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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5화 〉 26. 인류의 적 (4) (285/318)

〈 285화 〉 26. 인류의 적 (4)

* * *

***

“보이십니까.”

“...네놈이 정녕.”

“저것이 우리의 방패입니다.”

불타오르는 정경을 보는 두 사람.

새로운 비슐의 왕이 된 아인시오와 무릎을 꿇고 있는 비슐.

그들의 눈에는 괴로움에 발버둥 치는 인간군의 모습이 고스란히 보였다.

끔찍한 용암과 인간으로서는 절대 저항할 수 없는 거대한 지진.

그것을 행한 것은 그토록 인간이 혐오하던 악마.

그것도 높은 수준의 간부다.

“우리가 인간의 방패라고요? 인간의 수호자 라고요? 그럴리 가요.”

“......”

“수백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우리는 북면에 위치한 마왕군의 공습을 저지해왔습니다. 마왕이 잠들기 전에도, 잠든 후에도 계속되었죠.”

하지만.

“다른 왕국들은 무엇을 했죠? 자기 일이 아니라며 나 몰라라 하고 그 어떠한 지원도 해주지 않았잖습니까.”

그 결과가 이것입니다.

“위는 마왕군. 아래는 오래된 적이 있죠. 우리가 당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면 큰 오산입니다.”

“...그래서 인류를 저버린 게냐.”

“인류라뇨. 인류는 저들만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아인시오는 이제는 절반 이상 검게 물든 흑백의 검을 치켜세웠다.

검은 불빛에 비쳐 은은하게 빛이 났다.

태양과도 같은 신성한 빛이 아닌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모조의 빛.

“마왕군이 곧 세계를 지배할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유일’한 인류로 인정받는 것이죠.”

“허…”

“아버지는 지켜보기만 하면 됩니다. 아, 지금 막 저들에게 절망을 안겨주려 하려군요.”

자그마한 소녀로 보이는 악마.

그녀를 처음 마주했을 때 느낀 감정은 의문이었다.

보통의 악마라면 본디 사악하거나 위압감 있는 모습으로 나타는 것이 맞다.

마수가 그러했고,

마족이 그러했고,

마왕이 그러했다.

‘하지만 간부는 달랐다.’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제 앞에 나타난 간부는 그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주위 모든 것을 압도했다.

남은 길은 굴복하는 것뿐.

소드 마스터급의 경지에 오른 아인시오조차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간부라는 자가 이러한데 이들의 군주인 마왕은 얼마나 강력할까.

아인시오는 그날로 간부와의 계약을 맺었다.

“목표는 저 앞의 인간군.”

‘...저들의 영혼과 육신을 제물로 바쳐. 그러면 너희를 유일한 인간종으로 남겨줄 테니.’

‘아, 그리고 애들 먹을 것 좀 필요하니 미리 바쳐놓고…’

형용할 수 없는 감각이 몸에 차오르지만 당장 느끼는 감각은 희열이다.

왕국 시민들의 3할을 먹은 마수가 적군의 기사단장과 마법사를 물어뜯는다.

자신조차 이길 확신이 안 서는 지옥불 늑대.

늑대는 무모하게 달려드는 하나의 기사단장을 집어삼켰다.

‘고작 저딴 놈들에게 패배감을 느꼈다니.’

이제 곧 악마 간부의 마수들이 저들을 씹어삼킬 거다.

그런 뒤 운 좋게 힘을 얻은 신의 사도란 것들도 다 뭉개지겠지.

“멍청한 브아타. 네놈은 내 손으로 잡고 싶었거늘.”

각 왕국의 유일한 소드 마스터급 강자.

때문에 그와 무기를 맞대고 싶었으나 지금 이 상황이라면 굳이 나서줄 필요가 없다.

“저렇게 죽을 테니.”

브아타는 뭔가 고민하는가 싶더니 어린 사도의 말을 듣고는 창을 들고 달려들었다.

듣자 하니 새롭게 소드 마스터가 된 녀석이라고 하는데…

‘역시 사도 놈들은 재수가 없어.’

남의 힘으로 강해지고는 기고만장하다니.

“주제를 알아라…?”

오만에 차있던 아인시오의 눈이 부릅떠졌다.

지옥불 늑대가 지고 있다.

작은 집채만 한 늑대가 분열된 창에 의해 유린당한다.

주위 버러지들의 협공의 기세를 못 펼치고 있다.

“그럴 리가 없어! 당장 놈들을 찢어!”

악마는 마치 그 말을 듣기라도 한 듯 거인을 소환해 기사단장 하나를 더 죽였다.

아인시오는 쾌재를 불렀으나 이내 다시 표정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

순식간에 늑대와 거인. 둘 모두를 죽였다.

창은 이제 악마를 노리고 있다.

머리끝까지 차있던 희열이 식어가던 찰나.

“...!”

“무, 무엇이냐! 저건!”

끔찍한 마기의 파도와 함께 검붉은 폭풍이 몰아쳤다.

아인시오의 희열이 다시 차올랐다.

곰인형이 검을 한번 휘두르자 뒤편에 있던 기사단장들과 마법사들의 모두 날아가고 브아타의 왼팔이 날아갔다.

압도적인 강함.

그는 고양감이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그래, 이게 맞지.”

저런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인류를 적대할 만큼의 값어치가 없지 않겠는가.

비록 기분이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했지만 끝이 올라갔으니 충분히 만족할 만한 정경이었다.

