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90화 〉 26. 인류의 적 (9) (290/318)

〈 290화 〉 26. 인류의 적 (9)

* * *

***

“어딜 갔다 오신 거예요!”

“할 일이 좀 있어서.”

나는 막사 안에서 레이나를 만났다.

지금의 ‘내’가 아닌 목재인형에게 분쇄당했던 마법사의 육체로.

이번에는 튼튼히 설계했으니 전처럼 허무하게 잘리는 일은 없겠지.

…사실 그 인형이 미친놈이지 내가 약한 건 절대 아니다.

‘그 공격은 설산의 사냥꾼에서도 보지 못한 수준이니까.’

물론 설산의 사냥꾼의 초월자들은 게임의 규칙에 의해 힘과 격이 감소한 상태였지만.

“말씀하신 건 다 이행했습니다!”

레이나는 에헴! 거리며 푸르른 장치 하나를 보여주었다.

설계도와 필요한 재료들을 내어주어 만들어진 장치.

푸르른 선이 가운데 에메랄드빛 보석에 엮이듯 둥글게 말아있는 형태로 언뜻 보면 팔찌에 가까운 마도구였다.

“이런 건 처음 봤어요. 제가 모르는 힘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고.”

“너는 할 일만 하면 된다.”

“네에. 그래서 열심히 미친 산을 뚫고 왔잖아요?”

그녀는 구석으로 시선을 힐끔 던졌다.

막사 구석에 놓인 거대한 나무 상자들.

그 안에는 푸른색의 구들이 수백, 수천 개가 들어있다.

마기에 극상성을 가진 신성마력탄.

마력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수류탄이다.

“그런데 정말 문제없는 거예요? 아무리 마법을 걸어뒀다고 해도 이런 무기가 있다는 게 알려지면…”

마력탄을 던질 힘만 있다면 정예 기사도 이길 정도의 강한 무기.

재료는 메티아스의 ‘성신’을 사용했지만 기본은 마력과 마법을 엮어 만든 베이스라 생산에는 문제가 없다.

신성마력탄에서 신성이 빠지는 것뿐.

만일 이 무기의 제작법이 널리 퍼진다면 세계는 더 이상 칼과 창으로 싸우지 않을 거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미 잊었을 테니.”

“...혹시 전쟁이 끝나면 저도 기억을 지우는 건 아니죠?”

“글쎄.”

“진짜요?!”

레이나는 발을 동동 굴렀다.

마법사는 뛰어난 전쟁 병기지만 동시에 미지를 탐구하는 학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청린과 콜트의 오래된 개발을 통해 만들어낸 이 마도 병기는 지금 시대에는 절대 나올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레이나 역시 마도 공학에 조금 발을 들였기에 제작이 가능했을 뿐, 평범한 마법사라면 구현조차 못했겠지.

나는 팔찌 형태의 마도구를 착용했다.

“얼마의 성과를 보이냐에 따라 다르겠지.”

“서, 성과는 충분히 보이지 않았나요?”

“서쪽 암흑산을 이끌고 온 것? 네가 한 건 그저 제작과 마력탄을 던진 것 밖에 없지 않나. 너의 작품이었던 것도 아니고.”

마도구는 빛이 났다.

빛은 엮여진 수많은 선을 타고 흐르며 주위의 힘을 서서히 빨아들였다.

잘 작동되네.

“그래서 대답은?”

“...마왕성 때 보여드리겠습니다. 제 진가를!”

레이나는 자신만만하게 포부를 밝혔고 나는 막사의 천막을 열으며 피식 웃었다.

“기대하지.”

촤악.

“흐음… 슬슬 나갈 때가 된 거 같기도…”

보름달이 뜬 밤.

나는 천막들 사이를 걸었다.

여태까지는 개입을 최대한 자제하고 주변의 정보들을 얻는 데 집중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다.

이미 최강자의 유적의 힘을 얻었고 하페와 나와의 과거 기억도 대충 알아냈다.

나의 개입으로 흘러가는 미래가 달라지긴 했지만 그때의 나 역시 여기까지 도달했다.

조금 더 힘들게, 조금 더 오래 걸리긴 했다만.

“조금 더 지켜볼까.”

이야기의 진행이 계속될수록 기억이 떠오르긴 하나, 책의 내용을 통해 볼 수도 있고 특이점을 이용해 앞 내용을 떠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궁금했다.

‘과연 최강자의 제약이 없어진 김윤은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는가.’

과거의 나는 분명 한번 쓰고 육체가 지치는 쪽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일격과 이격.

최후에는 삼격까지.

한번 한번이 육체와 영혼에 부담이 되었고 그때마다 하페나 주변 인물들에 도움을 받아야 했다.

‘마치 두 번째 시즌을 시작했던 나처럼.’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나와 동일시된 영혼은 더 이상 힘의 부담을 감당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본래의 과거와 맞먹는. 아니, 그 이상의 위력을 뿜어낸다.

“...음.”

이쯤 되니 하페의 오래된 계획의 의미를 정확히 알 거 같다.

최강자라는 거대한 힘을 다를 수 있는 영혼의 안정화.

그리고 믿을 수 있는 아군.

단순히 연인이나 가족을 넘어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배신하지 않고 믿을 법한 아군이 하페에겐 필요했다.

그만한 힘을 가지고도 끝에는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자신만의 편.

‘동반자.’

