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5화 〉 30. 세계의 주축 (3)
* * *
***
마왕은 말했다.
속전속결로 끝을 내라고.
나 역시 동감하는 바이며 굳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더라도 눈앞의 베리의 위험성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 」
미지에 가려진 힘의 숫자가 드러난다.
Ⅱ.
허공에 드러난 푸른 결정의 숫자는 빠른 속도로 회전함과 동시에 이어질 공격에 힘을 가중시킨다.
베리의 육신이 산산조각 난다.
나는 여기서 한 번 더 이격을 날렸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이격을.
그렇게 무너지며 다시 한번 몸을 추스르며 정신을 차릴 쯤에도 한 번을.
그렇게 총 스물일곱 번의 이격끝에 베리는 저항 의사를 멈추고 흩어진다.
“...끄극. 끼, 끄극….”
이격은 단순히 육신의 절단이 아니다.
그 본질은 규격을 깨트리는 최강자의 ‘영혼’을 가르는 기술.
제아무리 거짓되고 부활이 가능한다 한들, 영혼이 손상되면 되돌리기란 쉽지 않았다.
초월자에게 있어 영혼은 목숨이나 다름없으니까.
“2페이즈인가.”
갈가리 찢겨 덕지덕지 붙여진 베리의 영혼에 두 번째 서클이 열린다.
다시 한번 주위로 터져나가는 마력의 폭발.
폭발은 F 구역 끝자락에 설치한 흡수 장치를 잠시동안 무력화 시킬 만큼 강했지만 콜트와 베타, 그리고 채림이 그 힘의 흡수와 차단을 돕고 있다.
영혼과 육신이 쪼개지는 와중에도 베리는 지팡이를 불끈 쥐어틀으며 바닥에 내리꽂았다.
「▼변혁 」
끼릭.
「▲변혁 」
“뭐─”
라 하기도 전에 한순간에 뒤집히는 시야.
미쳐 반응하기도 전에 어느새 내 몸은 꼬마의 시절로 돌아가 바닥에 자그마한 손을 짚고 있었다.
거인과 힘이 날뛰던 공간이 아닌 현대의 건물이 가득 찬 곳.
내 앞에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베리가 보인다.
그는 나의 상태를 확인한 후 급히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딜… 아.”
나는 검을 휘두르려다 멈칫했다.
검에 비해 내 손이 너무 작아졌기 때문이다.
“고약하군.”
‘코드 사용.’
특이점이 발동하고 변했던 나의 몸이 정상태로 돌아온다.
본래라면 관리자의 눈치를 봐야 했기에 이런 식으로 사용할 수 없었지만. 뭐, 지금은 아무 상관 없겠지.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래전 내가 보았던 현대의 도시의 모습.
하지만 아직 완벽하지 않은지 익숙한 몬스터들이 정장을 입는 등 현대의 옷을 입고 돌아다니고 있다.
하늘에는 용의 헤츨링이 비둘기처럼 날아다니고 건물로 된 거인 역시 우뚝히 서있다.
“...다들 갇힌 건가.”
감지 영역을 살펴보니 F 구역이라 명칭 한 대륙의 일부 자체가 이미 다른 세계로 잠식당한 상태.
그 안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물론 다윤이나 채림 같은 나의 길드원들 역시 변해있는 상태다.
힘도 약화되었 을테니 이 상태에서 무작정 검을 휘두르다 휘말리면 반드시 죽겠지.
미간이 찌푸려진다.
“하페.”
반응이 없다.
검을 위로 든다.
파직. 하고 무형의 번개가 내리친다.
아래에서 위로.
땅에서 솟구친 번개가 하늘로 쏘아지고 유일하게 그 신호를 알아차릴 수 있는 목소리가 내 귓가에 울려 퍼진다.
─우선 내 쪽으로 와. 현상 변질은 상대하기 까다로워서.
나는 하페의 위치를 파악한 후 그쪽으로 이동했다.
***
“허억… 허억…”
베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빌딩 숲 사이에 간신히 몸을 추슬렀다.
과연 최강자던가.
육신을 비롯한 영혼의 일부가 절단되고 찢겨나가는 과정은 평범한 초월자로서는 결코 버텨낼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관리자의 안배가 없었다면 진작에 정신이 무너져 영혼이 자연 소멸되었으리라.
아무리 영혼이 재생된다 한들 영혼은 정신적인 존재.
정신이 무너진다면 영혼은 제 틀을 유지할 수 없다.
“여기가. 용사들의 고향인가.”
베리는 찢고 터져나간 로브 대신 셔츠 차림의 직장인의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역시 변질된 공간과 어울리는 복장을 입으니 한결 나아지는 기분이다.
“......”
사람들이 지나간다.
차를 대기 위해 곤란한 표정을 짓는 사람.
작은 카페에서 커피를 판매하는 사람.
학교를 가기 위해 등교하는 사람.
다들 평화롭게 각자의 인생을 살아간다.
비록 현대와 다르게 오크와 고블린, 엘프와 악마 등 다양한 종족들이 인간의 옷을 입고 돌아다니지만 그 근본은 다르지 않았다.
“만일 나 역시도 이런 생이었다면.”
그랬다면 그런 삶을…
베리는 고개를 젓는다.
의미가 없다.
‘이 이름을 가지고 있는 한, 장소가 어디든 상관없겠지.’
에르다스 베리는 이름을 가진 순간부터 정해진 운명이었다.
김윤은 그것을 어떻게든 이용할 생각이었고.
자신을 도운 것도 우연을 가장해서 기만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굉장히 분노했다.
수많은 루프로 나와 형을 실험하고 이용해, 종국에는 훌륭한 병기로 사용하기 위해서.
