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9화 〉 31. 광대의 귀환 (1)
* * *
***
초월자가 존재하지 않는 행성, 무르무르에는 수많은 생명체가 살았다.
그들은 각자의 인생과 서로 간의 인생을 공유하며 살아갔고 그중 하나인 ‘광대’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패 돌려.”
“광대는 또 왔어? 저놈만 오면 따질 못하는데…”
“하 씨… 수작 부리지 마라 손모가지 날려버릴 테니까.”
“근데 저놈 여자야 남자야?”
조명 하나에 의지하는 어두운 공간 속.
테이블 위에는 카드들과 은화와 금화들이 놓여있다. 그 주위로 사람들이 둘러 앉아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시작하시죠.”
빨간 모자를 쓴 광대가 있었다.
***
“또! 다 잃었어!”
“저거 진짜 사기 아니야?”
“다 뒤져봐!”
“호호. 무슨 소리를.”
광대는 두 손을 들며 자신의 소지품을 다 꺼내놓았다.
확실히 조작의 증거는 찾아볼 수 없는 물건들.
사람들은 꺼림칙한 시선으로 광대를 노려보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광대는 이곳 모두가 덤벼도 혼자 이길 수 있는 무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렇다고 공권력을 동원해 상대하기에는 애초에 이들이 하는 도박 자체가 불법이었다.
만일 광대를 끼워 끼워주지 않는다면 큰 화가 들이닥칠 게 뻔하고.
“에이 퉤!”
“돈만 날렸네.”
“저놈 피해서 가야겠어. 저놈은 여기 사나?”
매연이 피어 올라오는 도시 외곽.
폐쇄된 공사장의 숨겨진 도박장은 오늘 하루 문을 닫았다.
홀로 조명이 비치는 어두운 테이블에 앉아 금화를 빙그르르 돌리던 광대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는 고민했다.
“시시 하단 말이죠…”
이곳은 왕국의 시대가 끝이 나고 새로운 문명이 태동하는 시대.
급박한 발전을 이루는 세계는 빈틈이 많았고 그틈에 인생 한방을 노리고 도박판에 뛰어드는 사람이 많았다.
광대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도박이란 손가락을 구부리는 것보다 쉬운 일이니까.
“흐음…”
광대는 손에 들린 금화를 순식간에 5개로 늘린 뒤 허공에 빙그르르 돌려 떨어뜨리게 했다.
투두두둑…
정확히 앞면이 나오는 5개의 금화.
이후 수십 번을 더 그리했지만 계속 앞면만이 나왔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녀의 능력.
초월자나 신과 같은 힘은 아니지만 특수한 능력을 타고났다.
모든 ‘확률’을 조작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내기.
그것이 여태껏 모든 도박판에서 단 한 번도 지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다.
“이제 뭘 하죠?”
오래전 하위신과의 내기를 통해 그의 수명을 모조리 앗아간 이후 그녀는 수많은 인생을 살아왔다.
황제, 기사, 농부, 갑부, 거지, 상인, 광부, 광대…
때로는 자신의 모습을, 때로는 성격을, 때로는 가진 능력을 바꾸면서.
내기와 확률 조작을 통해 수천 번의 다양한 인생을 살아온 그녀는 지루함을 느꼈다.
신이 되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라 금방 다시 모습을 바꿔 인간 세상으로 내려왔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정한 게 광대였다.
뒷골목의 지배자. 모든 도박을 성공시키는 도박사.
그렇게 암암리에 지내다 보니 또 다시 지겨워졌다.
슬슬 신분을 바꾸고 새로운 인생을 살 때가 된 거 같다.
이젠 뭘 할까. 신 국가의 왕이라도 돼야 하나?
아니는 혁명이라도 일으켜볼까?
터업.
하늘로 솟아오르기를 반복하던 금화를 잡아챈 광대는 금화를 찌그려트렸다.
“아니죠. 아니죠. 아직 하나가 남지 않았습니까.”
인류가 시작될 때부터 있던 자신이 해보지 못한 단 하나.
‘행성신.’
행성의 최고 권력자와 내기를 한다.
***
행성신은 광대가 익히 아는 자였다.
행성 전체에 영향력을 뿌리는 초월자 같은 존재.
그러나 초월자는 절대 아닌 신.
“오랜만이구나, 에타.”
“위대한 신이시여. 소인이 복귀했나이다.”
과거 사용했던 신분 중 하나인 하위신, 에타의 모습으로 찾아간 광대를 보고 행성신은 기쁘게 그녀를 맞이했다.
에타는 이미 내기를 통해 모든 힘과 수명을 잃고 영면에 들었지만 행성신으로서는 단지 기나긴 수련에 빠졌다고만 알고 있었다.
광대의 능력은 행성신조차 모를 정도의 특수함과 정교함을 가졌다.
이미 그 수준은 일개 행성 단위를 넘은지 오래였다.
“부탁이 있사옵니다.”
“무엇이냐. 내 자네를 3000년 만에 맞이하니. 그 어떤 부탁이라도 내 기꺼이 들어주마.”
“그렇다면.”
에타는 행성신을 이끌었다.
그와 에타의 시선에는 작은 인간 둘이 보였다.
그들은 싸우고 있다.
그것도 제대로 된 무기 하나 없이 치열하게.
