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6화 〉 26. 인류의 적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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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장급 5명.
상급 마법사 이상 37명.
그 이하 마법사 2000명 추정.
일반 기사와 정예 병사 3할 추정.
“일반 병사 5할 추정…”
촤락.
나는 전투 현황의 내용을 보고받았다.
나름 빠르게 악마를 잡아내고 예언의 성녀 역시 빠르게 대처했다고 생각했지만, 예상보다 사상자가 많았다.
악마가 돌려준 마법 때문이었다.
‘지상과 하늘의 합작은 피조물의 세계를 무너트리는 마법이네. 아무리 뛰어난 육신을 가졌다고 해도 세계가 무너지면 버틸 수 없지.’
‘하물며 그러한 육신을 그 순간 가졌더라도 제힘이 아니라면…’
에린 론브디아를 제외한 가장 많은 인원을 구해낸 녹색 마탑의 마탑주는 그리 말했다.
그는 부상자들을 돌보며 다음 전투를 준비하고 있다.
“다음 전투라…”
나는 무너진 비슐의 성벽에 걸터앉아 생각했다.
비슐을 공략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이미 나의 공격으로 대부분이 무너진 상태였고 마탑주와 소드 마스터급 두 명.
그리고 수많은 사도들이 치고 들어오는 걸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비슐은 고작 1시간 안에 모든 곳이 함락당했고 왕인 비슐과 그의 아들인 아인시오를 붙잡았다.
아인시오는 현실 부정을 하며 그를 포박하던 병사 넷을 죽이고 마기를 내뿜었지만 끝내 예언의 성녀에 의해 제압당해 참수되었다.
비슐은 아론디의 후계자가 처리했고.
‘이 와중에 정치 놀음이라도 하겠다는 건지 뭔지.’
어전에서는 그럴듯하게 비슐의 목을 치겠다고 해놓고선 상황이 다 정리되고 나서야 그제야 숟가락만 얹은 셈이다.
물론 다른 왕국들이 조금 반발하긴 했으나 아론디는 애초부터 그 크기가 거대한 왕국이다.
이곳의 핵심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나와 에린이 아론디 출신이니까.
반발은 금세 잦아들었다.
“어때? 이제는 좀 괜찮아졌어?”
“조금은.”
풀석.
하페는 내 옆에 앉았다.
사라졌던 해가 조금씩 떠오르고 주황색의 햇빛이 우리의 눈을 툭툭 건드렸다.
해가 떠오르고 있다.
스윽. 하페가 무언가를 내민다.
“먹을 거. 너 지금껏 밥도 안 먹었잖아.”
“...어차피 안 먹어도 멀쩡한데.”
마력과 신의 힘이 넘쳐나는 육체는 인간의 필수 요소인 식사나 수면이 필요치 않게 되었다.
그런 것이 없어도 얼마든지 육체는 유지되니까.
하페는 내 볼을 꽈악 꼬집었다.
무지 아팠다.
“잔말 말고 먹어.”
“그래.”
이건… 쿠키인가.
나는 작은 검은 알갱이가 들어간 쿠키를 먹었다.
바삭하고 터져나감과 동시에 알갱이들의 달콤함이 느껴졌다.
뭔가 멍했던 정신에 생기가 도는 것 같다.
나는 반쯤 베어물은 쿠키를 입에 넣었다.
맛있네.
“옛날 생각난다. 쿠키 많이 먹었는데.”
“맞아. 그래서 가져와봤어. 어때, 맛있어?”
“맛있어. 그때보다 더 맛있는 거 같아.”
“당연하지. 그때는 초콜릿 같은 게 없었잖아. 조미료도 안 들어갔고.”
태양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다.
태양이 나를 비추고 뒤이어 연기가 피어오르는 비슐 역시 비추어준다.
“......그러게.”
쿠키는 여전히 맛있었다.
***
“자네! 하하! 반갑네, 반가워.”
하페와의 대화를 끝으로 다음 전투를 위해 회의장으로 향하던 중 누군가에게 붙잡혔다.
과하게 과장된 반응이지만 귀품 있는 복장과 고유한 외모는 아론디의 사람이라면 대부분 알 수 있는 인물이었다.
“하츠브루 공작님?”
“기억하는군! 맞네. 황제 폐하의 장남이자 공작가를 이끌고 있는 리퍼드 아론디라고 하네.”
나는 그의 소개에 고개를 끄덕이다 순간 멈칫했다.
‘장남? 그런데 왜 지금 황제 대리가 후계자를 하고 있는 거지’
보통 장남이라면 후계의 1순위를 차지할 텐데.
무엇보다도 황실에서 보았던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조금. 아니, 많이 과장되었다고 해야 하나.
리퍼드 역시 그런 점을 눈치챘는지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미안하군. 혹시 시간이 된다면 잠깐 얘기를 나눌 수 있겠는가?”
“음, 5분 정도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어차피 10분 일찍 가기로 했으니.
“그렇군, 그럼 이쪽으로 잠시.”
나는 리퍼드의 말을 따라 소리 차단 마법이 걸린 방으로 들어갔다.
다 부서진 비슐에 이런 게 있는 걸 보아하니 아마 미리 준비해두었겠지.
방에 들어선 리퍼드는 바로 말을 꺼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나는 황제가 될 생각이다.”
“그러시군요.”
“...놀라지 않는 건가?”
“놀라야 하는 겁니까?”
