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87화 〉 26. 인류의 적 (6) (287/318)

〈 287화 〉 26. 인류의 적 (6)

* * *

***

바다에는 신이 있다.

아니, 신이 있었다.

[인간.]

위대한 존재.

모든 바다를 지배하에 두는 바다의 신. 바다 그 자체.

신들 중에서도 높은 격을 보유했던 그녀는 인간을 사랑했다.

[인간…]

자그마한 인간들이 자신의 몸을 타고 지나가는 것을 허락해 주었고 이 세계의 사악한 존재인 마수들의 침입 역시 막아주었다.

바다는 항상 평화로웠고 바다 사람들은 위대한 존재, 바다의 신을 찬양했다.

[......]

그래, 정확히 칠백 년 전까지.

***

“배다! 악령선(???)이 나타났다!”

두 개의 배가 침몰함과 동시에 그 뒤에 위치한 바다 왕국들의 배가 급히 뱃머리를 돌린다.

악령선(???).

바다를 인접한 왕국의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배의 형태를 띤 사악한 괴물.

그러나 널리 퍼진 소문과 달리 그것을 보았다는 사람은 극히 드물어 어린아이에게 겁을 주는 동화 형식으로만 남아있었다.

말을 듣지 않는 아이에게 무시무시한 것이 나타날 거라고.

우우웅~

“...미친.”

그 말을 틀린 말이 아니다.

[...부질 없, 다.]

‘바다’에게 있어 모두가 어린아이나 마찬가지니.

“뱃머리를 돌려라! 공격이 온다!”

중앙에 위치한 미라크의 해군장은 배를 통솔했다.

그의 특수한 마력인 바다의 마력이 움직였고 배에서 쏘아진 반투명한 공격은 애꿎은 바다를 치며 거대한 해일을 일으켰다.

“마법사!!!”

“알고 있소!”

배를 감싸듯 주황빛의 보호막이 둥글게 쳐졌다.

상급 마법사들이 백이 넘는 인원이 달라붙어 만들어낸 고도의 방어막.

해일은 철썩거리며 보호막을 두들겼으나 다행히 보호막을 뚫지는 못했다.

“공격해라!”

이윽고 준비된 상급 마법사들이 마법을 쓴다.

상대는 알 수 없는 물로 이루어진 배.

때문에 대지 속성의 마법을 주로 썼다.

하나 하나가 엄청난 크기의 마법.

[.....]

물론 인간의 기준에서 말이다.

마법은 그대로 배의 겉표면을 건드리고 바다로 추락했다.

기사들이 쓰는 검기도 마찬가지.

사람들은 거대한 적에 전의를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해군장! 저것은 무엇이오!”

“...악령선입니다.”

“악령선?!”

힘을 꽤나 쓰는 권력자들이 의문을 가졌다.

비록 자신들은 바다 왕국이 아니지만 이곳에 한, 두 달간 지내보면서 많은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그중 하나는 전래 동화처럼 내려오는 악령선이다.

“...그게 정말 실존했던 거였소?”

“바다의 신전은 뭘 하는 겁니까! 저런 괴수가 바다를 헤집고 다니는데!”

“......”

수많은 사람들이 해군장을 닦달 했으나 그는 곤란한 표정으로 눈을 감을 뿐이었다.

나타나지 않길 바랐지만 ‘저것’이 나타난 순간 벗어날 방법은 없다.

‘이곳은 그녀의 손바닥 안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는 눈을 뜨고는 혼란스러워하는 이들을 자신의 마력으로 휘잡았다.

“진정하시오. 이대로 있다간 모두가 죽으니 빠져나가야 합니다.”

“어, 어떻게 말이오.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배들이 거대한 공격에 의해 항해를 멈추고 얼어붙었다.

그 때문인지 아직까지는 공격하지 않는 악령선.

하지만 만일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다시 공격을 시작할 것이다.

그는 배를 세 부대로 나누었다.

“지금부터 전력을 다해 다른 세 가지 방향으로 도망칩니다. 악령선은 그중 하나를 쫓아가겠지요.”

“잠만 그 소리는.”

“희생은 불가피합니다.”

수염난 귀족 하나가 해군장의 어깨를 붙잡았지만 그는 냉정한 눈으로 악령선을 바라볼 뿐이었다.

결국 짧은 회의 끝에 해군장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한 번에 치고 나가야 합니다. 누구 하나 늦게 간다면 몰살이니.”

***

“성녀님.”

“해군장이시군요.”

예언의 성녀, 오른 아토브는 자신을 찾아온 해군장을 바라봤다.

“할 말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미래는 어떻습니까.”

“많이 노하셨습니다.”

그녀는 악령선을 보았다.

암울한 뱃고동 소리는 우리의 사기를 갉아먹고 자신의 존재감을 더욱 드러낸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그 소리가 다르게 들렸다.

“...슬퍼하고 계시고요.”

“바다의 마음을 돌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날로 바다와의 인연을 끊었으니.”

“왠지 저에게 온 이유를 알 것 같군요.”

악령선은 단순한 괴물이 아니다.

거대한 몸집은 그녀를 상징하는 ‘바다’의 일부일 뿐.

실체는 배 안에 있다.

“염치가 없다만 그녀를 만나 시간을 끌어주십시오. 그 사이 마왕의 영역에 도달하겠습니다.”

