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 #7. 지리산의 괴물 늑대 (3)
후회가 밀려오는 와중에 이은하는 아직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비록 마력 갑옷은 부서졌지만, 덕분에 받은 충격은 그렇게까지 크지 않다. 아직, 아직은 움직일 수 있으니까.
특수종에 우월종이라고 해봤자 고작 워그일 뿐이니까.
아주 싸울 수 없을 정도는 아니야. 침착하게 대응한다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은하는 재빨리 배낭 하단 옆 주머니에서 병을 꺼내 던졌지만, 가볍게 피한 워그가 순식간에 간격을 좁혀 달려들었다. 곧바로 자신을 물어뜯으려 뛰어오르는 워그. 그 커다란 턱이 자신을 물어뜯기 직전, 이은하는 무언가를 던졌다.
공중에 뛰어오른 상태론 방향을 틀 수 없을 테니까. 워그는 본능적으로 날아오는 무언가를 씹었고, 그 순간―
'됐어!'
워그의 이빨에 씹힌 연막탄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주변을 완전히 덮는 데까지 걸린 시간이 고작 1초. 1초 만에 일대의 시야를 완전히 가렸다.
민간용으로 보급된 어설픈 무기가 아니라, 클랜에서 상질의 연막탄. 시야가 가려진 순간, 이은하는 망설이지 않고 바닥을 굴렀고 워그는 뒤늦게 그녀가 있던 자리를 물어뜯었다.
마력 감지가 있었기에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엔 눈속임. 눈은 가릴 수 있어도 코는 가릴 수 없으니까. 금세 자신의 냄새를 맡고 뒤쫓아오리라.
그 순간, 이은하의 입에서 주문의 말이 내뱉어졌다.
"Cover!"
재빨리 마력을 사용하자 아찔한 감각이 찾아왔다. 부족한 체력과 마력에 속을 게워내고 싶은 메스꺼움이 찾아왔지만, 가까스로 참을 수 있었다. 곧 그녀의 마력이 주문의 말에 따라 베일이 되어 자신을 숨겼다.
그래도 오래가진 못하리라. 모습을 가렸다고 냄새까지 지워지는 것은 아니었으니 금세 자신을 찾아낼 터… 급한 손놀림으로 배낭에서 물건을 꺼냈다.
'찾았다.'
마개를 열어 단숨에 들이켰다. 그 지독한 쓴맛에 인상을 찌푸리며 손목으로 입술을 훔치며 거센 숨을 몰아쉬었다. 호흡하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옆구리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져 눈살을 찌푸리며 잘근잘근 입술을 씹었다.
아무래도 아까 부딪쳤을 떄, 갈비뼈가 부러진 모양…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위기감에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렇게 배낭에서 꺼낸 물건을 재빨리 늘어놓은 순간, 마력의 장막이 크게 흔들렸다.
'벌써?'
워그의 두 번째 공격이 오기 전에 두루마리, 아니 주문서를 쥐었다. 쾅- 하고 다시 한번 장막이 흔들리는 순간, 망설이지 않고 주문서를 찢었다.
단거리 이동 주문서. 시전자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10미터 이동할 수 있는 유용한 물건이지만, 그 정도 거리는 잠깐 시간을 버는 정도에 불과하리라.
'제발…!'
빛이 감싸는 것과 동시에 엄폐막이 부숴졌다. 워그가 크게 턱을 벌리자, 송곳니부터 어금니까지 턱 안의 전부가 하나하나 눈에 들어왔다.
이대로 먹히고 만다고 그렇게 생각한 순간, 빛무리에 휘감겨 이은하의 모습이 사라졌고, 워그의 턱은 애꿎은 허공만을 씹어삼켰다.
'……!"
아슬아슬하게 살았지만 안도하고 있을 틈은 없다. 곧바로 세그웨이를 구현해 올라탔다. 그나마 포션을 들이켜 숨 쉬는 게 조금 편해졌다. 아무리 그래도 갈비뼈가 단번에 붙고 상처가 회복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렇다해도 과연 얼마나 도망칠 수 있을까?
