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5화 〉 27. 가치있는 선택 (5)
* * *
***
위대한 마의 군주의 성, 하펠론의 주인이자 악마들의 아비. 모든 신들의 두려움의 대상은 불그스름한 두 눈을 치켜세웠다.
탑의 주인인 그는 모든 탑의 시야를 알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있었고, 그곳에 오르는 수많은 이들과 마족, 간부 악마들의 상황을 전부 보고 있었다.
위기에 처한 위신의 사도를 구하고 감히 적열의 악마, 레베카를 죽인 세놈의 인간을 죽인 것도 그런 능력이 있기에 가능했다.
간다!
내가 묶을게! 별빛 사슬!
그리고 그의 시야에는 또 하나의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바로 자신의 왼팔에 상처를 입힌 김윤과 별빛의 사도인 하페루아.
그들이 상대하고 있는 건 공간의 악마 주에르.
공간의 신을 죽이고 얻어낸 권능으로 아직 완전한 회복이 되지 않은 본인조차 완전히 통제되지 않는 능력 중 하나다.
인간 놈들의 수를 제한하고 전력을 분산시킨 것도 주에르의 힘이 있기에 가능한 일.
만일 그가 죽는다면 저 괴물 같은 놈의 전력이 더 상승될 것이 뻔했다.
‘괴물…?’
감히 누가 누구에게 괴물?
마왕은 큼지막한 손으로 왕좌의 한 부분을 내리쳤다.
그에 따라 마왕성 꼭대기. 99층이 무너질 듯 요동치고 그 안쪽에 있던 마수들과 악마들이 벌벌 떨었다.
욱씬.
“크윽…”
망할 왼팔.
그는 부서진 왕좌에 몸을 기댔다.
본래 계획은 이게 아니었다.
거짓된 존재인 베그리도를 구한 것은 순수히 재미를 위한 행동이었으며, 그가 좀 더 날뛰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러나 김윤의 강함은 예상했던 부분이 아니었다.
‘그건 대체 뭐였지?’
과거에 보았던 검신과는 비교도 안되는 검술.
수십 개의 연푸른 선이 공간 내의 모든 걸 절단하고 감히 이몸의 마기를 뚫고 육신과 영혼마저 피해를 입혔다.
그가 고작 사도라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차라리 검신의 환생이라고 해도 믿겠어.’
아니, 검신이 환생해도 저 정도로 되지 않는다.
그만큼 놈은 상상이상의 변수였다.
마왕이 왼팔을 부여잡는 사이에도 상황은 이어진다.
별빛 사슬은 공간 왜곡을 흩트리고 마기와 별빛의 충돌이 계속된다.
그 사이 앞서 공간을 메운 모든 힘들을 뚫고 지나가는 하나의 연푸른 빛.
푸콱.
연푸른 검은 그대로 쏘아져 주에르의 심장을 꿰뚫는다.
치직. 한차례 공간 변질을 통해 막아난 공격.
그러나 김윤은 다 예상했다는 듯 자리에 멈춰 선 체 한 손에 든 적화검을 둥글게 긋는다.
마치 검사보다는 마법사에 가까운 행동.
별빛의 힘까지 받은 그의 눈빛이 화려하게 물들더니 이윽고 놀라운 일이 펼쳐졌다.
“...!”
일격(一?).
변형식(???) ─ 기폭검(???).
주에르의 심장이 아닌 다른 공간에 꽂힌 검이 폭발한다.
고작 하나의 검의 폭발이라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폭발량.
공간이 무너지고,
마기가 무너지고,
악마가 무너진다.
육신을 뚫는 공격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다른 공간으로 검을 이동시켰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 패착이 되었다.
“...미친놈이군.”
탑이 진동한다.
마왕은 눈을 감고 탑을 관조한다.
…주에르의 신호가 끊겼다.
탑을 구성하던 공간의 힘이 사라졌다.
마기로 가득 찬 육신이 부르르 떨린다.
그는 자신의 상징인 검붉은 대검을 들고일어났다.
‘올라오는 걸 상대하면 늦는다.’
아직 놈의 힘이 완전하지 않을 때.
놈의 싸움을 도와줄 인력이 합류하지 않을 때.
“지금 놈을 친다.”
“뭘 쳐?”
“...!”
마왕은 대검을 든 손을 멈췄다.
그의 뒤를 잡은 누군가.
감히 모든 마의 수장인 이 몸의 뒤를 잡은 이가 있다.
‘감히.’
“아주 이 몸을 개무시하는구나.”
꾸욱.
「▼▼마왕 」
태초의 마기를 담은 검붉은 대검이 뒤틀리듯 그대로 뒤편을 베었다.
콰가가가가!!!
어마어마한 마기의 힘의 쇄도가 뒤에 있는 남자를 덮치고 99층이 풍비박산 난다.
마왕의 힘의 6할을 담은 폭력적인 힘으로 만들어진 현상.
그는 확신하지 못하지만 이 정도의 능력이라면 자신에게 상처 입힌 김윤에게 꽤 효과적인 피해를 줄 수 있었다.
“!!!”
“좀 세긴 하네.”
그러나 상대는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남색의 로브 사이로 조금 나와 있는 검은 머리칼과 아득한 기운이 느껴지는 검은 동공은 오래전 잊었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공포.
아득할 정도로 강한 이에 대한 두려움.
「▲마기 」 「▲맹약 」 「▲성신 」...
