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4화 〉 27. 가치있는 선택 (4)
* * *
***
“고민이 많은가 보군.”
마왕의 손이 움직인다.
그의 마기가 같이 움직이기 전, 내가 먼저 선수를 쳤다.
「▼최─ 」
연푸른 힘의 파도가 나를 중심으로 몰아치고 어느새 내 검은 마왕의 목을 향하고 있었다.
마왕은 보이지 않은 어둠 속에서 씨익 웃는다.
검은 어둠을 뚫었지만 마왕은 이미 어둠 속에 없었다.
베그리도와 비슷한 회피 방식.
아마 마왕에게서 받은 능력이겠지.
“하페!”
나는 전처럼 숨은 대상을 찾기 위해 하페에게 별빛의 강화를 부여받은 뒤 두 개의 검을 소환했다.
이번에는 조금 더 날카롭고 정교한 검술.
‘이격(二?).’
네 갈래의 검로. 아니, 그보다 훨씬 많은 검의 선들이 공간 전체를 절단했다.
연푸른 빛이 검이 공간을 긋자 여태껏 멀쩡했던 바닥 타일과 벽면, 천장 등이 미묘한 실선이 새겨지고 그 안에 위치한 마기와 마력 역시 구조를 잃고 바스러진다.
끄오오오…
마왕성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이라도 되는지 고통스러운 울음소리가 탑 전체에 퍼졌다.
“...놓쳤나.”
나는 두 개의 검의 소환을 해제했다.
황제의 후계와 하페를 제외한 60층의 모든 것을 절단했지만 검에 무언가 갈린다는 느낌은 없었다.
아마 검의 궤적이 시작되는 순간 이미 이 층에 없었겠지.
그 이후로도 마왕의 또 다른 기습을 경계했지만 마왕은 나타나지 않았다.
도망 쳐버린 마왕.
그러나 왠지 힘이 약해서 도망쳤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정말 힘이 약했다면 이 탑이 공격에 무너져 내렸을 테니까.’
힘의 7할 이상을 방금 전 공격에 불어넣었는데 생채기를 남기는 정도로 공격이 끝나버렸다.
아마 그의 주체인 마왕은 더 강하겠지.
“쿨럭!”
“괜찮으십니까?”
나는 경계를 유지하며 리퍼에게 다가갔다.
리퍼의 상태는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
이미 아작이 난 두 팔을 제외하더라도 복부 부분의 상처가 심각했고, 상처 난 부분은 마기에 의해 침식당하고 있었다.
내가 이격으로 층의 모든 마기를 갈라내긴 했지만…
“이미 침식당한 마기는 어쩔 수 없어.”
하페는 별빛을 최대한 밀어 넣으며 중얼거렸다.
공격의 범위에서 리퍼를 제외했기에 주변의 마기는 지웠을지라도 리퍼 안에 있는 마기까지는 지우지 못했다.
‘그걸 지울려면 리퍼 자체를 지워버려야 하니까.’
나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간다.
“...탑에 회복이 가능한 사람이 누가 있지?”
“마탑주들이 가능하긴 한데… 마왕의 마기라…”
하페는 확신이 없는 목소리로 별빛을 더 밀어 넣는다.
그에 따라 별빛을 견디지 못하는 리퍼의 입에서 피가 더 터져 나오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으로선 마기보다는 신의 힘인 별빛이 좀 더 나을 테니까.
“굳이 한다면 성녀들이야. 별빛 같은 힘의 성녀가 아닌 누군가를 치료할 수 있는 성녀.”
“...헌신?”
헌신의 성녀 역시 탑을 올랐다.
헌신은 이름 그대로 남을 위하는 성녀.
게다가 무력 자체도 어지간한 대마법사도 씹어먹을 정도로 강하니 큰 문제는 없으리라.
하지만 헌신의 성녀가 아래 있을지 위에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래 있으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겠다만…
‘위에 있다면…’
리퍼는 조금 안색이 돌아온 얼굴로 입을 열었다.
“...두고, 가라.”
“하지만.”
“마왕이, 나왔다. 안주하고 있다가는 늦는다.”
거친 숨과 함께 피가 같이 터져 나온다.
“젠장. 거지 같군. 고작 이런 곳에 죽을 내가 아닌데…”
“...혼자 있으시면 위험합니다.”
“어차피 데리고 가봐야 죽는 건. 마찬가지다. 오히려 짐만, 되겠지.”
“...그래도 혼자.”
“그건 충심이냐. 아니면 연민이냐.”
그는 또렷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것도 아니라면 불의에 대한 반발심이냐.”
“....”
“너는 형에게 먼저 제안을 받았다. 그렇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러고 있나? 좋은 일 아닌가?”
그는 큭큭 웃으며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리퍼는 알고 있을 거다.
자신의 형이 전쟁에서 가장 뛰어난 나를 보고 제안을 걸지 않을 리가 없었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그는 덜덜 떨리는 팔로 허리춤에 찬 황금빛 잔을 가리킨다.
나는 잔을 집어 들었다.
붉은빛의 음료가 조금 차오른 황금빛의 성배.
“대신. 한 가지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나?”
“...말씀하십시오.”
“이대로 형이 왕위에. 오른다면 편히 눈을 감을 수 없을 것 같군.”
스읍.
“황실의 숨겨진 별장을 찾아가면, 어린 후계가 있다. 아버지의 어린 자식이지. 그 아이에게 성배를 먹인 후 그 아이의 편이 되어 주지 않겠나?”
“......”
“부탁이다.”
“예.”
“고맙군.”
