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81화 〉 25. 진심 (8) (281/318)

〈 281화 〉 25. 진심 (8)

* * *

***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꽤나 곤란했다고 들었습니다.”

어전에서의 회의가 끝이 나고 황궁에 넘쳐나는 응접실에서 마주한 에린은 자리에 앉자마자 입을 열었다.

“그랬죠. 문제는 그게 아니지만.”

문제는 왜 그러한 행위를 그냥 두고만 보았는지다.

자애의 성녀의 말에 따르면 각인 의식을 치른지는 5년이 넘었다고 했으니까.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예언의 성녀로 지내온 에린이 모를리가 없다.

“사도님. 마왕에 대해 어찌 생각하십니까.”

“...갑자기요?”

“갑자기요.”

지금 말을 돌리는 건가 싶었지만 워낙 진지한 눈이라 나 역시 진지하게 마왕을 생각했다.

여신과 대적하는 마(?)의 존재.

이 세계의 절대적인 악.

모든 신들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 무소불위의 존재.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두려움이 엄습한다.

‘이길 수 있을까.’

“마왕은 오래전 여신의 봉인으로 수백 년간 잠들어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에서야 잠에서 깨어났죠.”

“......”

“기사단과 이름난 마탑들, 신전과 은둔 고수. 마지막으로 미지에 있는 여러 환수와 영물의 신들까지.”

타악.

“그런 이들이 모인다 한들 마왕과의 승산을 내기가 어렵습니다.”

정확히는 모일 수 없다. 가 맞겠지만요.

에린은 찻잔을 다시 들어 올렸다.

“...그래서 두 성녀들의 각인을 눈감아준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작 귀금속과 사제들의 배를 채우는 것이 마왕과의 혈전에 도움이 된답니까?!”

나는 에린을 노려보았다.

여전히 무표정하지만 처음 만났을 때의 조금의 관심도 두지 않는 눈빛과는 사뭇 달랐다.

그녀의 눈동자 안에 내가 깃든다.

깃든 나의 미래를 본다.

“평화의 시대에서의 악은 흔하지 않죠.”

“...?”

“악은 수백 년 전 위대한 빛에 잠들었고, 그 악은 머지않아 부활합니다. 그때 악을 마주하며 늦죠. 네, 많이 늦을 겁니다.”

“...지금 설마.”

덜컹!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그녀는 찻잔을 들었다 올렸다를 반복할 뿐이었다.

“악을 예습할 기회를 주었을 뿐입니다. 언젠가 나타날 당신 같은 영웅을 위해서.”

***

더 큰 악을 막기 위해 악을 키운다.

이전에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다가올 위협은 아군을 끈끈하게 만들어줍니다. 더불어 그들의 위협을 막아줄 방패들이 있다면 더더욱 그렇죠.’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위험은 다릅니다. 아직 준비되지도 않은 지금 시점에서의 마왕 부활은 그들이 뭉치기도 전에 흩어지게 만드니까요.’

단순히 주민들의 불안을 덜기 위해 했던 말들.

하지만 에린의 행동은 단순히 주민들로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

그것은 나에게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었다.

소름이 돋았다.

“...언제부터입니까.”

“오해는 하지 마세요. ‘그런 미래’를 알고 있다는 말은 당신이 내정되어 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탁.

“...그저 당신 같은 인류의 미래가 온다는 사실만을 들었을 뿐이죠.”

“인류의 미래.”

헛웃음이 나왔다.

처음부터 이딴 운명이 정해져 있었다니.

비록 에린은 몰랐지만 예언의 신이라면 그것이 나로 내정되어 있었다는 것쯤은 알고 있지 않았겠는가.

‘마(?)를 잡기 위해서 스스로 마(?)가 되다니.’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저의 죄는 모든 일이 마무리된다면 그때 달게 받도록 하겠습니다.”

드르륵. 이제는 예언의 성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은 인류의 중대사가 걸린 문제니까요.”

“......”

“너무 삐딱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이런 일은 이미 세계 각국에서 쉬쉬하며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

정의와 신의를 지키기에는 인류가 턱없이 약하니.

끼익…

쿵!

***

요즘 하페에게는 고민이 있다.

조금은 어려웠지만 재미있는 마법 수업도 잘 듣고 신전의 사람들도 자신과 윤이를 잘 챙겨준다.

처음 우려했던 걱정과 다르게 신전은 선의 대명사였던 셈이다.

‘자애의 신전의 ‘각인’과 ‘흑마법사’의 출현 전까지.’

신전은 선만을 추구하지 않았고 신의 신전에서는 나와선 안되는 흑마법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당연히 자애의 신전의 대부분은 처분당했지만 성녀의 간곡한 부탁으로 구색만 간신히 유지할 수 있었다.

“......”

그 일을 직접 겪은 윤이는 조금 달라졌다.

뭔가 사람이 날카로워지고 병적으로 수련을 계속 이어나간다.

봐봐, 지금도 황궁에 와서 수련을 하고 있지 않나.

“저분이 검신의 사도?”

“어려보이는데 몸은 되게 좋네.”

“부럽다~ 저런 분이 수호하는 성녀는 얼마나 좋을까.”

“혹시 애인이 있으려나.”

뭐? 애인?