수많은 힘을 몸에 담고 있는 그는 끔찍한 마기가 타오르는 대검을 잡고도 멀쩡한 손을 까딱였다.
「▲정령왕 」
모든 곳이 막혀있는 탑에 녹색의 광풍이 몰아치고 마왕은 추하게 대검을 놓치고 탑의 벽면으로 튕겨져 나갔다.
마왕은 피를 토하며 그의 육신이 힘없이 널브러졌다.
“딱 3등위 수준이지만.”
“...너는.”
바람에 의해 머리 부분 로브가 넘어간 모습에 마왕의 두 붉은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도 그럴 것이, 마왕이 가장 꺼려 하는 이와 내가 같은 모습이니까.
‘뭐, 정확히 말하면 나니까.’
“차, 창조신?”
“왜 그리 생각하나. 내가 김윤인데.”
“...헛소리.”
마왕은 큼지막한 손을 꽈악 쥔다.
그에 손에서 검붉은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놈은 강하지만 너 정도로 강한 존재가 아니다. 이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 건 여신. 아니 과거의 창조신도 불가능하다!”
“그렇긴 하다만.”
이때의 나는 3등위를 이길 정도는 아니니까.
‘...하페는 도대체 어떻게 이기라고 3등위의 마왕을 놓은 거야?’
심지어 이때는 최강자의 유적도 발견하지 못해 제대로 힘쓰면 바로 쓰러지는 몸이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창조신… 그래. 왜 우리를 만들고 이렇게 가만 놔두나 싶었지. 지금이 그때인가?”
“뭐?”
“‘시작의 날’이 다가오냐는 말이다.”
시작의 날?
그런 게 있었나.
‘...내가 하페의 완전한 편이 되는 날을 시작의 날이라 명칭 했을지도.’
뭐가 되었든.
나는 손을 까딱였다.
삼색의 빛으로 만들어진 고리가 마왕의 머리와 두 팔을 묶고 권능은 곧 마왕의 힘의 사용을 억제했다.
“가만히 있어라. 너는 나서면 안 돼.”
“...그년은 가만히 있던가?”
“그년?”
“여신 말이다. 그년이 격과 신의 자리를 포기하고 너의 곁으로 간 것을 알고 있다.”
여신. 여신. 여신.
‘...생각해 보니 명색이 용사면서 만난 적이 없네.’
아무리 마왕 쪽인 하페와 친하다고 해도 한 번은 만나볼만 한데 말이지.
일이 끝나면 여신을 만나보러 가야겠다.
나는 다시 로브를 뒤집어썼다.
“그건 네가 관여할 부분이 아니다.”
***
이로써 내가 뒤튼 변수는 모두 차단했다.
이제 이야기는 본래대로 흐르겠지.
내가 할 일은 지나왔던 이야기를 다시 한번 읽는 것.
그것이 전부다.
***
“...윤아?”
“응?”
“뭔 문제 있어?”
하페는 나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문제는 없었다. 악마 간부를 둘이나 잡았고 벌써 층은 79층.
잡은 마수만 수만이 넘고 마족은 수천이 넘는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불안감이 쉽사리 잦아들지 않았다.
나는 검집에 검을 넣었다 빼었다를 반복하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두 마리의 마수가 뿔을 치켜세우며 마기를 이용해 마을에 파괴하는 그림이 그려진 천장.
마왕은 강하다.
분명 마왕을 놓칠 당시에 뭔가 갈리는 듯한 느낌이 있긴 했었다.
하지만 그의 주체인 마왕성은 여전히 건재하고 악마 간부 하나조차 피해 없이 처치하기 위해 하페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둘만으로는 무리일지도…’
“별문제 없어.”
“...공간의 제약이 해제됐는데 여태껏 사람들이 보이지 않아. 아마 당한 게 아닐까…”
하페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내 어깨에 머리를 툭툭 쳤다.
내가 의문스럽게 보고 있자 더욱 다가오는 하페.
나는 그런 하페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려 쓰다듬었다.
“...이겨야 해. 사악한 마왕으로부터.”
“사악한 마왕으로부터.”
80층의 문이 보인다.
나는 문을 열기 전에 하페를 잠깐 보았다.
나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찬 그녀.
나는 그녀를 향해 말한다.
“걱정마.”
“응?”
“그 어떤 위험이 닥치더라도 넌 반드시 지킬 거니까. 약속할게.”
나는 그리 말한다.
그리고 하페의 두 눈은 동그랗게 뜬다.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응. 나도 널 지킬게.”
끼이익…
문이 열린다.
마기가 한층 더 짙어진 80층.
80층은 탁한 색으로 가득 찬 아주 조용한 공동이었다.
근처에 마수 하나 없이 깨끗하게 정화된 듯한 공간.
주변의 마기는 지금까지의 층과 달리 규칙적이었고 익숙한 마력들이 여실히 느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위치한 작은 제단.
제단 위에는붉은 단발을 가진 여인이 우리를 돌아보고 있었다.
“아프로님!”
“헌신의 성녀님?”
다색의 수많은 피로 물든 성녀의 복장을 한 그녀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너희가 마지막 이구나. 이 또한 운명일까?”
“네?”
“그래. 신들의 이야기니까. 전부는 아니더라도 결말 정도야 정해져 있겠지.”
그녀는 중얼거리며 아주 얕게 올라와 있는 둥근 제단에서 서서히 내려온다.
“그럼… 잠깐 대화 좀 할까 꼬맹이들.”
좀 더 인류에 가치 있는 미래에 다가가기 위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