“헌데… 저 꼬맹이 둘은 안 싸우는 건가?”

처음부터 싸우지 않고 뒤쪽에 가만히 있는 두 사람.

별빛의 성녀와 그녀의 수호기사인 검신의 사도.

“쯧, 딱 봐도 겁먹은 거겠지.”

신의 힘만을 타고나 수련을 할 필요도 없이, 실전을 겪지도 못하고 전쟁에 투입되니 당연히 얼어붙을 수밖에.

아인시오는 흥미가 떨어진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남은 건 악마의 학살뿐.

예언의 성녀나 마탑주가 찢기는 걸 보고 싶긴 하나 이쪽도 할 일이 제법 있으니 이쯤에서 움직여야 한다.

그는 비슐과 함께 안으로 돌아가자 그가 보지 못한 별빛에서 무언가 시전 되고 있었다.

***

그때의 감각을 재현한 기술.

나도 모르는 감각.

하지만 익숙한 감각.

기억을 일깨우고 기술을 재현하기에 위해 아주 잠깐의 집중이 필요했다.

이런 냄새와 소음, 시야가 보이지 않는 차단된 공간이.

나는 모두에게 시간을 끌어줄 것을 요청했고 하페의 도움을 받아 모든 것이 사라진 공간을 확보했다.

가장 먼저 소리가 사라진다.

“───!”

“──!!”

그다음은 시야.

그다음은 냄새.

다음은…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나라는 존재 자체의 감각도 희미해진다.

감각이 희미해지니 목표의식도 희미해지고 달아올라있던 육신과 정신 역시 무의미해진다.

이대로 잠에 빠져들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상태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기 가장 좋은 상황이다.

‘떠올리자. 그때의 감각을.’

몸을 움직인다.

움직이는지 알 수 없다.

그저 움직였다고 믿고 행한다.

늘 사용하던 검을 움직이고 몸을 지탱할 다리 역시 제 자리를 찾는다.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아냐.’

이게 아니다.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지만 내가 행한 것은 분명 평소의 그것.

그때 했던 기술과 전혀 같지 않다.

‘겉치레는 버린다.’

검을 떨궜다.

늘 배워왔던 자세나 움직임 역시 버렸다.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새롭게 잡는다.

‘검로는 두개. 자세는…’

검이 두 개다.

하나가 아닌 두 개.

‘검이 없다면…’

파아아아…

넘치는 힘으로 검을 만들어낸다.

두 개의 검은 나의 손에 들렸고 육체는 그때의 동작을 천천히 재현해낸다.

모든 것을 가렸던 어둠을 뚫고 희미한 연푸른 빛이 보인다.

검은, 모든 것을 가른다.

이격(二?).

세계는 절단되었다.

***

눈을 떴다.

아니, 눈은 진작에 뜨고 있었으니 감각들이 돌아온다고 해야 맞는 거겠지.

“─아!”

익숙한 목소리.

나는 그 목소리에 반응하는 대신 내가 행한 것을 보았다.

그대로 네 갈래로 쪼개진 곰인형과 악마 소녀.

악마의 육신은 꿀럭 꿀럭 검붉은 피를 내다 이내 허망한 표정과 함께 저 멀리로 흩어져 사라졌다.

성 역시 네 갈래로 쪼개져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 멀리서 허둥지둥 도망가는 비슐군이 보인다.

‘용케 살았네. 나름 조절하긴 했다만.’

“해냈군. 정말 해냈어.”

“...혹시 그거 제가 그런 겁니까?”

“그럴 리가.”

왼쪽 팔이 사라진 브아타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내가 약해서 당한 거다. 방금 너의 기술에 맞았다면.”

브아타는 뒤를 한번 돌아보았다.

이제는 작아진 곰인형과 간부의 흔적.

마지막으로 쪼개진 성을 보고는 희미하게 몸을 떨었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겠지.”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다. 이만한 기술이 절대 쉬울 리가 없지. 오히려 너의 기술은 생각보다 훨씬 더 빨랐다.”

그는 진심으로 감탄한 말투와 표정이었으나 나는 조금의 안타까움을 느꼈다.

‘조금만 더 빨랐다면 좀 더 살릴 수 있었는데.’

앞선 세명은 그렇다 쳐도 나로 인해 하나의 기사단장이 죽었으니까.

그래도 그만한 상대로 하나의 사상자만 나왔다는 것에 위안을 가져야 할까?

브아타는 내 표정을 보더니 쯧, 혀를 차며 창을 붕붕 돌렸다.

“이봐.”

“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우리는 널 기다려줬지만 너만을 바라본 건 아니었다.”

콱.

창이 땅에 꽂힌다.

꽂힌 창 뒤로 부상을 수습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다들 나의 공격을 위해 최선을 다해준 사람들.

그들은 나의 공격의 흔적을 보고는 감탄하고 있었다.

“마왕군과의 전쟁이다. 앞으로 이것보다 배는 더한 사상자가 나올 거다. 그때마다 축 쳐져 있을 셈이냐?”

“딱히 쳐져 있던 적은 없어요. 좀 아쉬운 것뿐입니다.”

“그러면 어깨 펴라. 다들 너 때문에 살은 거니까.”

그는 창을 뽑고는 그대로 사람들에게 돌아갔다.

‘나 때문에 살았다라…’

나는 이제는 아무렇지 않은 손을 만지작거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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