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 #1. 아마도 소설 속의 슬라임? (2)
[열 감지(F) Lv.1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열 감지(F) Lv.1 → 열 감지(F) Lv.2]
열 감지를 얻고, 조금이지만 시간의 흐름도 알 수 있게 됐다. 밤이 되면 해가 지고 기온이 떨어지는 만큼 낮과 밤만큼은 구분할 수 있었다.
밤이 됐으니 자야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슬라임은 피로를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수면이 필요 없는 몸. 인간일 때는 바라마지 않는 능력이었지만 슬라임이라 영 아쉬웠다.
분명 생각은 뇌로 할 텐데… 조금 신기했다.
슬라임은 단세포 생물일 터. 뇌 같은 고급 기관이 있을 리 없는데 대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생각해봤자 답은 나오지 않는다.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애초에 사람이 슬라임이 된 것 부터가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쓸데없는 생각보다 성장에 집중하는 게 더 급하다.
전체적인 경험치를 몰라 함부로 말할 순 없겠지만, 포식으로 얻는 경험치도 늘어난 것 같다.
레벨이 오를수록 요구 경험치가 늘어나는 건 모든 게임에 적용되는 공통 사항인데 포식의 레벨 또한 올라가서인지 이전과 비슷한 횟수로 치환하더라도 레벨이 올랐으니까.
어쩌면 포식이 아니라 동물 때문일지도. 양질의 먹이가 높은 경험치를 주는 건지도 모른다. 이럴 때마다 상태창이 간절해졌다. 지표가 있으면 목표를 세우기도 쉬울 텐데.
[경험치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Lv.4 → Lv.5]
[스테이터스를 부분 개방합니다]
마침내 고대하던 순간이 다가왔고, 소리 없는 비명이 내 안에서 메아리쳤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스테이터스라고 외쳤더니…
[래서 슬라임 Lv.5]
'……?'
[래서 슬라임 Lv.5]
……
[래서 슬라임 Lv.5]
몇번을 반복해도 마찬가지였다. 내 종족과 레벨 밖에 알려주지 않는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스테이터스냐? 심지어 종족은 래서였다.
래서(Lesser)― 더 적은. 덜 중요한.
그냥 슬라임인 줄 알았는데 심지어 열등종… 어쩐지 약해도 너무 약하다 싶었다.
그럼 보통 슬라임은 이것보다 더 강하다는 뜻일까?
'그러니까 몬스터겠지.'
그리고 난 몬스터 언저리고. 시스템이 들으라는 듯 말했다.
[스테이터스가 부분 개방되어 있습니다]
부분 개방… 그게 어쩐지 꼬우면 아시죠? 라고 밖에 들리지 않았다.
'슬라임이라는 것도 5레벨이라는 것도 알고 있는데 경험치는 보여줘야 할 거 아냐?'
끝까지 묵묵부답인 것에 한숨이 나왔다.
'시스템. 당신은 양심도 없습니까?'
하는 수 없이 일단 스킬이라도 찾아볼 겸 획득 가능한 스킬들을 확인했다.
[획득 가능 스킬 목록]
1. 촉수(F)
…
14. 관찰(F)
무려 14가지로 늘어난 스킬 목록이었지만, 망설이지 않았다.
[관찰(F) Lv.1 스킬을 획득했습니다]
소설이나 게임에서 관찰이나 감정 같은 스킬은 하나같이 사기였다. 이걸로 스스로 관찰해 스테이터스를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희희낙락하며 관찰을 사용한 순간.
'?'
놀랍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뭔가 잘못된 건가 싶어 관찰을 휘갈기듯 써댔지만,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분한 마음에 포기하지 않고 관찰을 난사했지만, 여전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헛짓거리 하지 말고 레벨이나 올리라는 뜻이리라.
'내가 더러워서 강해진다. 진짜로.'
있지도 않은 이를 악물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애초에 이런 개고생도 하지 않았을 텐데. 저 멀리서 뜨거운 열을 감지하곤 은신을 사용했다. 슬라임이 어떤 맛인지는 모르겠지만, 쥐가 그렇게 작정하고 달려들거나 한 걸로 보아 못 먹을 정도는 아닌 모양.
'…나도 나중에 한 번 먹어볼까?'
동족상잔이 되겠지만.
