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96화 〉 27. 가치있는 선택 (6) (296/318)

〈 296화 〉 27. 가치있는 선택 (6)

* * *

***

헌신의 성녀.

몸과 마음을 바쳐 어렵고 고통에 빠진 자를 구원하고, 사악하고 정의롭지 못한 이를 응징하는 힘을 가진 사도.

그녀의 힘의 본질은 본디 누군가를 위함에 있다.

“...흠. 어디부터 얘기를 해야 할까.”

그런 그녀는 100년이 넘는 긴 기간 동안 오로지 남과 정의를 위해서만 움직였다.

입을 것이 부족한 이가 있다면 자신이 입고 있던 것을.

먹을 것이 부족한 이가 있다면 자신이 먹을 식량을 건네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눈앞에 일어나는 어떤 불의에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고, 늘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해 그것을 응징했다.

‘그 과정에서 자신에게 어떠한 피해가 오더라도.’

“앉거라. 좀 긴 얘기가 될 거 같으니.”

헌신의 성녀, 아프로 테이라는 자신의 힘으로 만든 분홍빛 의자에 앉았다.

은은한 기운이 느껴지는 의자.

나와 하페 역시 만들어준 두 개의 의자에 앉았다.

“...”

“...”

적막이 공간을 흐른다.

나는 악마 간부나 마왕의 기습을 대비해 기감을 최대한 늘렸지만 딱히 걸리는 것은 없었다.

마치 이 일대에는 우리 말고 아무도 없다는 듯이.

“오래전, 나는 버려진 아이를 돌보는 수도원에서 태어났다. 수도원은 헌신의 신의 감사를 받으며 살아가는 곳이었지.”

“수도원에서는 항상 가르치는 교리… 아니, 옳은 것이라 표현해야겠지. 우리는 옳은 것을 배웠다.”

곤란에 빠진 이를 보면 모른 체하지 말 것.

자신보다는 남을 위할 것.

불의에 저항할 것…

아프로는 사도가 되기 이전부터 사도와 같은 삶을 살았다.

정확히는 사도가 되길 기대하는 수도원의 사람들 때문이리라.

부를 쌓을 수 없는 헌신의 수도원 특성상 늘 부족한 삶을 살아야 했으니까.

“사도가 나온다면 수도원은 왕국의 정식적인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되고, 그것은 곧 지원을 의미하게 되니.”

헌신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 남을 돕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대가 주는 걸 거부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것이 정의롭다는 전제하에서만.

“뭐, 수도원도 골치 아프치 않았겠느냐. 아이들은 늘어가는데, 신 님은 계속되는 헌신을 요구하니 말이다.”

“...그래서 어찌 되신 겁니까.”

“뭘 어찌 되느냐. 나는 오래된 헌신으로 사도가 되었지.”

12살의 나이에 헌신의 사도가 된 아프로 테이라.

고작 수도원 생활 10년. 제대로 된 헌신을 시작한 지 7년 만에 헌신의 신께 인정받아 사도가 되었다.

헌신의 수도원은 왕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받고 아프로는 13살의 나이에 헌신의 성녀가 되어 수도원을 떠났다.

“그리고 정확히 4년 7개월 21일 뒤. 나는 내 손으로 수도원의 모두를 지워버렸다.”

“...!”

“왜 그랬을 거 같니?”

분홍빛의 기운을 내뿜은 그녀는 나를 쳐다보았다.

묘하게 슬퍼 보이는 두 붉은 눈.

나는 말을 고르고 고르다 입을 열었다.

“...타락해서입니까?”

“타락이라.”

하하.

짧게 울려 퍼지는 그녀의 웃음.

아프로는 고개를 저었다.

“설마. 수도원 사람들이 얼마나 순진한 사람들인데 타락이라니.”

“...그렇다면.”

“말했잖니. 받으려면 그만한 정의로움이 필요하다고.”

조금의 사치를 부린 죄.

지원받은 물품을 아주 조금. 자신의 주머니에 채워 넣은 죄.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가벼운 처벌로서 넘어갈 일이었다.

부정이 문제가 되었다면 왕국의 처벌을 받으면 될 일.

하지만 헌신을 모시는 이들을 그러면 안 되었다.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남을 위해야 한다.

“그래서 지웠다. 나를 키워준 제니스 수녀님, 비츠아 수자님, 리론 대수녀님. 그 외의 다른 이들 모두 전부.”

아프로는 두 눈을 감았다.

아직도 머릿속에는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울면서 자신을 죽이러 온 아이를 보면서도 애써 웃으며 쓰러지는 수도원의 어른들의 모습도.

시체를 부여잡고 하늘이 떠나갈 듯 우는 자신의 모습도.

그런 모습을 보고 엉엉 울며 옷가지를 부여잡는 어린아이 역시도.

모두.

“헌신이란. 그런 거지.”

“...”

“내가 헌신의 사도가 아니었다면. 아니, 이건 아니지.”

그녀는 고개를 젓는다.

잠깐 감았던 눈을 뜨고 대화를 이어나간다.

“수도원의 아이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나는 신전에서의 생활을 계속했단다.”

“헌신의 신전은 다른 신전들보다 특별해. 헌신하는 삶. 그것이 계속 반복되지.”

매번 난민촌에 가서 다른 이들을 돕는다. 가끔 출몰하는 사악한 마수 무리를 처치한다.

고행이랍시고 한 달의 절반은 금식 기도를 하거나 심지어 각인 비슷한 것도 우습지 않게 했다.

“...각인이요?”

그녀의 이야기를 쭉 듣던 내가 분노에 가까운 의문을 드러내자 아프로는 담담하게 답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건 흑마법이 아니야. 마기를 제외한 헌신의 신의 힘으로 사용되는 의식이지.”

