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3화 〉 30. 세계의 주축 (1）

* * *

***

백색의 머리칼을 가진 남자는 허공에서 느껴진 시선을 읽었다.

하늘 보다 멀리. 우리의 세계와는 조금 동떨어진 곳.

허나 지금의 자신의 힘으로도 충분히 맞닿는 곳.

그의 손이 서서히 움직인다.

백색과 붉은색. 두 가지의 색이 혼합된 지팡이가 빛을 발하더니 발사된 빛은 궤도를 뚫고 빠른 속도로 시선의 끝에 충돌한다.

소리 없는 폭발과 함께 터져나가는 무언가.

일반적인 소재는 아닌지 초월의 격이 섞여 있었지만 종잇장처럼 구겨져 그대로 불타 아래로 추락했다.

“...기묘하군요.”

시선을 돌린 그는 거칠게 마나선을 타고 흐르는 초월적인 힘을 느끼며 목표를 바로잡았다.

거짓된 세계.

압도적인 힘.

그리고 적.

‘김윤. 그리고 그의 일행들.’

[명심하세요. 당신에게는 사명이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사명이지요.］

당신의 형을 그렇게 만든 ‘진짜’ 원흉에게 복수할 기회를.

“복수를.”

거짓된 존재는 하나의 서클을 열었다.

그리고 대륙이 뒤집혔다.

***

대륙이 뒤집힌다.

신들이 넘쳐나는 이 세계에서 간단한 말처럼 들릴지 몰라도 절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곳은 열 명이 훨씬 넘는 초월자들이 사는 곳.

그 격과 힘으로 유지되는 행성은 어지간한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을 만큼의 견고함을 가지고 있으며 지금의 나조차도 행성을 쪼개는 건 불가능하다.

아마 삼격을 써도 행성이 깊게 파이는 정도로 끝이겠지.

행성 자체의 존폐를 위협할 정도는 아니라는 소리다.

“...베리.”

디틴베리의 트롤 몬스터였던 왕의 동생.

죽은 자를 소생시키고 현실을 조작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마법사.

녀석은 마지막으로 망령 지대에서 나에게 찬란한 빛을 건네주고 사라졌었다.

그의 위치는 예의 주시 선상에 있었으며 마력이 깃든 산에서 은거한다는 보고를 받았고 불과 5분 전까지만 해도 그 위치를 확인했다.

베리는 메인 퀘스트의 중요 인물 중 하나이나 힘이나 위치 자체는 그리 강하지 않았다.

현실을 조작한다 한들 초월자가 아닌 그는 리진만 못한 마법사니까.

“요격할까요?”

콜트가 묻는다.

비록 위성이 하나 터져나갔지만 아직 수십 개의 위성이 행성을 주시하고 있다.

원한다면 언제 어디든 초월의 힘이 깃든 광자 주포를 쏘아낼 수 있다.

통칭 하늘의 눈이라 불리는 전략 병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우선 베타로 힘의 여파를 막는다. F 구역은 전부 봉쇄해.”

­알겠습니다.

베타의 몸체가 푸른 입자로 흩어지더니 이내 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땅에 작은 기체 장치를 심고 다시 한번 이동.

총 13곳에 장치를 심고 기기를 작동시키자 거대한 첨탑이 하늘로 솟아오른다.

남색의 기체를 가진 거대 기기 장치의 중앙으로 푸른 입자의 선이 드러나고 각각의 포인트를 기점으로 서로의 신호가 연결된다.

근처의 존재하는 모든 에너지를 흡수하는 베타의 초월 병기.

특이 저항까지 탑재된 병기이기에 제아무리 초월자라 할지라도 이 공학진 바깥으로 힘의 여파를 흩뿌리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소요시간 2.76초. 대상이 저의 존재를 파악했습니다.

“우선 빠진다. 상대가 뭘 가지고 있는지 몰라.”

­알겠습니다.

베타는 다시 한번 이동했다.

그 사이 베리는 주위를 살피며 거침없이 빠져나가는 자신의 힘을 주시했다.

그의 붉은 눈이 번뜩이더니 갈라진 대지 틈 사이로 무언가가 튀어나오기 시작한다.

체구가 30m가 넘는 기이한 회색빛의 거인.

팔의 한쪽에는 붉은색의 원형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것을 본 하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거인의 발이 움직이자 뒤집힌 대지가 한 번 더 요동친다.

큼지막한 발과 부딪힌 대지가 터져나가는 소리.

그리고 그 소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회색빛으로 물들었다.

소리뿐만이 아니다. 그곳에 존재하는 공기와 공간. 마력을 비롯한 수많은 힘과 생명체까지.

모든 것이 회색빛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F ­ 27구역에 현상 변질이 발생했습니다.

­F ­ 30구역에 마나 폭주가 발생했습니다.

­F ­ 17구역에 변종 기체가…

삐삐삐삐!

푸른색으로 가득했던 홀로그램의 일부분이 빠른 속도로 붉은색으로 물든다.

F 구역은 메인 퀘스트와는 다소 동떨어진 중소도시가 몰린 구역.

나와 연관된 인물이나 도시는 피해 입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랬기에 저항하지 못하고 빠른 속도로 무너지고 있다.