미약한이란 수식어가 붙어 걱정했는데 은신의 효과는 확실한 모양. 계속 느껴지던 열은 점점 식어갔고 머잖아 그 무언가가 완전히 떠나갔음을 알 수 있었다.
쥐보다 감지되는 열이 좀 더 컸던 걸로 보아 더 위험한 놈이었을 터.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 반대로 쥐보다 작은 열은 내 쪽에서 찾아 움직였고.
[붉은불개미를 섭취했습니다. 포만감과 경험치가 상승합니다]
'이거 살인 개미라고 불리는 그 개미 맞나?'
…모르겠다. 아무튼 일용할 양식이었다.
[열 감지(F) Lv.2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열 감지(F) Lv.2 → 열 감지(F) Lv.3]
[포식(F) Lv.3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포식(F) Lv.3 → 포식(F) Lv.4]
포식 스킬도 순조롭게 성장하고 있다. 그 와중에 찾아온 들쥐 한 마리를 더 처치하고 먹어치운 다음에야 6레벨에 도달할 수 있었다.
[경험치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Lv.5 → Lv.6]
[진화 가능 목록을 공개합니다]
갑자기 진화랜다. 보통 왕도적으로 10레벨에 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뜬금없이 6레벨에 진화 루트를 공개한다고? 진화라는 울림만 들어도 가슴이 웅장해졌다.
설레는 마음으로 시스템의 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뭐 해?'
공개한다며. 언제 하시는데요?
아무리 기다려도 시스템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관찰을 계속해 사용했더니.
[관찰(F) Lv.1 스킬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관찰(F) Lv.1 → 관찰(F) Lv.2]
'아… 실화냐?'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내 앞엔 관찰로 얻은 정보창이 떠 있거나, 시스템이 공개한 진화 루트가 열려 있을 확률이 다분했다. 하지만 이것들을 못 보는 이유? 간단했다.
슬라임이니까. 눈이 없으니까. 시력이 없으니까……!
답답함에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려는 걸 애써 눌렀다.
관찰의 숙련도가 사용할 때마다 꾸준히 올랐지만 내가 모른다면 가능성은 그것뿐. 그러고 보니 스킬 목록도 [획득 가능 스킬 목록]이었지, [사용 가능 스킬 목록]은 아니었다. 그저 획득할 수 있다는 것뿐이었지.
이가 갈렸다. 슬라임이 시력을 얻을 수 있을 리 없으니까.
혹시나 해서 촉수를 뻗어 내 주변을 건드려봤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뭔가 버튼 같은 걸 누르는 형식은 아닌 모양… 한탄하며 획득 가능한 스킬들을 확인했다.
[획득 가능 스킬 목록]
1. 촉수(F)
…
19. 미약한 후각(F)
'후각? 시각이 아니라 후각?'
그나마 다행. 후각을 얻을 수 있다면 언젠가 시각도 얻을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면 없던 의욕도 솟아난다. 당장 남은 스킬 포인트 1이 있었지만 아껴두기로 했다. 후각을 얻어봤자 당장 쓸 데도 없을 터. 나중에 필요한 순간에 사용하는 게 더 나을 테니까.
그럼 레벨도 올랐겠다, 조금 움직여 볼까?
비록 종족은 래서 슬라임이기는 해도 이 페이스대로만 가면 금방 성장할 수 있으리라. 쥐보다 더 뜨거운 열을 감지해 은신을 사용해 다가갔다. 느껴지는 크기는 쥐보다 조금 더 큰 정도였는게…
'다람쥐?'
꾸물거리는 내게 호기심을 가진 모양. 녀석도 날 찾았는지 툭툭 건드려오기 시작했다. 조금 더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자 내가 쿠션이라도 된다는 양 몸 위에 완전히 올라온 걸 느낄 수 있었다.
'……!'
놈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천천히 발을 휘감았다. 쓰다듬는 정도의 힘밖에 없었지만, 그게 여러 겹이 되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와 동시에 나는 몸을 들어올렸다.
마치 함정에 걸려 그물에 옭아진 것 같은 모양새. 당황한 다람쥐가 빠져나오려 애썼지만 소용없었고 머지않아 녀석이 잠잠해졌다.
'제법 찢어졌네.'
자칫하면 놓칠 뻔했지만 무난한 사냥이었다. 미약한 재생으로 천천히 체면적이 복구되는 걸 느끼며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청설모를 섭취했습니다. 경험치와 포만감이 상승합니다]
'청설모였어?'
