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3화 〉 26. 인류의 적 (2)
* * *
***
“장관이군요.”
결전의 당일.
끝을 모르고 펼쳐진 군대와 이름난 마법사들이 즐비한 이곳.
저 멀리 보이는 비슐의 성을 향해 마법사들이 마력을 모아 준비한다.
녹색과 붉은색의 마나가 주변의 밀도를 높이고 수없이 늘어난 마력은 거대한 마법진을 준비한다.
아무리 소드 마스터가 된 나라고 해도 저런 마법을 정면으로 받아낸다면 필시 죽거나 그에 준하는 상태가 될 것이 분명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마탑의 마법사들은 하나하나가 결전 병기이니.”
창신의 사도, 브아타는 창을 훙훙 휘두르며 나와 같이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참고로 우리 뒤에는 각각의 성녀가 있었는데 하페는 호수의 성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왠지 호수의 성녀가 쩔쩔매고 있었지만.
“이번 전쟁에 참여한 마법사들은 상급 마법사 이상의 고위 마법사들. 마법사들의 힘이 한데 모인다면 이적(??)을 만들어내는 것도 불가능한 게 아니지.”
왕국을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뭉개버리는 이적(??).
그 거대한 면적을 한 번에 뭉개버린다니.
다소 실감이 안 나지만 이만한 마법사들이 한 번에 마법을 쓴다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뭐지?”
“당신은 왜 수호기사가 된 겁니까?”
내가 수호기사가 된 이후에 나는 수호기사와 관련된 정보를 더 찾아보았다.
하지만 나온 것은 각각의 이름과 강함에 대한 이야기뿐.
왜 수호기사가 된 건지는 나와있지 않았다.
굳이 찾자면 왕의 명이나 신전의 뜻이라는 정도.
그러나 강기를 쓸 수 있는 초인이 누군가의 명령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이 쉽사리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원한다면 소국의 왕처럼 군림할 수 있을 텐데.’
브아트는 훙훙 휘두르던 창을 멈추고 턱을 긁적였다. 이내 뒤쪽에 난감한 표정을 짓는 호수의 성녀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모르겠다.”
“네?”
“나도 저런 얼빵한 애를 왜 데리고 다니는지.”
“......”
붕─
“뭐. 굳이 이유가 필요한 건 아니지 않나?”
힐끗.
‘그만하세요…’
‘아니! 이거 진짜 신기하다니까요…’
“그냥 재밌으면 된 거지.”
“...그런 겁니까?”
“그런 거다.”
어중간한 말이었지만 이해는 갔기에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잠깐의 침묵이 일 때쯤.
“시작입니다!”
마법의 준비가 완료됐다.
***
비슐은 오래된 왕국이다.
왕국의 이름과 주인은 계속 뒤바뀌긴 했으나 왕국이 가진 전통과 습성은 수백 년 전과 똑같았다.
그런 비슐이 가진 오래된 이명이 있다.
‘인류의 방어선.’
사악하고 악독한 마왕 군을 막는 보루.
인류의 방패.
인류의…
“...망할 것들.”
그러나 비슐의 후계자, 아인시오 비슐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문을 열려 하다니. 그러면 우리가 다 죽는다는 걸 모르는 건가?’
비슐은 무려 이백 년간 후면에 위치한 제브니아 왕국과 전쟁을 치러왔다.
이백 년은 길기에 전쟁의 의미가 다소 무뎌진 감이 있지만 여전히 제브니아와의 사이는 좋지 않으며, 왕국의 국민들 역시 제브니아를 혐오하고 꺼려 한다.
‘30년의 세월이었다. 지금 기회를 놓치면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없어.’
30년 전, 제브니아와의 휴전 이후 서로 군대를 키우지 않기로 서약을 맺었다.
하지만 그것은 기만책.
비슐은 군대를 조금씩 키워나갔다.
제브니아와 비슐.
둘은 마법사들이 많지 않고 병장기를 쓰는 초인이 많은 왕국.
때문에 비슐은 그들을 키웠고 강기를 쓰는 수호기사를 짓누를 만큼의 강함을 확보한 상태였다.
그런 시기에 마왕이 부활했다.
마왕의 부활에 왕국들은 ‘인류 수호’를 목적으로 국문을 열 것을 요청했다.
‘미친 소리지.’
기껏 힘을 숨기며 제브니아를 박살 낼 일만 남았는데 문을 열라고?
게다가 저들이 말하는 건 마왕 토벌에 힘을 실어주기까지 해야 했다.
마왕군을 어찌어찌 토벌했다고 치자.
그러면 그다음은?
인류는 마왕 토벌 이후에 전쟁 수습을 할 것이며 그 시기에 전쟁을 일으키면 세계 문제로 걸고넘어져 제브니아에 도움을 줄 것이 분명했다.
보이는 것만 놓고 본다면 제브니아의 그 누구보다 인류를 수호했던 왕국이니까.
비슐은 어물쩡하게 문을 열지 않다 협박하자 그제야 문을 연 왕국이고.
“이미 늦었습니다. 아버지.”
아인시오는 비슐의 상징인 백청의 검을 들었다.
비슐의 국왕은 거대한 마법진을 보고 항복하려고 한다.
마법사가 극히 드문 비슐에서 저만한 마법진을 파훼할 수도, 막아낼 수도 없기에.
뚜벅, 뚜벅.
왕실의 복도를 거침없이 전진하지만 그 누구도 그의 발걸음을 막지 못했다.
콰아앙!!
어전의 문이 열리고 아인시오가 들어선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신하들의 도움을 받아 항복 서신을 쓰는 왕과 그 옆에 달라붙어있는 동생이 보인다.