무전기의 전파도 잘 통하지 않는 먼 거리. 지원은 기대할 수 없을 것 같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워그의 시속은 100km 내외. 특수종인 녀석은 그것보다 빨랐으면 빨랐지 느리지는 않으리라.
결국, 싸움은 피할 수 없다는 뜻. 공간 왜곡이 겨우 발목을 잡는 것 밖엔 되지 않는 몬스터를 상대로 맞서 싸워야만 한다.
'만약……'
계속 헌터를 하면 어땠을까 하는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뛰어난 원석이라고 해도 가공하지 않으면 보석이 되지 않는 것처럼. 결국 선택한 건 자신이었으니 누구도 탓할 수 없다.
'……!'
마력 감지로 느낀 움직임. 세그웨이로 제법 거리를 벌렸을 텐데 어느새 바로 뒤까지 바짝 쫓아오고 있다. 검은 선. 뛰어난 투수의 공을 일반인이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처럼, 워그는 한 줄기 선이 되어 쫓아오고 있었다. 기겁한 이은하는 급히 배낭을 풀어 뒤로 던졌다.
갑자기 날아오는 배낭에도 놈은 겁먹지 않고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달려들어 물어뜯더니 순식간에 넝마로 만들어 버린다. 하지만 그 덕에 아주 조금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냥 죽어줄 순 없다. 어떻게든 발버둥치고 발악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남은 물건이 없다. 쓸 수 있는 건 전부 썼으니까.
연막탄은 던졌고, 포션은 마셨고, 주문서는 찢었다.
각오를 다진 이은하는 그 자리에 멈춰 마력을 끌어올렸다.
떠올리는 것은 불규칙한 코일 형태와 나선형의 말단. 같은 무게의 강철보다 몇 배는 질기다는 자연이 내린 최고의 섬유. 머릿속에서 떠올린 구조체가 엮이고 엮여, 단백질 대신 마력을 빌어 만들어져 간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이 약 2초 남짓.
'온다……!'
자신을 쫓아오는 검은 선이 결국 다가오고야 말았다.
하지만 준비는 이미 끝마쳐두었다. 남은 건 어떻게든 타이밍을 맞춰 마법을 구현시킬 뿐.
평소대로였다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을 테지만, 여기까지 달리며 피냄새를 맡고 계속되는 저항에 짜증이 난 상태였다. 머릿속엔 오로지 물어 뜯어 죽이고 말겠다는 생각뿐. 그래서, 움직임이 단순해졌다.
――아무리 빨라봤자 직선적인 움직임이라면.
"―β-Sheet!"
검은 선이 다가온 순간, 구현한 마법이 늑대를 막아선다. 갑자기 생겨난 그물망에 당황한 워그는 발악하듯 움직였지만, β-Sheet. 그 정체는 거미줄. 그물망 전체에 가득한 점성이 쫓아온 워그에게 조여들고 있었다.
"―――?!"
평범한 거미줄이었다면 잠깐도 막을 수 없었을 테지만, 그녀의 마력으로 빚어진 거미줄은 평범한 거미줄보다 훨씬 두껍고 질겼다. 설사 특수종에 우월종이라 하더라도 쉽사리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도 가만히 두면 벗어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터.
"Distort!"
그러니까 여기서 끝내야만 한다. 놈이 붙잡혀있는 동안 어떻게든 반드시. 점성이 있는 거미줄이 워그의 전신에 달라붙도록 공간을 왜곡시켰다. 빠져나오려 안달힘을 쓰는 워그를 보며 현기증을 느꼈다.
앞으로 몇 번이나 마력을 쓸 수 있을까?
포션으로 잠시 진정시켰던 정신 고갈 현상이 더 심한 반동과 함께 찾아왔다. 3번? 기껏해야 2번이겠지.
"Pile!"
뾰족한 말뚝이 거미줄과 실랑이하는 워그의 위에 구현됐다. 턱 아래까지 치솟아오르는 구역질을 억지로 눌렀다.
"Embiggen!"
또 한 번의 주문. 1초. 이은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의 의식이 끊어졌었음을 인지하지 못했다. 구체화된 말뚝이 거대해지며 크기를 부풀렸다. 거대하고 날카롭게 빛나는 말뚝.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를 간신히 지탱한 그녀가 입술을 씹으며 팔을 위에서 아래로 내렸다.
