 공기가 빠른 속도로 회전하고 이윽고 검 주변에는 거대한 폭풍이 일어나듯 한 착각을 일으켰다.

드드드─! 기도실의 바닥 타일이 허공에 뜨고 비전투 사제는 물론이고 기사들 역시 몸을 가누기 어려웠다.

유일하게 서있던 다섯의 대사제 중 노인 사제는 몰아치는 바람에도 덤덤히 말을 내뱉었다.

“포기해라. 바람 따위로 5서클의 골렘을 막지 못한다.”

“뚫지 못하는 건 없어.”

끄득.

바람이 응축되고 이제는 정말 코앞까지 다가온 골렘이 내게 주먹을 내지른다.

그 순간. 나는 그 자리에 없었다.

일격(一?).변형식(???) ­ 풍진신뢰(風??雪).

번개처럼 쏘아진 나의 검은 골렘의 목과 가운데 동력 부분을 베고 뒤이어 바람에 몸을 가누지 못하는 기사 일곱의 목을 단숨에 베었다.

그들은 목이 베였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체 그저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만을 느끼다 눈을 감았다.

“크읍!”

아직 끝나지 않은 검은 대사제 하나를 베고 다른 하나가 가진 백색의 방패를 부수고 왼쪽 팔을 날려버리고 나서야 간신히 멈춰 설 수 있었다.

“...!’

“무엇을…”

그제서야 내 모습을 보고 기겁하는 대사제들.

당황하는 틈에 더 공격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몸을 뒤로 빼었다.

“흐억…! 흐, 헉, 허…”

거친 숨을 몰아쉰다.

1초도 안되는 짧은 시간 동안 아홉을 베고 왼팔을 하나 날렸다.

그러나 내가 느낀 시간은 30초 이상.

시간과 육체의 괴리감에 온몸이 욱신거리고 정신이 핑핑 돌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쓰러져 눈을 감고 싶은 심정.

“흐읍!”

그러나 나는 검을 바닥에 꽂고 몸을 지탱했다.

“아직.”

“......”

아직 적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넷의 대사제의 눈빛에는 더 이상 ‘오만’이나 ‘자신감’ 따위가 있지 않았다.

그들이 가진 건 오직 ‘두려움’과 ‘공포’뿐.

대사제 중 하나가 급히 지팡이를 들어 나를 공격하려 들었으나 가장 뒤쪽에 있던 노인 사제가 그를 저지했다.

“대단하시군요. 검신의 사도의 힘이란.”

“...아부해도. 너희는. 여기서 죽는다.”

“예. 당연히 그렇겠죠. 하지만 이번만큼은 다를 겁니다.”

따악.

기도실의 불이 꺼지고 근처에 오들오들 떨고 있던 비전투 사제들이 무작정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손에 들린 건 자그마한 단검.

평범한 사람이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지만 나나 대사제들은 충분히 볼 수 있는 정도였다.

‘이건 사제들을 위한 어둠이군.’

자신의 죄를 숨겨주길 바라는 어둠.

꽂아뒀던 검을 세우고 베려던 순간.

“베실 겁니까? 그중 절반은 이번에 처음 들어온 신입 사제입니다. 각인을 한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죠.”

노인 사제의 말이 기도실 전체에 울린다.

사제들은 그에 살짝 움찔했지만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나는 정확히 그가 있는 곳을 노려보았다.

“내가 못 벨 거라 생각하나.”

“예. 당신은 수호기사.”

그는 웃음을 자아냈다.

“검은 주인의 명령을 따라야죠. 제멋대로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맞다.

내가 벨 수 있는 건 죄가 확인된 사제들과 기사들뿐.

방관죄가 있는 일반 사제들이면 몰라도 오늘 처음 들어온 사제들은 죄가 없다.

“으읏…”

사제 중에는 하페보다 어린 나이의 사제도 있다.

하지만 그들을 구분할 방법은 나에게 없다.

그들은 보석도, 신의 힘도, 그 무엇도 특별하지 않고 똑같은 열둘이니까.

“......”

“시체는 잘 별빛의 신전에 보내드리겠습니다. 아, 물론 빼먹을 건 빼먹고요.”

말을 끝으로 어린 사제의 단검이 내 손바닥에 박혔다.

오들오들 떨고 있는 것이 처음 고블린을 만난 하페와 겹쳐 보였다.

“미안하다.”

촤악.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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