나와 연관되어 있지 않다는 건 그만한 힘이 없다는 소리니까.

그리고 그 중소도시 중에는 최근 용사들이 모인 오르바틴 역시 포함되어 있다.

“갈까요?”

“......”

“윤 씨?”

“잠만.”

나는 꺼림칙함을 감출 수 없었다.

무언가 의도된듯한 상황.

지금의 베리. 아니 이제는 뭔지조차 모를 무언가가 행성을 갉아먹으려 들고 있다.

지금 길드원들을 투입하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은 불안함이 있다.

나는 하페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젓는다.

“...인원을 나누겠다.”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집중된다.

그 와중에도 거인에 의해 행성이 침식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쓰러져간다.

“레빗과 이랑, 다윤은 거인을 상대해. 단 침식은 최대한 피하도록. 뭐가 있을지 몰라.”

적어도 7등위.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대체 관리자가 뭘 만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이름과 관련된 거겠지.

‘머나먼 차원에서 초월자. 그와 같은 이름을 가진 베리를 이용해서.’

셋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채림, 콜트, 베타는 주위 힘의 여파를 막는다. 최대한 희생자를 줄이고 채림은 적당히 흡수해.”

“알겠습니다. 길드장님.”

“명심해. 정신을 잃은 힘을 구사하다 이번에는 정말 위험할 수 있어.”

채림은 침을 꿀꺽 삼킨다.

긴장했군.

나는 대충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남은 하페와 네츠리 루아를 돌아보았다.

“둘은 여기에 대기해. 그리고 하페는 언제든 위험하면 힘이 필요한 쪽으로 와줘.”

“네, 스승님.”

“조심해.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미친놈을 만들었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힘을 갈무리한다.

「▼최강 」

준비는 완벽하다.

“난 베리를 상대한다.”

***

어드벤처의 사람들의 이름과 성은 전부 반대다.

아미아 리진, 에르다스 베리와 같은 이름이 앞에 오는 게 아닌 성이 앞에 오는 것.

때문에 어드벤처를 즐기면서도 나 역시도 궁금하던 내용이었다.

이유가 뭘까.

왜 굳이 성과 이름을 바꾸어놓았을까.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이런 걸 준비하면 할 말이 없지.”

나는 백색과 붉은색의 마력을 내뿜는 에르다스 ‘베리’를 보았다.

정확히는 ‘베리’ 에르다스를.

‘에르다스 차원 연방의 연합장. 만물을 뒤바꾸는 ‘변혁’의 초월자. 8등위의 천외천.’

하페가 알아낸 베리의 힘의 정체다.

에르다스라는 가문은 차원 연방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성이다.

가문에서 ‘고유’의 힘을 가진 초월자가 그리 규정했기에 가능한 일.

그것을 사용하려면 처음부터 관리자의 영향을 아주 조금도 받지 않거나 8등위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관리자는 그것을 뒤틀고자 성과 이름이 반대되는 행성의 문화를 구성했다.

그러면서 ‘에르다스’라는 성이 이름으로 판정되어 기묘하게 영향에서 벗어나게 된 것.

물론 천명에 누군가의 개입이 포함된다면 아무리 이름이 같더라도 힘을 사용할 수 없지만…

직접적으로 ‘베리’라는 이름을 만들기 위해 문화가 구성되었는지 아니면 그냥 구성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결국 관리자의 오래된 안배는 성공했고, 그 실체가 이제는 나를 노리고 있다.

‘오싹하네.’

“오랜만입니다.”

“그러게 말이야.”

아득하리만큼 많은량의 마나를 품은 심장의 서클. 코어.

베리의 붉은 눈이 나를 관조한다.

그대로 최강의 힘에 튕겨져 나가는 붉은 마력.

요놈 보소.

“처음부터 너무 과격하네.”

“얼마나 강해졌는지 볼려했는데. 역시 기대 이상이시군요.”

마음에 듭니다.

소년 같던 그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간다.

그의 주위로 마법진이 요동친다.

수 백개, 아니 수천 개의 마법들이 하나로 구현되어 거대한 거인을 만든다.

회색 공간을 찢고 나오는 침식의 마수.

크기도 아까 본 회색 거인보다 세배는 더 커 보이고 등에 뭘 매달았는지 큼지막한 봉을 이고 있었다.

거인의 얼굴에 박힌 다섯 개의 붉은 눈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목을 올리다 미간을 찌푸렸다.

취미도 고약해라.

한눈에 봐도 튼튼해 보이는 거인이지만 절대 단단하지 않다.

오히려 물렁해 터트리면 침식되는 힘이 물풍선마냥 주위로 터져나가겠지.

“마법은 나도 좀 할 줄 알아서.”

서클에서 시작된 마나선을 타고 최강의 마력이 흐른다.

그 어떤 규격도 무너트리는 특이점과 비슷한 힘.

링크가 연결된 마법진은 그 크기를 키워나가며 발판처럼 구성된다.

목적지는 붉은빛을 내뿜을 준비를 하는 거인.

마법진은 그대로 거인의 아래에 새겨지고.

“추방.”

「▲저장 」

그대로 암흑 속으로 사라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