그래도 이젠 끝.
움직이지 못하는 워그를 거대한 말뚝이 내리찍었다. 줄 끊어진 샹들리에가 추락하듯 떨어진 말뚝의 끝이 어떤 반전도 없이 늑대를 꿰뚫었다. 단말마도 없이, 비명도 지르지 않고 말뚝에 꿰뚫린 워그는 그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자 긴장이 풀려 저도 모르게 주저앉았다.
……워그는 쓰러졌다. 해냈다. 살았어, 살아남았어……!
성취와 기쁨이 찾아왔다. 살아남았다는 안도에 날숨을 흘렸을 때, 이은하의 눈이 멍해졌다.
쓰러진 워그의 너머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또 한마리의 워그. 비록 갈비뼈가 드러나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거로 보아 또한 온전한 상태는 아니었으나…
"―――."
……그건 자신이 더하다. 그래. 워그는 두 마리였다. 처음 기습에 당해 공간 왜곡으로 미처 끝장내지 못했던 남은 한 마리가 쓰러진 커다란 워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그것이 곧 시선을 돌려 자신을 쳐다봤을 때, 이은하는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 공간 왜곡으로 쓰러뜨리면?'
지금 쓰러뜨린 녀석에게는 통하지 않겠지만 지금 이 녀석이라면 가능하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쥐어짜내면 아직 한 번은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다음엔 분명 마력 고갈이 찾아오겠지만, 하지 않으면 확실하게 죽는다. 하지만… 한 번 당했던 만큼 놈은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
저렇게 경계하고 있는 데 정말 맞출 수 있을까? 만약 피하면 어쩌지? 사용했는데 쓰러뜨리지 못하면 어쩌지? 마력을 끌어올리는 와중에 정신 고갈이 찾아오면 어쩌지?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불안을 불러 온다. 워그가 낮게 우는 소리가 그녀의 청각을 두드려 현실로 끌어왔다. 그리고 그 현실 속에서 그녀는 더한 절망을 보았다.
"―――.'
낮은 숨소리. 간신히 쓰러뜨렸던 워그가 죽지 않은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말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속으로 몇 번이나 주문을 외쳐봐도 안에서 메아리로 울릴 뿐.
워그는 두 마리 모두 살아있다. 설령 운 좋게 워그를 쓰러뜨렸다 하더라도 1시간… 아니, 30분도 되지 않아 일어난 또 한 마리 워그가 자신을 물어 뜯고 말리라. 그건, 절대 피할 수 없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머리가 새하얘진다. 어떻게든 죽음을 피할 방법을 궁리하지만, 그런 게 남아있을 리 없다. 주저앉은 채로 뒷걸음질 치며 이은하는 자신의 등이 나무에 닿았음을 깨달았다.
오지 말라고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소리가 메아리친다.
그르르 끓는 낮은 위협음. 그 턱이 벌어지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빛에 반사된 순간, 현실을 자각했다.
……쓰러뜨려도 죽고, 쓰러뜨리지 못해도 죽는다.
100% 확실하게. 현실성 있게 다가오는 늑대의 모습을 한 괴물이, 그녀의 정신을 송두리째 쥐고 흔들었다.
살고 싶다고, 제발 살려 달라고 떨면서 중얼거렸다. 누구라도 좋으니까 제발 살려 달라고……!
성큼 다가오는 죽음에 더 물러날 곳이 없어진 순간, 끌어오른 마력이 일그러진 정신에 역류했다.
끊어져가는 의식― 그 직전에 이은하는 멍하니 생각했다.
'죽기 전에 주마등이 보인다던데……'
아. 그건 거짓말이었구나. 확실한 죽음의 순간에도 주마등은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마지막으로 그녀가 본 것은 초록색 점액질 덩어리일뿐이니까.
***
맞바람을 맞으며 질주한다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을 줄은 몰랐다. 종종 오토바이를 보며 미쳤나하는 생각을 한두번 한 게 아니지만 그게 좀 이해가 된다. ……아니 사실 목숨 걸고 달린다는 게 잘 이해는 안 되지만.