다람쥐인 줄 알았는데…….
아무튼, 청설모는 일용할 양식이 되었고, 포식에 의해 경험치로 치환돼 7레벨이 되었다. 들쥐보다 주는 경험치가 훨씬 많다.
'심지어 경험치랑 포만감을 바꿔 말했고.'
원래는 포만감이 먼저였는데 이번엔 경험치를 먼저 말했다. 아마 경험치가 더 우선순위가 될 만큼 많은 경험치를 획득했다는 뜻이리라. 기대에 가득 차 [획득 가능 스킬 목록]을 열었지만, 이번에도 시각은 대신 미각만 있었다.
잠시 습득할까 고민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지금도 나뭇잎이나 곤충을 주로 먹고 있는데 미각이 생겨봤자……
'시각이 생기면… 곤충은 먹기 힘들지도?'
레벨 7에서 후각이 개방되었으니 다음 레벨인 8에서 시각이나 청각이 개방될 것이다. 그리고 원래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니 아마도 청각부터 등장하리라.
반드시 필요한 시각이 뒤에 밀려있을 게 분명한 그 구조에 묘한 위화감을 품었다.
종종 하는 생각이지만, 마치 시스템이 왠지 나를 성장시키려고 부추기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마치 멈춰서는 안 된다는 듯이.
'에이 설마…'
***
"아니, 진짜! 이놈의, 산은. 힘들어! 죽겠는데! 왜!"
"그렇게 말 하는 거 보면 아직 멀었다. 빨리 안 올래?"
"아 쫌! 선배 같이 가자고요!"
"얼씨구. 올라온 지 2시간밖에 안 됐다. 너 그러고도 우리 클랜 맞아?"
"아씨!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이에요?!"
"무슨 상관은? 이젠 아주 맞먹으려 드네?"
"아니! 그런 게 아니라요!"
"배고프다~ 빨리 올라가자."
선배의 재촉에 후배가 죽을 둥 살 둥 산을 올랐다. 하지만 금세 또 차이가 벌어지고 만다.
"아 진짜! 2시간이면 많이 왔잖아요. 아직 멀었어요?"
"너 진짜 언제 철들래?"
"저는 헌터도 아니잖아요! 선배가 헌터지! 전 이제 사무직이라고요. 사.무.직!"
딴에는 맞는 말이라 수긍했지만, 금세 눈을 부라렸다.
"사무직이면 외근 안 해도 돼?"
"대체 누가 산에서 외근을 해요! 선배가 저 데려온 거잖아요. 차라리 업어주면 안 돼요?"
떼를 쓰는 후배에게 선배는 푹 한숨을 쉬었다.
"내가 아니라 팀장님이 너 데려가라 하신 거다. 빨리 좀 가자. 응?"
잠깐 기다리면 알아서 올 줄 알았더니 기다려도 올라올 기미가 없다. 어쩔 수 없이 내려온 선배가 딱밤을 갈겼고, 후배는 이마를 감싸쥐고 아파라했다.
"뭐 하는 짓이에요!"
"내가 할 말이다. 부서도 옮기더니 이젠 일도 안 하려고?"
"그게 아니라! 저거 보세요!"
후배가 가리킨 곳을 쳐다보니, 슬라임 한 마리가 꾸물대고 있었다.
"저게 뭐?"
"……저 슬라임. 묘하지 않아요?"
"묘하긴 개뿔이. 쉬려고 아주 발악을 다 하는구나. 응?"
"아니 그게 아니라! 보라니까요?"
보여주겠다는 듯 한 걸음 다가가자 슬라임이 축 늘어졌다. 심지어 색도 변한 것 같은데……
"……?"
"봐요. 신기하죠?"
후배가 보란 듯 뒷걸음쳤지만, 이번엔 축 늘어진 채로 움직일 기미가 없다.
그에 당황한 후배가 다가가고 물러나고를 반복했지만 슬라임은 움직이지 않았다. 곧 선배는 코웃음을 치며 후배의 머리를 헝클었다.
"이럴 시간에 올라갔으면 진작 일 끝났겠다."
후배는 마지막까지 발악했지만, 결국 목덜미를 잡힌 채 끌려가고 말았다.