황제가 누가 되든 나는 관심이 없다.
나는 지금의 후계자의 편도 아니고 눈앞의 리퍼드의 편도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속한 데브론 후작령이 편이냐고 물으면 그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애초에 신전은 왕국과 별개 된 권력층이고 ‘신’이라는 위대한 존재가 뻔히 있는데 그보다 아래인 왕을 따르는 사도는 몇 없었다.
황실도 그것을 알기에 국력과 정치적인 이유를 용도로 그들의 권력을 인정해 주었고.
물론 신전의 힘이 약하면 왕국에 휘둘릴 수 있겠지만 별빛의 신전은 제법 힘이 있는 신전이었다.
리퍼드는 자신의 말에 실책한 듯 고개를 숙였다.
“내가 말을 잘못했군. 그대는 누구의 편도 아닐 테니.”
그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듯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어 번 치더니 이내 나를 바라보았다.
“그대는 마왕을 잡을 생각이지.”
“그렇습니다.”
“아론디 역시 그러하다. 인류의 적이자 세계의 적인 마왕 토벌을 위해 온 힘을 쏟아부을 예정이다.”
“네.”
“다시 한번 말하자면 ‘아론디’는 마왕 토벌을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그렇군요.”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가?”
“아닙니다.”
잘 이해했다.
말에 있는 속 뜻 역시.
‘지금의 후계자 역시 마왕성으로 보내겠다는 거겠지.’
그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죽음에 처한다면 다른 후계자가 황위를 이어야 하니.
“무슨 소리인지는 알겠습니다.”
그러나 리퍼드의 말은 들어줄 수 없을 거 같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내려다보았다.
“저와 이곳의 모두는 마왕 토벌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겁니다. 그리고 살 수 있다면 살아남아야겠죠.”
그 어느 누구도 죽는 건 원치 않으니.
“...오해가 있는 것 같군. 나는 누구를 해쳐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비슷한 것 아닙니까?”
“아니다. 단지 최선을 다하라고만 하였다. 다른 누군가를 위하는 것이 아닌 오로지 마왕 토벌을 위해서.”
최선이라.
나는 피식 웃었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죠.”
문을 나섰고 아직 닫히지 않은 문에서는 조금 후회하는듯한 그의 모습이 비쳤다.
***
회의가 끝이 나고 우리는 당분간 정비를 하기로 했다.
본래 인간군의 목표는 바다와 비슐.
두 가지 방향으로 동시에 진출해 위아래로 마왕성을 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다 쪽에 헌신의 성녀를 비롯한 중요 인력이 빠지면서 동쪽의 암흑산을 포함해 세 가지 방향으로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비록 피해가 있었으나 우리 쪽은 다른 방향보다 훨씬 빨리 길을 뚫어냈고 기다리는 일만 남았는데…
“...뭐? 바다가 전멸?”
비슐을 함락시킨지 열흘째 되는 날.
바다 쪽 인원이 전멸당했다.
***
바다가 전멸하기 이주 전.
또 다른 예언의 성녀, 오른 아토브는 헌신의 성녀가 떠나고 난 뒤 수차례의 질문을 받았다.
‘바다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악마라도 나오기라도 한답니까?’
‘바다에 있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혹시 예언이 있다면 알려…’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전부 모호했다.
그녀가 본 미래는 전부 불확실하거나 아직은 보이지 않는 것들 뿐이었고, 헌신의 성녀가 떠난 이후에 미래는 더 불투명해졌다.
결국 정확한 정보를 얻지 못한 바다 쪽 군사들은 찝찝한 마음을 감추며 출정을 시작했다.
걱정이 되긴 한다만 그렇다고 다른 쪽으로 선회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양옆은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두 암흑산.
다른 하나는 같은 인간인 비슐이지만 방향도 정반대고 그쪽은 이미 포화되어 합류할 만한 명분이 없었다.
결국 이러니저러니 해도 바다 쪽은 위험한 적이 없는 건 사실이니까.
“출정!”
지평선이 펼쳐진 바다를 스무 척의 배가 가로지르며 항해를 시작했다.
가운데 중요 인력이 있는 배 두척을 중심으로 열 여덟 척의 배가 둥글게 움직인다.
그들의 앞길을 막는 건 없었다.
가끔 바다 마수가 배를 갉아먹으려 들지만 미라크 왕국의 배는 아주 튼튼했고 배에 타있는 마법사들은 마수의 습격을 차단했다.
“별일 없구만.”
“그렇군. 역시 괜한 걱정이었소.”
“예언의 성녀는 이런 이유로 말을 안한 건가.”
그렇게 출정 3시간째.
긴장이 풀어지고 마치 여행이라도 온 것 마냥 헤픈 소리가 많아질 때쯤.
우우웅~
“뱃고동?”
“또 다른 누군가가 항해한다는 소식이 있던가?”
“그럴 리가요. 해로는 우리의 허락 없이 그 누구 도─”
모두의 말이 멈췄다.
촤아아악!
깊은 바다를 해치고 올라온 성 크기의 거대 범선이 올라와 그들의 앞에 섰다.
반투명한 푸르른 거선.
그 크기 차이는 어린아이와 거구의 남성을 비교하는 것. 그 이상의 차이가 났다.
[이, 인… 간… 바다를… 넘보느, 냐…]
모두의 고막을 뚫고 들어온 암울한 진언(?).
이윽고 가장 선두에 서있던 두 개의 배가 박살 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