“...제가 가도 설득하지 못할 것입니다.”

“압니다.”

하지만 인류의 미래를 위해.

“부탁드립니다."

미래를 보는 사도로서,

인류의 수호자로서.

그녀의 친우로서.

‘희생을.’

오른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해군장은 허리를 90도로 숙이고는 자신의 배로 돌아갔다.

그렇게 한참을 눈을 감고 있던 오른은 거대한 바다를 보았다.

우우웅…

“가엾은 이.”

그녀의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배들의 항해가 다시 시작되었다.

노를 젓는 노예들은 손이 빠질 듯이 노를 저었고 마법사들은 바람 마법을 극한까지 사용해 그 자리에서 벗어난다.

우우웅~

배들이 움직이자 다시 뱃고동을 울리는 악령선.

악령선은 세 갈래 나누어진 배들을 보았다.

먼저 앞서나간 두 부류의 배들과 달리, 눈치를 슬금 슬금 보며 악령선이 몸을 돌리자 그제야 빠져나가는 다섯 척의 배들.

남을 미끼로 도망치려는 부류.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자들이었다.

[...오만, 하구나…]

“뭐, 뭐야!”

“크라켄이다!”

물로 된 거대 촉수가 배들을 단숨에 집어삼켰다.

그들은 마법 방어막을 통해 어떻게든 막아보려 애썼지만 배 자체가 가라앉는 것 까지 막을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심해 깊은 곳까지 가라앉아 모두 죽음을 맞이했다.

“...서, 성녀님.”

“가세요.”

“하지만 이대로…”

“어차피 있어도 개죽음입니다. 내가 설득해 볼 터이니 여러분은 기다리십시오.”

예언의 성녀의 배가 천천히 악령선을 향해 다가간다.

악령선은 배를 공격하지 않고 그들을 지켜보았다.

모든 공격이 통하지 않았던 악령선의 표면은 흐르는 물처럼 얇아졌다.

스르륵…

자연스레 안쪽을 통과하는 성녀의 배.

“여긴…”

“텅 비었군요.”

“마치…”

중요 인사가 하나도 없는 배의 선원들은 푸르른 막이 신기한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악령선의 안쪽은 힘의 결정체나 다름없었으니까.

[...예언.]

그때였다.

[오래된 친우여…]

공간 전체를 울리는 목소리.

선원의 대다수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지만 예언의 빛으로 가득 찬 오른은 멀쩡히 그녀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녀는 몸을 천천히 숙여 위대한 존재를 마주했다.

“바다시여. 당신의 친우. 예언의 신의 사도, 오른 아토브입니다.”

여신의 뜻을 거절하고 스스로의 격을 격하시킨 자.

인간계에 남은 유일한 신.

‘신들의 배신자.’

***

바다는 행복했다.

어린 인간들은 너무 귀여웠고 자신의 몸을 타고 여기저기 오가는 것이 참으로 대견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거 중증이야.]

[뭐래. 망할 예언자 놈아.]

그런 바다에게 접근한 건 빛으로 된 예언.

자신과 같은 격이 높은 신 중 하나였다.

태양처럼 밝은 빛은 큭큭 웃었다.

[이따가 해적들이 네가 아끼는 해군들 다 박살 낼 예정인데.]

[아! 스포일러 하지 말라고!]

[에~ 스풔일뤄 하지멜레궈~]

[...죽인다.]

[야, 야! 잠만!]

[이런 건 예상 못했니?]

[미친놈, 아니 년아!]

오래된 친우와 자신이 아끼는 이들.

비록 아이들은 자주 싸우긴 하나 원래 필멸자들은 빨리 죽고, 또 빨리 태어난다.

바다에겐 그들 하나하나보다는 그들 ‘전체’를 보는 것을 더 즐거워했다.

바닷물에 흠씬 젖어 몸이 퉁퉁 불어 오른 예언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꺼냈다.

[이걸 말하러 온 게 아닌데.]

[?]

[마왕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할 모양이야.]

투욱.

바다는 어찌나 놀랐는지 자신의 일부를 떨어트렸다.

그에 물폭탄이 사람이 없는 빈 땅 한가운데 떨어져 호수가 생기긴 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여신께서 우리를 불렀어.]

[...우리가 직접 마왕과 싸우는 건가?]

[아니, 마왕은 여신께서 직접 상대하신다.]

[뭐?!]

여신께서는 강하지만 상대는 창조주의 최고의 걸작이자, 최악의 작품이라고 불리는 마왕.

제아무리 여신이라고 해도 마왕을 홀로 상대하는 건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가 사도를 만들라고 하더라고.]

[사도?]

[그래, 사도. 인간들에게 힘을 주고 우리 대신 싸우라 하는 거지. 마침 너 인간들을 좋아하잖아?]

우리는 사도를 만들고 그 사도들은 마왕의 전력들을 깎아내며 마왕을 약화시킨다.

신은 마왕과 상성이 심각하니 오히려 그에 반대되는 상성을 가진 인간을 이용하는 것.

잘만 한다면 마왕을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으음… 좋아! 마침 마음에 드는 인간이 몇 있었어.]

그렇게 그녀의 사도가 처음으로 탄생했다.

그녀의 몰락의 시작과 함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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