저 둘 중 하나는 필시 죽을 것이다.
“가엾은 이들이구나.”
“소인도 그리 생각합니다. 저들에게도 기회가 주어져야 된다 생각합니다.”
“에타. 모든 이들에게 기회는 주어진다. 단지 그 크기가 다를 뿐이야.”
“옳은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째서 말이냐?”
행성신은 조금은 다른 자신의 하위 신을 보고 물었고 에타의 모습을 뒤집어쓴 광대는 웃음을 감추며 답했다.
“저들은 그 작은 기회조차 더 큰 기회를 가진 자에게 빼앗긴 이들입니다. 저들이 싸우는 이유도 더 큰 기회를 가진 자가 그리하라 시켰기 때문이죠.”
“......그렇구나. 참으로 불쌍한 이들이다.”
그는 다소 측은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면서도 딱히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그에게 있어 저들은 태어나고 죽는 수십, 수백만의 사람 중 하나니까.
그들 하나하나를 다 가엾다고 돌봐줄 수 없는 노릇이다.
광대는 그 모순을 파고들었다.
“저는 저들을 구할 생각입니다.”
“하지 마라. 한번 구한다면 다른 이들 전부를 구해야한다.”
“그리해야 한다면 그리할 것입니다.”
“왜 이리 어리석어진 것이냐. 너는 모두를 구할 수 없다.”
그래, 모두를 구할 수 없다.
좋은 말이다.
광대는 입을 감춘 뒤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그렇다면 저와 내기 하나 하시겠습니까?”
“...뭐?”
에타의 기다랗고 매끄러운 흰색 손이 이제 막 쓰러진 노인 남성 하나를 가리킨다.
그 뒤로 깔깔 웃는 고품 있는 옷을 입은 중년 남성과 여인.
그리고 간신히 몸을 지탱하며 숨을 몰아쉬는 젊은 남성까지.
“저 노인은 저기 웃고 있는 상인 부부에게 빚을 진 남자입니다. 그냥 빚을 진 게 아닌 같은 물건을 판다는 이유로 가게를 망하게 한 뒤 강제로 계약를 맺었습니다.”
“저기 젊은 남성은 오래전 상인 부부에게 주워다 키워진 아이입니다. 단, 자식으로서 키워진 게 아닌 그저 노예로서 키워진 불쌍한 아이죠. 누가 이기든 불쌍한 처지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둘 중 누가 이기는지에 대한 내기이느냐?”
행성신은 싸늘하게 물었고 광대는 고개를 저었다.
“설마. 저는 그런 싸움을 구경하는 취미가 없습니다. 단지 가능성을 보는 것입니다.”
“가능성?”
“예. 저 노인이 기적적으로 젊은 아이를 제치고 저 상인 부부에게 한방 먹이는 가능성을요.”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노인이 과거에는 제법 힘을 쓴 듯 하나 지금은 뼈가 다 ?았고 고생을 많이 해 힘도 별로 없었다.
사실상 젊은 아이를 저렇게 몰아붙인 것도 기적 같은 일.
아무리 기적이 더 일어난다 한들 저 노인이 중년 부부까지 공격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헛된 망상이구나. 네가 힘을 직접 주지 않는 한 저 노인은 절대 이길 수 없다.”
“그러니 내기 아닙니까. 전 아무런 힘도 주지 않습니다. 그저 노인이 한방 먹인다에 가능성을 보는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반대에 거마. 혹시 원하는 게 있느냐.”
행성신은 물었고 광대는 미칠듯한 환호를 참아냈다.
역시 자신보다 강한 자를 속일 때가 제일 짜릿하다.
“힘을 주십시오. 모두를 구할만할 힘을.”
“...어리석구나. 결국 내기도 인간들을 위한 것이냐.”
“그게 저를 위한 일입니다.”
너무 그렇지요.
“...어리석은. 좋다. 내기에서 네가 이긴다면 내 나의 힘을 떼어 너에게 주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혹시 원하는 것이 있으십니까.”
“되었다. 네 어리석음을 깨닫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어리석어?
누가?
자신의 자식 같은 하위신이 죽은 것도 모르는 신이?
광대는 미칠듯한 웃음을 감추며 내기의 시작을 알렸다.
부부의 호통과 함께 젊은 아이는 눈을 질끈 감은 체 나무 몽둥이를 휘두른다.
시야가 가려짐과 심리적 거부감 때문에 노인의 옆을 때린 몽둥이.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노인이 이를 악물며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 몽둥이를 던진다.
안타깝게도 아이의 옷 자락을 스쳐 지나가는 몽둥이.
부부는 깔깔 웃고 노인은 허망한 표정을 지었으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쏘아진 몽둥이는 포물선을 그린 뒤 그대로 아래로 추락했다.
몽둥이는 땅바닥에 있던 돌을 튀기고 그 돌은 공사 중이던 땅 위 수도관에 부딛혀 누수를 일으켰다.
물줄기가 부부를 향해 쏘아진다. 부부는 인상을 쓰며 우산으로 대충 물을 막았으나 우산에 튕겨 하필이면 부실한 가게의 천장 틈 사이를 가격했다.
오래전 노인의 가게를 망쳐놨기에 보수되지 않는 공간.
손쓸 틈도 없이 천장이 그대로 가라앉아 부부 모두를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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