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9화 〉 26. 인류의 적 (8)
* * *
***
바다 쪽 인원이 전멸 당한 소식이 들려온 지 일주일.
헌신의 성녀를 포함한 동쪽 암흑산 인원이 도착했다.
암흑산 쪽은 사실상 버리는 인원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세계를 통틀어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무력을 가진 헌신의 성녀가 있었기에 그들은 별다른 피해 없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엄청 고생했나 봐.”
물론 아예 피해가 없진 않았지만.
그들 중 일부는 이곳의 중요인사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다들 굉장히 지친 모습이었다.
치료 과다의 증거로 피부의 색이 짙게 물들었고 힘없이 흐물거리는 모습.
헌신의 성녀 역시 다크서클이 짙었지만 서있는 것 자체는 무리가 없었다.
“오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아프로님.”
“그쪽이 예언의 성녀구나. 바다가 전멸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렇습니다. 모든 인원의 생명 흔적이 끊겼고 바다의 미래 역시 생존자를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아둔한 것들.”
헌신의 성녀, 아프로 테이라는 혀를 차더니 손을 휘저었다.
축객령을 받은 에린 론브디아는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신의 사도끼리는 직위의 우선이 없으나 눈앞의 여인은 그런 규율조차 무시할 정도의 위치와 업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퀭해 보이던 적색의 눈동자가 동글게 떠지고 어느새 발걸음은 내 쪽을 향했다.
“검신의 사도.”
“예, 검신의 사도. 김윤입니다.”
“오…”
아프로는 갑자기 생기가 돈 듯 멋대로 내 팔뚝을 만지작거렸다.
사심이 담겨있다기보다는 뛰어난 조각품을 만지는 듯한 태도.
한참을 살피던 그녀는 옆에서 느껴지는 미미한 살기에 손을 떼었다.
…하페가 아프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크흠, 미안하구나. 내 너의 힘을 관조하다 실수를 했다.”
“아닙니다. 그보다 바다가 전멸 당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까?”
“알다마다.”
그녀는 적색… 이라기보다는 분홍색에 가까운 기운을 흘렸다.
“바다와 인간들의 상관관계는 얼추 알고 있었다. 신과 인간. 둘 사이의 믿음과 힘의 관계.”
마수에 대한 적대감이라기에는 조금은 익숙한 느낌.
“전에는 단순한 추측이었다만, 직접 보니 확실히 알겠더구나.”
“그렇다면 바다 쪽의 마수가 이쪽으로 치고 올 가능성은 없습니까?”
“없다. ‘그것’은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으니.”
이미 벗어날 정도의 이성이 없으니까.
“걱정 하지 않아도 문제가 없을 거다.”
“으흠… 알겠습니다.”
“그대는 앞서 다가올 마왕 토벌에만 집중해 주면 된다. 그대의 연인과 함께.”
아프로의 말에 살짝 불편해 있던 하페가 번뜩였다.
그러나 말에 놀랐다기보다는 자신을 불렀다는 것에 놀란듯했다.
나나 하페는 이미 미래를 약속한 사이고 그런 호칭 역시 익숙하니까.
아프로는 시시해진 듯 고개를 저으며 반쯤 메고 있던 적색의 로브를 둘렀다.
“조금 쉬겠다.”
‘예. 나중에 뵙겠습니다.”
“그래.”
***
바다 쪽의 전멸은 인간군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희생은 불가피한 일.
마왕을 잡기 전까지 그들은 멈추지 않고 나아가야 한다.
“윤아!”
하페의 별빛이 내 몸에 스며들고 나는 무형의 검을 휘두른다.
연푸른 검강은 그대로 쏘아져 다가오는 수백의 마수를 양단했다.
터져 나오는 검붉은 피.
크롸라라라─!!!
마수가 죽은 것이 분한지 10M는 족히 넘을 것 같은 거대 마수가 쿵쿵 거리며 달려온다.
“호호호! 그쪽이 마수를 참살하고 다닌다는 인간이군요!”
그런 마수의 어깨에 타고 있는 머리가 곤충인 여성형 마족.
머리만 때고 본다면 경국지색으로 보일 법한 외형을 가지고 있지만 역시 머리가 가장 큰 흠이다.
“으. 징그러.”
“징그럽다니, 미를 보는 눈이 없군요!”
상당한 고위 마족인지 그녀의 손길에 작은 메뚜기 떼 같은 것들이 수천, 수만 마리가 소환되었다.
제아무리 마력이 뛰어난 기사라 한들, 접근만 해도 그대로 갈려버릴 것 같은 상황.
그러나 나는 무덤덤하게 무형의 검을 돌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일격.”
콰앙! 터져나간 폭파음과 함께 수천의 매뚜기때가 소멸되고 뒤에 있던 거인 마수의 상반신을 날려버렸다.
“무슨…!”
거기에 그치지 않고 마족은 그대로 튕겨나가 수십 미터를 날아가고 나서야 간신히 멈출 수 있었다.
끄으윽 거리며 완전히 갈려나간 얼굴을 더듬더듬 만지는 모습.
“가, 감히 마왕님께 하사받은 얼굴을!! 이 미학도 모르는 녀석아!!”
녀석은 화를 씩씩 내며 평범한 이라면 바로 즉사할 정도의 마기를 내뿜었지만 늘 그렇듯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이제 좀 보기 편하네.”
“죽어!”
송곳처럼 날카로워진 왼쪽 팔.