하페는 고개를 획! 돌려 황궁의 시녀들을 노려보았지만 마력도 못 느끼는 민간인들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야! 수호기사는 결혼 못 하는 거 몰라? 연인이 생기면 수호하기 어렵다고 절대. 절~ 대 안 하잖아. 아예 법률로 지정되어 있을걸.”

“아니~ 결혼은 안 해도 하룻밤 정도는… 히익!”

“왜 소리를 지르고…”

히끅.

“뭐 하세요?”

“죄, 죄송합니다!”

후다닥 도망가는 시녀 무리.

진작에 그럴 것이지.

하페는 로브를 점검했다.

본래 입던 하늘하늘한 옷이 더 좋았지만 전시라 입을 수 없다.

그래도 본판이 워낙 뛰어나 뭘 입든 예뻐 보이니 문제는 없다.

하페는 성큼성큼 김윤에게로 다가갔다.

자신이 가까이 다가왔음에도 여전히 검을 휘두르고 있는 김윤.

유려하면서도 날카로운 검술은 봐도 봐도 매료될 것 같은 느낌이다.

한참을 지켜보던 하페는 끝날 기세가 보이지 않자 자신의 수호 기사를 불렀다.

“윤아.”

“...아. 하페. 왔구나.”

“잠만.”

하페의 별빛 마법이 김윤을 한번 통과하자 흘렀던 땀과 피로가 날아갔다.

그제야 윤이는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여기까지 와서 수련을 할 필요는 없지 않아? 보는 눈도 많은데.”

아까 도망갔던 시녀는 물론이고 귀족이나 기사, 마법사들도 윤이의 수련을 지켜보지 않은가.

때문에 황실의 기사들은 가끔씩 대련을 요청하거나 귀족들은 자신의 영지로 귀화하기를 제안하고 있었다.

마법사는 별 관심이 없었고.

“마왕과의 전투가 코앞이잖아. 늦출 수 없지.”

“...그래? 그래도 무리했다가 정작 중요한 순간에서 힘을 못쓰면 어떡해.”

육체의 피로야 마법으로 날린다 쳐도 정신적 피로는 지울 수 없다.

마법은 한계가 있고 정신이 무뎌지는 걸 막을 수 없으니.

김윤는 웃으며 하페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러면 하페가 날 도와주면 되지.”

“으, 응? 도와줘? 어떻게?”

“으음…”

고민하던 김윤의 눈빛이 하페를 마주한다.

서로의 시선이 맞닿고 아주 잠깐이지만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그 시간 속, 서로는 서로의 모습을 끝없이 담아내렸다.

하나의 시간.

둘의 시간.

무수히 많은 시간.

서로를 담는 것을 넘어 지금의 자신들은 눈치채지 못하는 시간까지 담고 있을때쯤.

‘...그만해. 멍청아.’

“읏!”

멈췄던 시간이 돌아오고 간신히 본래의 시야를 되찾았다.

“...멍청이?”

“응?”

“뭐라 말하지 않았어?”

“?”

뭐라 말을 했던 가?

그냥 지키보기만 하지 않았나?”

하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가졌지만 딱히 생각나는 건 없었다.

그저 서로를 끊임없이 지켜보았을 뿐.

윤이 역시 아닌데… 분명 뭐라 말을 했던 것 같은데… 라고 중얼거리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제 좀 나아졌어?”

“응.”

“...보는 것만으로 만족해?”

“...응? 방금 뭐라고…”

하페는 윤이의 의문에 자신이 한말을 떠올리다 얼굴을 화악 붉혔다.

뭐, 뭐라 말한 거야!

“아, 아냐! 나 놓고 온 게 있어서! 머, 먼저 가볼게!”

“하페!”

“미안!”

하페는 호다닥 도망갔고 이날은 어린 수호기사와 성녀의 풋풋한 일상으로 남아 황실의 가십거리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

“......”

나는 멀리 도망가는 하페를 보며 생각한다.

‘하페 역시 안전하지만은 않아.’

예언의 성녀는 미쳤다.

좋은 의미로 미친 건지 나쁜 의미로 미친 건지는 확신할 수 없으나 ‘인류’적인 측면에서는 좋다고 봐야겠지.

하페는 강하지만 에린이 찾는 인류의 미래가 아니다.

그 말인즉슨 자애와 달빛처럼 언제든 ‘소모품’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소리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 예언의 성녀는 절대 그럴 일이 없다며 못을 박았지만…

‘정말 그럴지는 두고 봐야지.’

상황이 급박해지고 ‘인류의 미래’가 위험해진다면 또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예언의 성녀로서는 나와 하페의 관계보다 인류를 우선시할 테니까.

나는 검을 휘두른다.

검이 허공을 긋고 이제는 완벽히 통제가 가능한 연푸른 힘이 검을 통해 터져 나온다.

강해져야 한다.

‘그 누구의 손에도 놀아나지 않기 위해.’

나는 어전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황제의 후계자가 보였던 회색빛의 검강을.

그 검강에 깃든 힘과 압도적인 크기를.

우선을 그것을 목표로 잡자.

***

그렇게 열흘이 지나고 여러 나라와의 협정과 군사 출정이 정해졌을 때쯤.

나는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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