***
타버릴 것처럼 뜨거운, 무척이나 강렬한 열이었다.
그 존재감만으로 녹아버릴 것 같아 반사적으로 은신을 사용했을 정도로.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하기에 결국 만일을 위해 기척 감지까지 습득했다.
그 무언가는 분명 나를 인식하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가만 있었더니 멀리 떠나간 모양.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운이 좋았다.
'……놓아준 건가?'
그 짧은 순간에 은신이 Lv.1에서 Lv.4까지 올랐다. 아무래도 은신도 통하지 않은 것 같고… 대체 뭐였던 걸까?
'빨리 강해져야겠다.'
한숨이 새어나왔다. 청설모를 잡았던 날로부터 반나절이 지나서 Lv.8이 되긴 했지만, 획득한 스킬은 시각이 아니라 청각. 예상대로 Lv.9가 되어야 시각이 생길 모양.
'청각이라고 해도…'
인간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할 정도. 도저히 써먹을 게 못 된다.
'……오.'
한탄하는 사이 열 감지가 무언가를 느꼈다. 쥐보단 작은데… 쥐보단 작은 것 같은데 제법 높은 곳에 있다.
나무에 올라탄 곤충같은 것들일까? 미약한 은신을 사용하자 그것이 내게 관심을 표했다.
'은신 스킬인데… 왠지 미끼 스킬처럼 됐단 말이지?'
분명 은신 스킬답게 존재감은 지워진다. 하지만 어떻게 보이는 건지 하나 같이 다가와 호기심을 보인다.
아니나다를까. 녀석도 마찬가지로 다가와 내 위에 올라탔다. 저번 청설모때와 마찬가지로 촉수로 휘감고 녀석을 덮친 순간,
펑―!
뭔가가 터졌다. 그와 동시에 그 무언가는 유유히 내게서 빠져나갔다. 내 몸은 폭발을 이기지 못하고 산산조각으로 흩어졌고 체면적은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다. 깜짝 놀랐지만 이미 녀석은 떠나간 후였다.
'폭탄먼지벌레?'
아무리 폭탄먼지벌레라도 지름 50cm에 달하는 나를 산산조각낸다고? 그런 건 불가능할 텐데.
'그럼 뭔데?'
모르겠다.
어쩌면 몬스터일지도 모른다. 그나마 온도와 기척을 기억했으니 다음번엔 피할 수 있을 터. 조금만 레벨이 낮았다면 죽었을지도 모른다. 꼭 크기랑 강함이 비례하는 건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미약한 재생(F) Lv.1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미약한 재생(F) Lv.1 → 미약한 재생(F) Lv.2]
미약한 재생의 레벨이 오르고 다시 반나절이 지나고 나서 레벨업을 할 수 있었다.
[경험치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Lv.8 → Lv.9]
그 덕에 회복하고 바로 [획득 가능 스킬 목록]을 열람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시각은 개방되지 않았다.
[획득 가능 스킬 목록]
1. 촉수(F)
…
28. 미약한 육감(F)
그 대신, 미약한 육감이라는 스킬이 개방되어 있었다.
'육감이라…'
영어로는 식스 센스(Six Sense).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감과 같은 오감과 달리 내 몸으로 받아들인 정보가 아닌 마음 혹은 생각으로 정보를 얻는 감각을 육감이라 불렀다. 무언가 초감각적인 그런 판타지에서나 나올 법한.
'이건…'
애매하다. 육감은 애초에 확실히 정의되지 않은 감각이었으니까. 존재하는지에 대해선 둘째치고, 감각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애매모호할 정도로.
'하지만 습득한다!'
생각해 보라. 심안이라던가 육감이라던가 직감이라던가.
판타지에서는 왠지 수상해 보이고 애매한 스킬일수록 사기라고 정해져 있다. 육감은 분명 그 범주 안에 있으리라.
'이건 안 배우면 손해야.'
어차피 10레벨이 되면 미약한 시각 스킬이 개방될 게 뻔했다. 여기서 육감을 익히더라도 10레벨에 획득하는 스킬 포인트까지 하면 2개 남는다. 아마 10레벨에 개방될 미약한 시각을 획득한다고 해도 하나 남는다는 소리였다.
'도대체 언제쯤 그놈의 미약하다는 소리 좀 뗄 수 있을지.'
부디 이번만큼은 사기당하지 않았기를 간절히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