뭘 하나 싶더니만 팔은 어느새 본래의 육신에서 벗어나 나에게로 쏘아졌다.
제법 기세가 있는 공격.
내가 막아서려고 하자 마족이 웃기 시작했다.
“캬하하하! 그건 나의 영혼을 걸고 만들어낸 절대 저주다. 조금만 접촉하기만 해도 피부가 썩어가며 곤충들의 적대를 받고 불면증에 시달리며 모든 불행과 악운이 너에게로 향할─”
“안 맞으면 되잖아.”
위에서 쏟아진 별빛 세례.
별빛은 허공에서 팔의 쇄도를 막고 그대로 짓눌렀다.
팔은 잠시 반항하다 그대로 푸시시 하는 소리와 함께 움직임을 멈추었다.
“......”
“하~암. 윤아. 여기도 별게 없는 모양이야.”
마왕성을 가야 뭐가 나오겠는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비슐과의 전투 이후로 특별히 강한 마족을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강해진 탓도 분명 있겠지만 그때의 간부가 예외라는 건지 마왕성 근처까지의 마족은 별 볼일 없었다.
“나, 날 무시 하는거야?!”
“근데 다른 쪽은 어떻게 하고 있어?”
“에린 쪽은 늘 똑같고 최근 합류한 헌신의 성녀가 정말 강한 모양이야. 가는 곳마다 마족이 몰살당한다나 뭐라나. 마족이 불상하다는 얘기까지 나오더라고.”
“이봐!”
“창신의 사도는 한쪽 팔 없이도 잘 싸우더라.”
“그 사람이 잘 싸우긴 하지.”
“야! 내말 안 들리냐!”
“그럼 빨리 정리하고 돌아가자. 슬슬 진입할 때가 됐지.”
마왕성 주변을 정리한지 어느덧 10일.
대부분의 정리가 끝이 났으니 슬슬 마왕성으로 진입해야 한다.
“그래!”
“이게 진짜! 나의 진정한 힘을 보여주쿼륵?!”
아까까지 날벌레처럼 신경을 건드리던 마족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간다.
별빛과 별빛이 엮여 만든 고도의 원형 마법.
‘별의 응집.’
“들어가.”
끼아아아─…
토옥.
“잡았네?”
“잡았어.”
나도 나지만 하페도 제법 강해졌다.
“돌아가자.”
***
마왕성은 거대한 하나의 탑과 같다.
중간중간 구조물과 기다란 건축물들이 붙어있긴 하지만 기본 토대는 기다란 원형의 탑이니까.
“마왕의 영지는 평범한 이의 출입을 금하오. 적어도 대마법사 수준의 강자들만이 탑에 진입할 수 있소.”
녹색 마탑주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마법으로 이루어진 모형 마왕성을 가리켰다.
마왕성 입구 근처에는 제아무리 뛰어난 기사나 마법사라고 해도 녹아내릴 정도의 마기가 들끓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간다면 더 심해지겠지.
“혹시 날아서 가면 안 되는 겁니까? 굳이 입구로 들어갈 이유는 없지 않나요?”
푸른색의 둥근 알 같은 것을 허리에 잔뜩 달고 있는 여자가 손을 들고 말했다.
웬 특이한 투명한 것을 이마에 쓰고 있었는데 가진 힘 자체는 그다지 강해 보이지 않았다.
‘...여긴 소드 마스터급만 앉을 수 있는 회의장인데?’
마탑주는 얇은 지팡이를 탁 치며 여자를 돌아보았다.
“그대는 새롭게 합류한… 그.”
“레이나.”
“레이나 양이군. 마도 공학이라고 했던가.”
‘마도 공학이라면… 서쪽 암흑산 아닙니까?’
‘맞을 걸? 혼자서 서쪽산 인원을 이끌고 왔데.’
‘대단한 친구인걸. 상급 마법사 수준처럼 보이는데 말이지.’
회의장의 뒤편.
전략관과 보조를 돕는 인원들이 웅성거렸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한창 주변을 정리하는 동안 서쪽의 인원이 왔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기도 했다.
워낙 현실감 없는 이야기라 대충 흘려넘겼는데.
“확실히 그 마도 공학이라는 것은 학자로서 탐구할 만한 내용이긴 하군. 전쟁이 아니었다면 당장 연구에 들어갔을 터인데.”
“대마법사인 마탑주님의 비하면 별거 아닌 마법입니다.”
“너무 그러지 않아도 되네. 그대의 실력으로 인간군의 전력이 더욱 강해졌으니.”
마탑주는 허허 웃었고 다른 이들 역시 레이나라는 새로운 강자를 주목했다.
‘...흐음.’
“그래, 우선 자네의 말을 대답해 주자면 날아서 올라가는 건 불가능하네. 마왕의 탑은 마왕의 권능으로 만들어진 능력의 매개체. 마왕을 죽이기 전까지는 밖에서 뚫는 게 불가능 하지.”
“대마법으로도 말입니까?”
“과거 여신께서도 온 힘을 다해서 간신히 구멍을 낸 사례가 있긴 하나... 그건 여신님이시기에 가능했던 일이지.”
우리로선 불가능한 일이야.
확실히 마탑주의 말이 맞다.
마왕의 탑은 절대적인 권능이고 신은 커녕, 신의 사도의 힘을 받아 싸우는 우리가 탑을 뚫을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정말 그런가?’
나는 허리춤에 걸린 검을 만지작거렸다.
부상을 입은 소드 마스터에게 넘겨받은 명검.
어쩌면 가능 할지도 모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