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1화 〉 29. 오래된 적수 (2)
* * *
***
“못 해먹겠네 진짜. 요새 용사들은 여신에 대한 존중이 없어요.”
“그야 너의 행실이 그런데 누가 너를 존중해 주겠나.”
“넌 닥쳐! 망할 악마 새끼야!”
망할 악마 새끼라.
이곳의 99%가 악마라는 걸 알고 하는 말일까.
“아빠.”
“그래. 딸. 사위를 데리고 왔구나.”
제르노스는 끌끌 거리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역시 체격이 커 그런가 다소 위압감까지 느껴졌다.
「▲마왕 」
저 정도면 아마 5등위. 그 이상은 되겠지.
나와 싸웠던 힘이 저하된 무명과 엇비슷하거나 좀 더 강할 거다.
“용사라. 아무리 그래도 마왕의 딸의 사위가 용사는 좀 아니지 않니?”
하페는 말없이 손가락으로 소파를 가리켰다.
손가락의 끝에는 남의 시선을 귓구멍으로도 안 보는지 과자를 먹으며 배를 긁적이는 여신이 보인다.
…저딴 게, 여신?
저런 여신을 믿는 신전과 성녀가 불쌍할 지경이다.
“뭐.”
“아닙니다.”
「▲여신 」
물론 힘 자체는 마왕과 엇비슷한 수준.
괜히 여신이 아니겠지.
“엘레노아는 나의 오래된 친우지.”
“누가 네 친구야.”
“또한 적수기도 하다. 태초부터 시작된 경쟁자. 우리는 서로 한쪽이 무너지지 않고서야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었지.”
물론 그것도 시간이 지나 서로의 영역만을 고수했지만 전쟁이 한창 일어날 초창기에는 쉬지 않고 계속 전투를 이어갔다.
“우리의 힘은 상극이다. 서로 가까이 있기만 해도 서로를 갉아먹고 언제든 한쪽을 지워 없애버리려 하지. 마기와 신성은 서로를 꺼려 하니까.”
“맞다. 저놈과 나는 매번 싸웠지. 참 오래도 싸웠어.”
여신은 벌써 과자를 다 먹고 새 과자를 깠다.
전승된 이야기에 따르면 이미 수 만년이 넘었다고 한다.
행성 하나에 묶여있을 초월자들이라기에는 너무 강한 존재들이지만 처음부터 그런 존재였던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나고 수없는 전투 끝에 그만한 힘과 격을 가졌을 뿐.
“안 죽어 저놈. 뭐 죽으려 하면 재생하더라.”
“그러는 너야말로 수천 번이고 부활하지 않았나.”
“나는 그게 패시브야.”
여신과 마왕은 서로 으르렁 거린다.
정말 화가 났다기보다는 애증에 가까운 태도.
어쩌면 저것도 다 연기일지도 모른다.
그냥 저런 식으로 살아왔기에 지금도 이래야 되겠거니 하는 모습.
나는 검을 하나 꺼낸다.
“오.”
여신은 모르겠지만 여신에게 받은 신성의 검.
근처에 여신이 있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용사의 대적인 마왕을 목도하고 있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평범한 수준이었던 신성의 검은 어마어마한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저게 따님을 주십시오 하는 그건가.”
“.....”
여신은 아침 드라마를 보는 아줌마들처럼 흥미진진하게 나와 마왕 사이를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원하는 건 내 목인가?”
“필요하다면요. 기왕이면 편한 쪽으로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큭.”
크하하하하!!
다시 한번 전 층을 울리는 웃음소리.
여신은 어우 시끄러 하며 귀를 막았지만 그는 자신의 오래된 애병을 들고 천천히 왕좌에서 일어났다.
“우리 딸이 수만 년동안 사위를 데리고 온 건 처음인데.”
“숫자같은 거 말하지 마!”
“아무래도 쉽사리 내어주기는 어렵겠군.”
끼기기긱─ 검붉은 대검의 손잡이 틈에 끼워진 붉은 해골이 기이한 소음을 내뿜는다.
푸화아아악! 하며 짙게 터져나가는 검붉은 마기들.
마기는 연기처럼 퍼져나가다 마왕의 육신에 둘러싸여 튼튼한 갑주를 만들었다.
용의 비늘보다도 단단하고 강력한 갑주.
아마 초월의 힘에 저항하는 특성도 가지고 있을 거다.
그의 얼굴에 검붉은 투구가 착용되고 두 붉은 눈은 파괴적인 마기를 흘려냈다.
“관리자가 오고 있다는 걸 알고 있나?”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군. 그녀가 온다면 반드시 속전속결로 진행하라.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위험해질 거다.”
“...그게 끝입니까?”
“그럼 대단한 정보라도 주길 원했나?”
그런 걸 준다면 당장이라도 그녀가 찾아올 거다.
그는 피식 웃으며 대검을 하늘로 치켜올린다.
과거 수만의 천사를 참살하고 그 도시를 박살 내버린 영혼을 갉아먹는 검.
마검, 오베르드.
오래된 마검의 시작과 함께 나 역시 힘을 운용했다.
마기가 가득한 마왕에게 가장 효과적인 힘.
「▲신성 」 「▲성신 」 「▲정령왕 」
삼색의 빛이 마기와 충돌한다.
***
쿠구구궁!!
마왕성이 크게 울린다.
99층의 모든 마수와 마족은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고위 악마들은 자신의 왕을 올려다보았다.
“시작인가.”
“주인님이 이길 거다냐.”
“아무래도 길드장님을 이기는 건 힘들죠.”
“......”
바로 옆방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다윤 길드의 길드원 역시 이 여파를 여실히 느꼈다.
다윤 역시도 식사를 하고 있지만 큰 걱정까지는 하지 않았다.
