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8화 〉 25. 진심 (5)
* * *
***
다가오는 열둘.
그리고 저 멀리서 내가 얌전히 찔리기를 기다리는 넷.
평소라면 아무런 피해 없이 막았을 공격이지만 지금의 나는 과도한 공격으로 인해 정상태가 아니다.
푸욱.
너무나도 쉽게 들어가는 공격.
“으으으…”
칼끝에서 떨림이 느껴진다.
나는 그런 아이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페의 수호기사.
‘수호’ 기사 로서 지켜야 할 본분과
수호 ‘기사’ 로서 지켜야 할 본분이 충돌한다.
하페를 지키는 위함도 있지만 ‘기사’라는 신분으로서 죄 없고 곤경에 빠진 이를 구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전자를 우선시한다면 지금 당장 눈앞에 열둘을 베어야 했고,
후자를 우선시한다면 얌전히 공격을 받아야 했다.
시간이 좀만 더 있다면 모를까 지금의 나에게는 힘 조절도, 부분적으로 베는 것도 어렵기에.
나는 고민 끝에 검을 들었다.
“.....!”
검 끝은 경계선을 긋듯 원형으로 휘둘러졌고 다가오는 열하나의 팔과 단검들이 잘려나간다.
많이 다가온 만큼 더 많이 베여 나가는 육체.
죽을 정도는 아니다.
…아니길 바라야지.
히익! 소리와 함께 내 손바닥을 찌른 아이가 뒤로 넘어진다.
“...죄 없는 이들을 베다니. 그러고도 당신이 기사입니까?”
“네놈들보다 낫겠지.”
시큰 거리는 손바닥을 누르며 어둠 속 대사제를 노려본다.
“착각하지 마. 나는 내 의지로 움직인다. 하페를 지키는 것도. 너희를 심판을 하는 것도 말이다.”
“설령 그게 죄 없는 이를 베서라도 말입니까?”
“그래.”
누군가는 비난할 수도 있다.
이유가 어찌 됐든 나로 인해 희생자가 나오는 거니까.
하지만 그게 자신을 희생해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목숨은 하나고. 지켜야 할 건 수십, 수백. 모든 걸 지킬 순 없다.’
그중 하나가 살아야 한다면 내 쪽에 손을 들어주리라.
‘자기희생은 구원이 아니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고 ‘내’가 정의 내린 행동의 원동력이자, 지금의 나 역시 가지고 있는 생각이다.
‘나’는 나니까.
“기사가 아니라 흔한 용병이었군.”
“너희는 버러지 같은 마법사들이고.”
꿈틀.
노인 대사제의 미간이 급격히 찌푸려진다.
더이상의 잔 재주는 의미 없는지 그의 마력이 폭발적으로 움직인다.
‘자애’라는 이명을 가진 신의 사제에 걸맞지 않은 어둠이 그의 몸에 들어찬다.
주위에 있던 대사제들이 기겁하며 하나의 육신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즈라카! 우리를 왜!”
“얌전히 흡수되거라. 너희의 힘으로는 저 애송이를 막을 수 없으니.”
“크아아악!! 이 개자식이!!”
‘흑마법.’
네 명의 대사제는 흔적도 없이 즈라카라는 노인 사제에게 흡수되었고 그의 기세는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기도실이 요동친다.
[기왕이면 ‘그분’이 활동하는 순간 움직이려 했건만.]
웅웅 울리는 목소리 마치 신의 소리처럼 전능함까지 느껴졌다.
몸이 제멋대로 떨리고 검을 든 손 역시 떨렸지만 기세를 바로잡는다.
즈카라의 검은 손이 움직이자 눈앞이 흐려지고 어느틈에 그의 어둠은 나를 습격했다.
카아앙─!!!
간신히 막아낸 일격.
그러나 고작 한 번의 공격임에도 은빛의 검신이 바스라졌다.
두 번은 막을 수 없다.
“제법이구나!”
어둠을 받아들인 뒤로 육신이 급격히 강해진 즈카라.
그는 노인의 몸이라기에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펄쩍 뛰어 내게로 다가온다.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지금’의 ‘나’에겐 없다.
하지만 ‘나’는 혼자만 있는 게 아니다.
‘동조화.’
과거의 이야기에 빙의된 나.
나는 과거의 나에게 개입할 수 없다.
어디까지나 내가 개입할 수 있는 건 특이점을 이용해 다른 몸으로 움직이는 행위뿐.
이야기를 보는 ‘독자’인 나는 지켜보는 것 밖에 할 수 없으니.
하지만.
“......”
반쯤 분리되어 있던 정신과 영혼을 일체 시킨다.
시야가 점멸하고 육신의 감각이 나의 것과 정확히 동조화된다.
동조화의 극한.
과거와 미래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특이점이 가진 ‘고유’의 법칙이 나를 하나로 규정한다.
‘나’는 내가 되었다.
“크하하하하!”
부러진 검과 저 멀리서 다가오는 즈카라의 모습.
여전히 부러진 검은 쓸 수 없고 내 육신은 엉망진창이다.
하지만 나는 웃었다.
무한이라고 생각하던 최강의 힘이 모조리 빨려 들어가 두 개의 에테르의 검을 만들어낸다.
강렬한 에테르의 힘이 끓어오르고 일대를 장악하던 어둠은 압도적인 빛에 질려 급히 밀려난다.
“무슨…!”