항복하여 비슐이 완전한 속국이 된다면 가장 먼저 후계에 오를 인물.
‘전쟁을 원하는 나를 후계로 세울 일이 없으니.’
“나 참. 쓸데없는 짓을 하십니다.”
“아, 아인시오 네놈! 분명 칩거에 들어가라고 했거늘!”
“칩거?”
뚜벅.
아인시오가 한 발자국을 내딛는다.
순간 공기가 뒤바뀌고 비슐의 상징인 백청색의 머리칼이 조금 짙게 물든다.
“오지 마라 이놈! 기사는 뭘 하는가! 당장 저 배은망덕한 놈을 막아라!”
“......”
“......”
“뭘 하는가!”
왕은 버럭! 소리쳤지만 어전의 그 누구도 응하지 않았다.
“으으…”
“아아……”
다들 무기를 떨군 체 벌벌 떨고만 있을 뿐.
점점 아인시오의 인영이 다가오자 어린 동생이 이를 악물고 그의 앞을 가로막는다.
“형님! 이 싸움은 이길 수 없습니다! 인류를 어찌 막는 단 말입니까.”
“막지 않아도 된다.”
“...예?”
푸욱.
“크허…”
“막지 않아도 막아줄 이가 있으니 문제가 없다. 동생아.”
“혀…ㅇ 님…”
쿠웅!
“아, 피가 묻었군요.”
더럽게.
자신의 동생으로부터 칼을 회수한 아인시오는 쿡. 조소를 흘렸다.
조용한 어전의 장소에 기이하게 퍼져나가는 웃음.
왕은 침음을 삼켰다.
“...네놈. 인륜까지 저버린 셈이냐.”
“인륜이라뇨.”
스릉.
아인시오의 붉은 검면 사이로 얼굴이 비친다.
백(白)을 상징하는 머리칼과 다른, 또 다른 이면.
“왕위를 계승하는 중입니다. 아버지.”
***
“...항복한다는 서신은 없나?”
“그런 것 같습니다.”
쯧.
녹색 마탑의 마탑주는 시야 마법을 통해 저 너머의 비슐을 확인했다.
여전히 열릴 틈 하나 없이 닫혀있는 성.
‘쓸데없는 짓을. 괜히 민간인 희생자만 나오겠구만.’
마법사는 세계의 진리를 탐구하는 뛰어난 학자이기도 하지만, 전쟁에서는 그 누구보다 많은 사상자를 내는 학살자다.
때문에 학살에 희열을 가지는 미친 마법사도 존재하지만 대부분은 누군가를 죽이는 걸 꺼려 한다.
“시작해라.”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 놔둘 수도 없는 일.
저 안의 수만 명보다 전 인류의 수백, 수천만이 더 중요하다.
“시작하라고 하십니다!”
확성 마법이 말을 전달하는 상급 마법사를 통해 발산되고 모든 마법사들이 마력을 불어넣는다.
우우웅!
녹색과 적색의 마나가 뒤섞이고 뒤이어 두 개의 거대한 마법이 성을 향해 질주한다.
6서클, 어스퀘이크(Earthquake).
8서클, 인페르노 메테오(Inferno meteo).
콰드드드드!!
쿠오오오오─!
강렬한 지진파와 함께 비슐의 상공에서 용암처럼 뜨거운 운석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위, 아래를 전부 박살내는 마법사들의 꿈이라 불리는 대마법사 이상의 마법.
통칭, 지상과 하늘의 합작.
그저 가설로만 보았던 마법이 모든 이들에 눈에 들어왔고.
“음?”
“...?!”
“무엇을…”
그대로 끝이 났다.
그 어떠한 피해도 없는 비슐의 성.
오히려 성은 은은한 기운까지 느껴져 주위를 더 오싹하게 만들었다.
콰앙!
적색 마탑의 마탑주는 탁자를 산산조각 내며 눈을 부릅뜨었다.
“디, 디스펠?”
“말도 안 된다! 대마법사 다섯이 모여야 간신히 쓸 수 있는 마법을 어떻게…!”
방금 사용한 ‘지상과 하늘의 합작’은 두 명의 대마법사와 수백의 상급 마법사, 수천의 중급 마법사의 마력이 동원되어 발동된 마법이다.
그런 거대한 술식의 마법을 아무런 피해도 없이 디스펠 하려면 적어도 마성(??).
아니, 마성도 이렇게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막아낼 수 없다.
“마, 마법의 신이라도 온 건가.”
“그럴 리가 없잖소! 마법의 신이 마왕의 편을 들리가!”
마법사 진영은 큰 혼란에 빠졌다.
무려 3일에 걸쳐 간신히 발현된 마법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자 대다수가 마력 탈진에 걸린 것이다.
혼란이 가중되는 것은 기사 쪽에 위치한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페. 왜 사라진걸까.”
하페는 마법의 종주, 별빛의 신.
다른 이들이면 몰라도 하페라면 뭐라도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물었다.
“...글쎄. 나도 저만한 마법은 아직 못써서.”
하페는 끙끙 거리며 별빛을 마구 휘저었지만 방금 일어난 상황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방금 그건 그야말로 마법이 사라졌다고 봐야 했으니까.
“확실한 건 그냥 사라진 게 아니야. 마력의 흐름을 봐서는 어디론가 날려보낸 거 같아.”
“어디로? 그만한 마법을 날려보는 게 가능한 거야?”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다만 좀 위험해.”
나는 비슐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굳게 닫힌 문.
그 순간 비슐의 문이 열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