‘윤 씨는 강하니까.’
김윤은 강하다. 그것도 아주.
관리자의 안배라는 것에서 돌아온 김윤은 더 이상 행성 내에서 적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강해졌고, 그 힘은 오랫동안 그의 옆을 지켜온 그녀였기에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를 믿지만 한 가지 걱정되는 점이라면… 역시 그 이후다.
‘관리자. 그리고 관리자가 숨겨둔 무언가.’
과연 우리가 막을 수 있을까.
또 이겨낼 수 있을까.
불안감이 앞선다.
***
붉은 궤적이 내 목을 노린다.
스치지도 않았는데 육신에 깃든 영혼을 갉아먹는 마검 오베르드.
나는 삼색의 빛을 몸 전체에 터트려 영혼의 마기를 떨쳐낸다.
빛은 그대로 수십 개의 무기가 되어 마왕의 뚫기 위해 쏘아진다.
파카칵! 소리와 함께 전부 마왕의 주위 마기에 녹아내리는 신성의 빛들.
나는 빠르게 뒤로 이동한 뒤 모아둔 힘을 풀었다.
「▲저장 」
“...!”
마왕성의 허공에 큼지막한 손이 그대로 내려찍는다.
초월의 명(名)은 ‘손수’.
법칙에 가까운 기술로 ‘반드시’ 적을 제압한다는 개념이 깃든 힘이다.
잠깐 동안 마왕은 손에 의해 움직임이 멈추고 그 틈을 틈타 삼색의 빛으로 이루어진 검이 마왕의 육신 중 하나를 꿰뚫는다.
뚫렸지만 뚫리지 않은 육신.
“육신 대체야. 피해 윤아.”
멀리 떨어져 있는 그녀가 말하기도 전에 회피.
지나간 자리에는 공격을 그대로 마기의 형태로 변해 반사하는 반마탄(反??)이 작렬했다.
마기의 탄은 그대로 폭발하여 주위의 모든 것을 터트린다.
나는 성신의 빛을 둥글게 말았다.
빛은 그대로 백청의 번개로 변해 폭풍처럼 몰아쳤다.
한번.
파직 소리와 함께 번개처럼 쏘아진 나는 그대로 마왕의 왼쪽 팔을 날렸다.
육신을 베었다기보다는 훨씬 고차원적인 무언가를 베어낸 느낌.
마왕에게 있어 육신은 큰 의미를 가지지 않기에 베어냄과 동시에 팔이 재생되었다.
“브레이크 웨폰. 무기는 바꾸고.”
신성의 검 대신 아공간에서 꺼낸 레전드리 급의 무기 하나가 박살 난다.
브레이크 웨폰은 맞닿은 무기를 파쇄하는 기술이기에 반드시 하나의 무기를 소모해야 했다.
박살 난 무기는 신성의 검에 흡수. 더욱더 강렬한 빛을 뿜어낸다.
혀를 차는 마왕 제르노스.
“딸아. 넌 악마 아니니.”
“아빠는 늘 악마 다운 삶을 살으라 하셨죠.”
“그래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구나.”
그는 처량하게 말했지만 정말 처량해 보이지는 않았다.
모든 것을 갉아먹을 듯한 검붉은 기운을 내뿜는 그는 악의 화신처럼 보였으니까.
여신은 어느새 콜라와 4D 안경까지 끼고 관람하고 있다.
…저 안경은 왜 끼는 거지.
그의 대검이 다시 한번 움직인다.
빛의 검으로 다시 받아낸다.
치열한 공방 끝에 나는 오베르드에게 가슴팍이 베였다.
파슥 하고 터져 나오는 피.
얇게 베였기에 그다지 상처까지는 아니지만.
「▲마왕 」
기다렸다는 듯이 마왕의 마기가 내 피를 오염시키려 달려든다.
평범한 용사라면 그대로 타락할 정도의 강렬한 마기.
“...역시 반응 없군.”
“이미 마기는 익숙합니다.”
허나 나는 이미 최상위 악마급의 마기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도서관에서 제르노스의 마기 샘플을 가지고 온 이상 더 이상 마기는 나의 적이 아니었다.
대충 파악은 했다.
최강자의 힘과 특이점 없이 이 정도면 선방이지.
최강자를 상징하는 연푸른 힘이 내 몸에 스며든다.
“오, 최강자.”
“늘 보셨으면서 뭘 새삼스레 그래요?”
“그놈이랑 저놈은 다르지. 생각해 보니 둘 다 이름이 같구나? 그래서 고른 거냐.”
“없지는 않지만. 굳이 이름이 아니어도…”
여신과 하페는 서로 만담을 나눈다.
그사이 연푸른 빛이 삼색의 빛을 덮어씌우고 가벼운 기술 하나가 검에 깃든다.
일격.
가장 기본적인 기술이자 내가 가장 먼저 배워낸 단순하고 폭발적인 기술.
나는 일격을 길게 늘였다.
「▼최강 」
「▼최강 」
「▼최강 」
.
.
.
정확히는 덧붙이는 식.
수십 개의 일격이 마치 하나의 검강처럼 이어져 거대한 마왕성의 층의 전부를 덮는다.
여신의 입이 떡 벌어지고 제로노스 역시 미간이 찌푸려진다.
“...그놈보다 기술이 더 정교하군. 하페루아가 선택한 이유가 있어.”
“그렇게 말해도 안봐 드립니다.”
“그렇지.”
결과가 뻔하더라도.
마왕의 대검이 더욱 커진다.
마왕성의 마기의 대부분이 대검으로 빨려 들어가고 어마어마한 격이 제르노스 본인에게 스며들었다.
우리는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검을 휘둘렀고.
승패가 가려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