기세 자체가 달라진 나를 보고 기겁한 즈카라.
허나 늦었다.
두 개의 검신은 세상을 절단했고 어둠은 네 갈래로 쪼개진다.
최강자가 만들어낸 세계를 ‘절단’하는 검술.
이격(二?).
기술은 빙산의 일각도 못 되는 아주 작은 부스러기 정도였지만 흑마법사 하나를 베기에는 충분했다.
그그극… 쿠쿵!
자애의 신전이 무너진다.
억지로 연결한 나의 동조화 역시 끊어진다.
[과도한 동조화로 인해 독자와의 연결이…]
[이야기가 뒤바뀔 수…]
***
짹. 짹.
새소리.
나는 누워있다.
하페는 내 손을 꼭 붙잡고 내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눈을 감은 상태로 쳐다보았다.
나는 하페가 사용하는 ‘고유성’을 이용해 과거에 개입했다.
지금은 동조화가 잠시 끊어지긴 했다만 원한다면 언제든 연결할 수 있겠지.
그렇다면 하페는 어떨까.
지금 당장 하페를 부른다면 관리자의 이야기를 뒤지고 있는 하페가 올까?
나는 현재의 하페만 알 수 있는 신호를 보냈다.
“...윤아.”
꾸우우욱…
여전히 손만 붙잡은 채 기도하고 있는 모습.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 이후로도 여러 신호를 보냈지만 조금의 반응도 없었다.
‘지금의 하페는 기억이 없군.’
하페가 자신만의 공간 속에서 진심이라 한 이유를 알 거 같다.
‘자신이 창조자라는 것도 몰라.’
하페는 나를 시험하기 위해 평행 세계를 구성하고 자신 역시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나를 관찰했다.
의도 되었든 의도 되지 않았든 하페는 그런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저 하페는 신의 힘을 가진 열아홉 소녀일 뿐이다.
아마 몇 가지 트리거만 설정해두고 자신의 기억을 봉인해두었겠지.
진심이라는 말도 동등한 관계에서 호감과 이런 관계를 유지했기에 진심…
“윤아? 깨어난 거야?”
제길. 순간 우리의 관계를 생각하니 정신 집중이 깨졌다.
나는 별 수없이 육체의 제약을 풀었고 ‘나’는 눈을 떴다.
“하페…”
“윤!”
***
“다행이야… 정말. 무사해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자애의 신전은 300년 전부터 금지된 각인 마법의 사용을 이유로 ‘처분’명령이 떨어진 상태였다.
그 처분을 맡은 건 나였고.
나는 이마에 팔을 올렸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런 일을 계획한 걸까.
또 왜 나일까.
‘이게 강해지기 위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혹시 아직도 무리야?”
“아니, 몸은 괜찮아.”
2주.
내가 누워있던 시간이란다.
후에 도착한 기사단이 발견한 나는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처럼 위태위태했다던데.
“......”
그게 사실이냐 물을 정도로 지금의 나는 아주 멀쩡했다.
오히려 활력이 넘쳐 당장이라도 뛰어다닐 수 정도였다.
‘특히 그 마지막.’
마지막으로 사용한 ‘그것’을 사용한 나는 내가 아닌 것 같았다.
세상을 절단한 두 개의 검로(?).
검의 끝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아름다운 검술이었다.
‘어떻게 쓴 거지?’
내가 느끼고 계획한 바에 의하면 그 정도 경지는 앞으로 5년간 꾸준히 수련해도 닿지 못할 수준의 경지였다.
그만큼 그 기술은 대단했으니까.
“좋아.”
뭐가 됐든.
이 정도면 좋다.
최근 들어 급격히 강해지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게 내가 원하는 바이니.
어쩌면 ‘예언’의 성녀는 내가 이런 식으로 움직여야 강해진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뭔가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이 신의 뜻이면 받아들이는 수밖에.
의문을 품기에는 위험이 코앞까지 들이닥쳤는데 거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나도.”
“응. …응?”
“뭐.”
“뭘 나도?”
“아냐.”
“뭘?”
“아니라니까!”
***
나는 오랜만에 만들어둔 마법사의 몸으로 돌아왔다.
완전 동조화를 쓴 이후 평범하게 수련을 하거나 일상을 보내는 가벼운 이야기에도 동조화를 벗어날 수 있었다.
지금은 예언의 성녀도 자리를 비웠고 수련과 일상 외에는 할 게 없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편지는 빈종이였다.
“누구세요…?”
그리고 내가 찾아온 것은 두 팔을 잃은 비슷한 나이대의 소녀.
로브 속 손이 움직이자 녹색의 빛이 두 팔에 스며들었다.
2서클, 힐링 (Healing).
“파, 팔이…! 잠만요!”
소녀는 멀쩡히 돌아온 두 팔로 다급히 내가 들어온 문을 열었지만 나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여섯. 흑마법사 놈이 숫자는 정확히 말했군.”
신전과 관련이 없던 여섯의 팔을 모두 회복시켜 주었다.
팔이 잘리고도 과다출혈로 죽지 않았다는 게 신기할 다름이지만 부들부들 떨고 있던 자애의 성녀의 힘으로 죽지 않았다고 한다.
참고로 다른 여섯을 포함한 자애의 신전은 ‘처분’되었다.
“그럼… 슬슬 찾으러 가야겠네.”
최강자의 시작을 찾으러.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