흑마법이 아니기에 추출되는 양도 적고 나온다고 해도 전혀 사치에 쓰지 않지만.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한 말에 나와 하페는 말문을 잃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의 헌신은 계속된다.

“그렇게 30년쯤 지났을까. 우연히 나는 왕국의 행사를 참여하기 위해 왕실에 방문했다.”

그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신은 인간계 더 이상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못하기에 신과 사도. 둘 누구도 몰랐던 내용.

그녀가 왕실에서 일하는 어린 집사를 돕다가 들은 은밀한 대화.

워낙 작은 소리였지만 무려 30년 동안 헌신의 힘을 얻은 사도에게는 쉽게 들을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헌신의 성녀가 참가한다고 하더군요.’

‘그 인간 같지도 않은 성녀 말인가? 참, 그녀의 눈을 볼때마다 오싹하단 말이지. 얼굴은 아름다운데 말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황자님. 이런 줄 알았다면 그때 수도원을 지워버리지 말았어야…’

‘조용히 하게! 지금 성녀가 온 걸 모르나?’

‘설마 듣겠습니까… 지금은 아무런 증거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후후.’

뿌득.

아프로의 분홍 의자가 바스러진다.

그녀에게서 믿기지 않을 만큼의 기운이 터져 나왔다.

악마 간부 하나쯤은 가뿐히 녹여버릴 것 같은 강대한 기운.

잠깐 화를 주체하지 못했던 아프로는 숨을 고르며 다시 만들어진 의자에 몸을 기댔다.

“분노했다. 그리고 응징했지.”

“......”

“신께서도 황자의 불의를 인정했다. 그래서 당장 쳐들어가 놈의 목을 끊어 놓았다.”

그리고 헌신의 성녀는 황자 살해를 이유로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성녀는 당당했고, 신의 뜻이었지만 아쉽게도 신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성녀는 죄 없이 죽어간 이들을 떠올리며 소리 없이 울었다.

죗값을 치르기 위해 그녀는 조용히 감옥에서 전보다 훨씬 많은 각인 의식을 통해 비용을 지불했다.

그것이 자신의 속죄의 일이라 생각했기에.

그렇게 20년.

그녀는 마침내 밖으로 나왔다.

전보다 훨씬 더 고결해진 성녀는 고행을 위해 신전을 떠나 세계를 돌아다녔다.

그렇게 남을 돕기를 100년.

그녀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강자 중 한 명이 되었다.

물론 그리되어도 헌신을 멈추지 않았지만.

“...그래서 어찌 되었다는 겁니까. 왜 당신 혼자 이곳에 있는 것이고요.”

“같은 것을 행하기 위해 서지.”

마왕이 너무나도 강하다.

그것은 단순한 강함의 수치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

근본 자체가 다른 존재.

피조물과 그 한계를 넘어 다른 차원. ‘초월자’와의 차이.

절대 이길 수 없는 존재를 이기기 위해서는 발버둥이라도 쳐야 한다.

헌신은 말한다.

“신을 필적하기 위해서는 신의 위치에 올라야 한다. 다른 방법은 안돼. 불완전함은 완전함을 이길 수 없어.”

“그 완전함을 위해 신 님께서 헌신하셨다.”

여신이 행한 ‘신의 인간계 개입 금지’.

헌신의 신은 마왕 저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아프로에게 헌신했다.

힘과 격. 그리고.

“헌신을 힘으로 치환하는 능력까지 말이야.”

“...당신이 다른 올라온 모든 이를 죽인 것이군요.”

“세계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아프로의 힘이 더더욱 커진다.

나조차도 일격 정도로는 쉽사리 처리하지 못할 정도의 강함.

그녀는 슬픈 눈으로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해야만 해야 하는 일이지. 반드시 누군가는 해내야돼. 내 존재를 걸어서라도 반드시.”

“...그러면 제가 하겠습니다.”

“안돼, 너희는. 너희로는 역부족─”

“그건 누가 정하는 겁니까? 당신을 위해 희생한 신? 아니면 당신의 생각입니까?”

아프로의 표정이 굳는다.

연민으로 가득 찼던 얼굴은 늘 보던 악인을 보는 것과 같은 얼굴로 바뀐다.

“희생에 대한 노고는 여신과 창조신께서 인정해 주실 거다. 너희는 영웅이 되는 거야.”

“죽어서 영웅이 된다면 무슨 소용입니까.”

“애처럼 굴지 마라. 너희는 인류의 대표로 이곳에 온 거야. 죽기 싫다고 징징대기에는 너무 멀리 오지 않았니?”

“애처럼 구는 건 당신이겠죠. 당신만이 마왕을 저지할 수 있다? 당신이야말로 너무 오만하다는 생각이 안 드십니까?”

“......”

그녀는 힘을 갈무리한다.

얼마나 많은 힘을 흡수했는지 일대의 마력과 마기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다.

‘여기까지 온 소드 마스터와 대마법사가 몇이나 될까.’

보조 인력을 제외한 11명이었으니 절반만 해도 6명이다.

그만한 힘이 모조리 아프로에게 들어갔다면…

나는 침을 꿀꺽 삼킨다.

하페 역시 별빛을 준비하고 연푸른 빛이 나와 하페를 감싼다.

아프로의 몸에서 분홍빛의 기운이 터져 나온다.

그때. 바다의 사람들을 얘기할 때와 똑같은 반응.

인간에 대한 혐오에 가까운 적대감.

“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비슐에서 악마 간부를 처치하기 위해 다른 이들의 희생을 요구했다고. 어떻게든 공격을 쓸 수 있기 위해 버텨달라고.”

“......”

“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은 희생을 할 수 없다니… 참으로 이기적이구나.”

이기적이야.그것도 아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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