아무튼, 그 질주에 여태 받았던 스트레스가 단번에 날아가는 듯 했다. 바이크를 타는 사람들과는 달리 약한 재생과 물리피해 감소가 있는 한 충돌해도 무섭지 않다. 게다가 고통도 없으니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미 두 번 부딪친 뒤였다. 불가항력이었지만, 덕분에 약한 재생의 레벨이 6이 된 게 전화위복. 그래도 이젠 내리막길에 익숙해졌다. 열 감지를 잘 사용하면 나무도 피할 수 있단 걸 알게 됐으니. 그리고 무엇보다.
[멧돼지를 섭취했습니다. 경험치와 포만감이 상승합니다]
간간이 깔려있는 사체들. 누가 그랬는지는 불 보듯 뻔하다. 십중팔구 그 검은 늑대일 터. 그 버려진 사체들을 주워먹으며 수월히 15레벨까지 달성하긴 했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지리산에 서식하는 동물들이 씨가 마르게 생겼다.
치킨 런. 서로 멈추지 않는다.
나는 놈을 뛰어넘어야 했고, 놈은 무슨 이유에선지 끊임없이 먹어 치우고 있었다. 제아무리 반백 년 간 방치된 산이라고 해도 동물들의 번식력에는 한계가 있다. 놈과 내가 먹어치우는 속도는 그걸 한참이나 웃돌고 있었고.
누군가 하나가 죽기 전까지 동물들이 죽어나가는 건 멈추지 않으리라.
'…그래. 그런데.'
우뚝 멈춰 서 감지에 온 신경을 기울이자 기척이 느껴졌다.
먼저 하나는 검은 늑대. 일전 뱀사골에서 보고 두려움을 느꼈던 몬스터― 여기서 내가 넘어서고자 하는 목표.
그리고 다른 하나는 보다 거대한 에너지. 폭탄이 터지는 듯한 모습을 떠올리게 했던 거대한 힘이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지금은 무척이나 위태로워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척을 느낀 것만으로도 오싹해지는 몬스터.
[열 감지(F) Lv.7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열 감지(F) Lv.7 → 열 감지(F) Lv.8]
[기척 감지(F) Lv.6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기척 감지(F) Lv.6 → 기척 감지(F) Lv.7]
그 존재를 느낀 순간, 감지의 숙련도가 미친 듯 차올랐다.
[선택하십시오]
'……?'
별안간 들려오는 시스템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선택? 대체 뭘 선택하라고?
[나아갈지 혹은 멈춰설지를]
…….
그게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나아가던가 혹은 멈추던가― 지금 괴물들을 감지한 순간 알린다는 건 분명 그러한 뜻이리라.
문득, 실소가 나왔다.
[미약한 육감(F) Lv.4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미약한 육감(F) Lv.4 → 미약한 육감(F) Lv.5]
육감이 내 예상이 맞는다는 듯 알려왔다.
뱀사골에서 느꼈던 것. 검은 늑대를 보고 느꼈던 두려움. 공포. 죽음……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이 한데 모여 소용돌이쳤다.
가슴이, 머리가 그리고 육감이 도망치라 소리치는데도. 죽음이 확실한데도 도망치라 말하지 않고 시스템은 내 선택을 종용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 의도가 너무 명확해 머리가 차게 식었다.
'……가라는 거구나.'
시스템은 선택을 기다리는 게 아니었다. 이미 정해놓은 선택지를 제시하고, 묻고 있었다. 내 행동을 의도적으로 이끌어내려 하고 있었다.
[나아갈지 혹은 멈춰설지를]
그 말의 뜻은, 죽음을 무릅쓰고 나아갈 용기가 있느냐고. 그렇게 묻고 있는 것이었다.
'…….'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뱀장어와 싸웠다.
검은 늑대라는 살아남을 수 없는 사선에서 살아남기 위해, 뱀사골의 주인이라는 살아남을 수 있는 사선을 향해 달렸다.
……그럼 지금은 어떨까?
지금 내게 있어 검은 늑대는 여전히 살아남을 수 없는 사선일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스스로 정상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무섭네.'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게 두렵게 느껴지지가 않아서.
이젠 도무지 스스로 정상이라고 자부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