「▲맹약 」

나는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비록 이 육체에는 없지만 원한다면 언제든 생길 수 있는 문양.

“하페. 나는 잘 모르겠다.”

절대적인 믿음을 얻기 위해 스스로의 기억을 지우고 먼저 믿음을 준다라.

로브를 쓴 나는 그대로 자리에서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하나의 인영이 그가 떠난 자리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

소드 마스터 급 7명.

대마법사 4명.

그 외의 마기를 견딜 수 있는 전력 및 보조 인력 6명까지.

도합 17명이 마왕성으로 진입하기로 결정되었다.

그 외에도 꽤나 많은 전력들이 많았으나 영지를 지키는 인력이나 바다에 그대로 수장된 인원이 제법 많았다.

결국 긁어모은 숫자는 17명이 전부.

나머지는 주위 마왕성을 포위하며 혹시라도 나오는 마수들을 처리하기로 했다.

“그럼. 먼저 길을 열지.”

앞선 녹색, 적색, 청색, 남색의 마탑주들이 동시에 마법을 시전해 길을 튼다.

녹색의 풀들이 바닥에 깔리고 양옆에는 붉은색의 불기둥이 하늘로 솟아오른다.

푸르른 기운이 순식간에 하늘을 메우고 주위를 장악한다.

마지막인 남색은...

‘원래 남색의 마탑주가 저리 어렸나?’

보통의 마탑주는 노인의 모습인 게 일반적이다.

대마법사에 오르려면 재능을 넘어서 오랜 기간 동안 연구를 진행해야 하니까.

의문을 가졌지만 마탑주를 대신해서 온 걸 수도 있고 후계자일 수도 있다.

아마 후자가 맞겠지.

“...?”

하페 역시 고개를 갸웃거리지만 금세 시선을 돌렸다.

남색의 가시는 불기둥을 회전하듯 수천 개가 피어나고 이윽고 네 가지의 대마법은 마왕성 입구 주변을 완전히 정리했다.

끼에에에에…!!

비명을 지르며 사그라드는 마수들.

“진입한다!”

“가자!”

“으랴!”

쌍둥이 소드 마스터. 로그, 로데는 각각 오른손과 왼손의 무기를 들고 빠른 속도로 입구로 들어갔다.

벌써부터 마수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소드 마스터의 검들이 저들을 유린하고 있는 모양이다.

‘쯧. 무턱대고 들어가는군.’

‘아직 어리니 어쩔 수 없지요. 소드 마스터는 하늘이 내린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니.’

‘그게 문제라는 거네. 원래 다 경험과 시간이 쌓여야 유연하게 상황을…’

노인 마탑주들은 앞서나간 이들들을 중얼거리며 들어갔다.

그 와중에 남색 마탑주는 마탑주와 함께 하지 않고 뒤편에 있었다.

아마 다른 이들이 다 들어가면 그제서야 들어갈 생각인듯하다.

“하페. 문제 없지?”

“응.”

하페는 소드 마스터급의 강자까지는 아니지만 마기를 버틸 수 있기에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다.

별빛으로 무장한 하페는 입구에 발을 디뎠고 나 역시 입구를 통과했다.

사아아아…

검은 마기가 내 몸을 훑고 지나간다.

온몸이 찌릿하고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었지만 다행히 별 이상은 없었다.

마기는 통하지 않는 내 몸에 싫증이 났는지 간질간질한 느낌마저 사라졌다.

쿠콰가가강!

퍼어엉!!!

스가가각!

벌써부터 탑 곳곳에서 병장기와 마법 소리가 쉴새 없이 들린다.

군단과도 맞먹는 존재가 11명이나 있으니 일반 마수들은 그들의 공격 한번조차 막아내기 어려웠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공격을 맞고 쓰러지는 것과 더 강한 이를 불러오는 것뿐.

나 역시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대로 베여나가는 열의 늑대 마수들.

마수들은 탑에 퍼진 마기를 이용해 다시 한번 부활했지만.

스걱.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다시 한번 쓰러지는 것 밖에 없었다.

나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넓고 거대한 탑.

탑은 99층으로 되어 있으며 20층까지는 마수들과 하급 마족만이 배치되어 있다.

탑은 20층 단위를 기준으로 강해지며 80층 이상부터는 어떤 마족과 악마가 등장할지 아무도 모른다.

‘...라고 마탑주들은 얘기했지.’

과거 마왕이 정한 능력의 규칙.

마왕의 능력에 대한 일종의 제약이기에 마왕은 이를 어기는 일을 없었다.

다만 문제라 할 수 있는 점은 그때와 달리 지금은 여신도 없고 그 제약을 걸 창조신조차 없다는 점이다.

‘창조신 역시 오래전 자취를 감추었으니까.’

“...우선 40층부터 모여서 가기로 했으니 가보자.”

“응!”

***

“다 죽어라!”

날아가는 둥근 구.

그리고 푸른 폭발.

백청의 빛은 마수에 닿자마자 그대로 터져나가고 마수 역시 마수였던 것으로 바뀐다.

주위에 있는 다른 마수들도 마찬가지.

손에 마력탄을 굴리는 레이나는 저글링 하듯 한 손으로 두 개의 구를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했다.

남들이 보면 위험하니 당장 그만두라고 말할 광경이지만 괜히 마도 공학으로 만든 것이겠는가?

시전자의 의지가 담기지 않으면 마력탄은 그냥 장난감이나 다름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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