그분께서 어리석은 나를 일깨워 주시고 구원해 주셨으나 그와 자신의 관계가 끝난 건 아니다.
그저 이용만 당해야 했던 형의 복수를 위해서라도.
“소중한 사람을 이용했으니. 똑같이 갚아줘야지.”
내가 그러했듯이.
그의 소중한 사람 역시 고통받게 할 것이다.
우선 그의 연인부터 시작해 볼까.
***
“다윤아! 뭐해?”
“으, 응. 잠깐만.”
“뭔 일 있어? 속 안 좋아 보이네.”
다윤은 자신을 걱정해 주는 트롤 여학생을 보고 진땀을 흘렸다.
앞으로 일어나는 어떤 상황에도 당황하지 말라는 윤 씨의 말이 있긴 했지만 이런 상황이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아~ 화장 완전 망했네. 하며 볼 터치를 하는 트롤 여학생이라니.
시체를 보고도 어지간하면 멀쩡한 다윤도 버티기 힘들 정도의 광경이었다.
“아냐. 가자.”
“그래!”
트롤 여학생은 룰루랄라 하며 앞서 나간다.
주위를 둘러보니 가지각색의 종족을 가진 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모습.
‘로드리아 였나. 윤 씨의 환각 속에서 나온 내용과 비슷해.’
비록 자신은 겪지 못했으나 이러한 내용이었다는 걸 얼추 들었던 적이 있다.
그때는 환각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완전히 실체화된 상황이다.
즉, 저 트롤 여학생도, 식빵을 문 체 뛰어가는 엘프도, 지각한 학생을 윽박지르는 기사단장도 다 진짜라는 소리.
초월의 힘이 없는 이들이기에 기억과 능력을 조작당했지만 그들 하나하나는 다 진짜였다.
‘...나도 약해졌어. 이대로 가다간.’
비록 영혼의 격은 그대로라 맨손으로 대전차를 부술 정도로 강하긴 하다.
하지만 예전처럼 산을 가르거나 낮밤을 뒤바꾸는 등의 행위는 할 수 없었다.
지금은 일단 상황을 파악할 때까지 순응하는 수밖에.
그렇게 교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냐아~”
“레빗?”
다윤은 사물함 위에 올려져 있는 고양이 형태의 레빗을 보고 한 걸음에 달려들었다.
레빗은 솜방망이 같은 손으로 다윤을 밀어내며 하악 거렸다.
“진정하라냐! 주인님은 무사하니까.”
“윤 씨의 위치를 알아?”
“알다마다.”
주황색 고양이 레빗은 우쭐한 표정을 지으며 꼬리를 살랑거렸다.
“나와 주인님은 깊게 연결되어 있으니 같은 공간 안이라면 어디든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냐.”
“그럼 지금이라도!”
“물론 가는 건 다른 문제다냐.”
레빗은 다윤의 얼굴을 붙잡고 뒤로 돌렸다.
지금은 평범한 고양이 일 텐데 뭔 힘이 이렇게 쌘 건지.
고개가 강제로 돌려진 다윤의 시선에는 의문스러운 학생 하나가 자신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다들 학생의 본분을 다하고 있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태도의 누군가.
‘뭐야?’
‘우리가 맞지 않는 행동을 한다면 저게 우리를 죽일 거다냐.’
‘죽여?’
안경을 낀 학생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다시 돌아 책을 읽는다.
언뜻 보면 우리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지만 초월자이자 오래된 싸움을 한 레빗과 다윤은 알 수 있었다.
온몸이 오싹할 정도로 살기를 보내고 있다고.
“...그러면 기다리라는 소리야?”
“다행히 주인님은 코드로 멀쩡해진 거 같으니 곧 이쪽으로 올거 다냐. 그때 빠져나가면 된다냐.”
“으음…”
과연 그렇게 쉽게 일이 진행될까?
처읍부터 뭔가 의구심이 들었지만 점점 마주할수록 그 생각은 커지고 있다.
“꺄아아아악!!”
그리고 그 생각은 너무나도 쉽게, 그리고 빨리 다가왔다.
***
“일어나시는 겁니닷…!”
“일어나라. 언제까지 자고 있을 거지.”
“우우!”
“...?”
채림은 눈을 뜨며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힘이 줄어든 자신의 몸.
분명 자신은 힘을 조금씩 흡수하며 반쯤 알딸딸한 상태였는데…
잠깐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보니 세 마리의 소환수들이 자신의 시야를 어지럽히고 있다.
게다가 여기는…
“지구잖아!”
“지구가 아니다.”
“맞습니닷…! 여긴 다른 세계인 것입니닷…!”
“우우우웅!”
“그래…”
아니면 아닌 거지 되게 뭐라 하네.
괜히 심기가 불편해진 채림은 부스스한 머리를 뒤적이며 창문 밖을 바라본다.
확실히 이상한 생물이 교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것을 보니 정상은 아니었다.
“어떻게 하지? 길드장님이 말한 상황에는 이런 건 없었는데. 힘도 약해진 거 같고.”
채림의 능력의 본질은 남의 힘에 있다.
상대가 강하면 강할 수록 채림 역시 강해지는 것.
하지만 이렇게 실체가 불분명한 대상에게는 채림의 능력은 한없이 약화된다.
그렇다고 이 침식된 세계 자체의 힘을 모조리 흡수하기에는 아직 정신이 너무 불안정하고.
“우선 나가보는 게 어떻겠나. 주위를 살펴서 정보라도 수집하는 게.”
“...그게 좋을 거 같네요.”
용용이의 말을 듣기로 한 채림은 대충 옷장에 옷 몇 개 걸치고 문을 나섰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