리퍼는 벽면에 몸을 기댄 체 고개를 숙였다.
나와 하페는 잠시 그를 지켜보다 다음 층으로 올랐다.
***
두 사람이 떠난 자리.
리퍼는 가기 전 물려준 연초 하나를 태우며 전방을 주시했다.
피투성이의 육체와 죽어가는 몸.
누군가 올라와 그를 살려줄지도 모르지만 그럴 가능성은 굉장히 낮으리라.
뭐, 살아도 마왕을 잡지 못한다면 전부 죽겠지만.
‘...그만한 존재를 잡을 수 있을까.’
나름의 확신을 가지고 강자라 불렸던 리퍼조차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마왕은 강력했다.
또각.
그렇게 앞으로의 왕국의 미래를 생각하던 찰나.
“...허.”
“오랜만입니다. 황제 폐하.”
익숙한 인물을 만났다.
백색의 기다란 머리칼과 백안.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사도 중 유일하게 미래를 보는 성녀.
“많이 다치신 모양이군요.”
그녀의 가느라란 손을 타고 순백의 색을 가진 예언의 빛이 그를 감쌌다.
감싼 빛은 그대로 마기를 덜어내고 빛으로 채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빛은.
완전히 그를 채웠다.
***
“개판이네.”
나는 혀를 차며 층을 올랐다.
“...뭐가 개판인데요?”
“몰라도 된다.”
그리고 옆에는 레이나가 있다.
그녀는 혼자서 수백의 마수와 수십의 마족. 셋의 상급 마족을 상대하다 죽기 직전 간신히 구출되었다.
“근데 저 진짜 이길뻔했는데.”
“죽을뻔하지 않았나.”
“에이. 주신 초 광자 대격포가 있었는데요. 충전만 잘 됐어도 한방에─”
“결국에 못쓰지 않았나. 쓰기 직전에 마기의 칼날이 목을 노렸고.”
“.....네에~”
레이나는 투덜거리며 기다란 광자포를 어깨에 걸친 체 애꾿은 바닥을 툭툭 쳤다.
67층.
남색 마탑주의 신분으로 탑을 오른 나는 가벼운 마법만 사용해 가며 탑을 올랐다.
상황과 앞서 벌어질 사건들을 보기 위해 일부로 늦게 층을 오르니 딱히 남아 있는 인원은 레이나 외에 보지 못했다.
본 거라고는 이미 지나간 사건들뿐.
아마 이때의 나는 층을 열심히 오르고 있겠지.
동조화는 진작에 풀린 상황이고 원한다면 언제든지 동조를 할 수 있지만 우선은 따로 다니고 있다.
지금의 나의 개입보다는 본래의 나의 가능성을 보는 중이니까.
‘어쩌면 더한 것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렇게 생각하며 탑을 올려다보았다.
‘그나저나 하페도 참 지독하군.’
참 지독해.
***
불과 불이 충돌한다.
검붉은 불과 태초부터 이어져온 붉은 불의 충돌.
검붉은 사슬에 다리가 스친 적색 마탑주는 통증 제어 마법을 사용한 뒤 손을 뻗었다.
그의 뒤로 펼쳐지는 다중 캐스팅, 8서클 마법.
두 개의 8서클 마법을 시전 한 대가는 자신의 마력 또는 수명.
10년의 수명을 사용한 마법사의 대마법에 적열의 악마, 레베카의 살갗이 조금씩 벗겨진다.
콰가가가가!!!
불의 파도가 그를 덮치고 마탑주는 뒤에 멍하니 서있는 두 쌍둥이 소드 마스터에게 일갈한다.
“뭐 하나! 당장 공격해라!”
“예? 예, 예!”
“가자! 로데!”
두 푸른색 강기가 불에 타오르는 악마를 향해 쏘아졌다.
이검합일에 극에 달한 두 강기의 쇄도에 마침내 레베카의 양 팔이 잘려나가고 뒤이어 터져나간 불의 창이 레베카의 심장을 꿰뚫는다.
누가 봐도 끝이 난 상황.
하지만 여기 있는 셋 모두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다음 공격을 준비한다.
“태초의 불의 신이여. 제게 힘을 주소서.”
화르륵.
적색 마탑주의 등 뒤로 불의 신의 파편이 일깨워진다.
불의 신은 오래전 마왕에 의해 쪼개져 세계 각각으로 흩어진 존재.
눈앞의 레베카에게도 일부 있는 힘이지만, 힘이기라보다는 세계의 일부와도 같은 존재기에 가장 많은 파편은 적색 마탑주에게 있었다.
신의 파편으로 만들어진 적색의 불이 조금씩 변형된다.
불은 조금씩 뒤바뀌어 이전에 레베카가 만들어냈던 영혼을 불태우는 불을 구현내낸다.
불은 그대로 레베카의 만신창이 된 육신에 직격해 불탔다.
육신을 넘어 영혼까지 타오르는 레베카.
완전히 그가 연소되자 그제야 두 형제가 바닥에 주저앉고 마탑주 역시 지팡이를 땅에 기대었다.
“후하…”
“죽는 줄 알았네.”
“수고했네. 다들. 실력이 제법이군.”
“어르신이야말로.”
“하하하하!”
짙은 침묵속 잠깐의 웃음꽃이 피어난다.
그리고.
「...
단 한 번의 손짓으로 모두가 어둠 속에 잠들었다.
그 자리를 잠깐 바라보던 탑의 주인은 회복이 되지 않는 왼팔을 보고 이를 갈으며 본래의 자리로 사라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