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 #7. 지리산의 괴물 늑대 (4)
기척의 진원지까지 도착하는 데 걸린 시간은 1분 남짓.
그 짧은 시간 동안 관찰로 살필 수 있는 스킬들을 살피며 경우의 수를 떠올렸다.
쓰러져 있는 괴물같은 늑대가 깨어나는 건 시간문제. 제한된 시간 동안 나보다 훨씬 강할 게 분명한 검은 늑대를 쓰러뜨려야 한다는 건 게임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가능성이 아예 0인 건 아니었다. 기회는 있다. 그리고 그 기회는 첫 번째 기습에서 판가름날 터. 한 번으로 끝내야만 한다.
나무 위에서 때를 기다리며 은신으로 기척을 지우고 변형으로 최대한 공처럼 몸을 말았다. 약한 경화를 더해 스스로 철구(鐵球)가 된 순간, 탄력을 이용해 시위를 당겨 쏘았다.
커다란 대포알이 돼 검은 늑대를 향해 쏘아진다. 이 공격은 피할 수 없을 터… 라고 생각했지만, 놈은 간단히 피했다. 피한 데다 반격까지 당했다.
보이지 않는 사각에서 기척을 지우고 덤볐는데도 통하지 않았다. 청각? 시각? 그것도 아니면 육감일까? 그 예민한 감각으로 어렵잖게 피해버렸다.
기습으로 시작한 첫 일격을 놓친 것도 아까운데 되려 반격당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위협이라 느끼기는 했는지 함부로 덤벼들진 않는다는 점이지만, 그게 오래 이어지진 않으리라.
지원을 바랐지만, 슬쩍 돌아본 여자는 이미 쓰러진 상태. 문득, 절대 하지 않기로 했던 어떤 생각이 다시 떠올라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아니, 쓸데없는 생각이다. 설령 그렇다해도 진화할 시간이 부족했으니. 애써 고개를 돌려 검은 늑대와 마주했다.
도망칠 수는 있을까? ―불가능. 관련된 스킬을 전부 획득하더라도 놈의 속도라면 금세 따라잡히고 말리라. 처음부터 오지 않았다면 모르되 와버린 이상 싸울 수밖에 없다.
'…….'
[워그(Warg)]
[체장 3.79m] [체고 1.42m] [체중 390kg]
8레벨에 달한 관찰으로 놈을 살폈다. 아무리 몬스터라지만 늑대에게 허락된 크기가 아니다. 스테이터스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나보다 낮을 거라 생각하긴 힘들다. 그나마 가능성이라도 있는 건 체력이 아닐까.
나와는 다른 진짜 몬스터.
심지어 저 너머, 쓰러진 괴물 늑대에 이르러서는 관찰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 때, 검은 늑대 또한 나를 가늠하는 게 끝났는지 입맛을 다시기 시작했다.
재빨리 획득 가능한 스킬 목록을 확인했다.
[획득 가능 스킬 목록]
1. 촉수(F)
…
367. 약한 시각(E)
[남은 스킬 포인트 6]
10레벨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6개의 스킬 포인트― 선택을 틀려서는 안 된다. 가장 절실한 것들을 획득했다.
[약한 시각(E) Lv.1 스킬을 획득했습니다]
[미약한 시각(F) Lv.4이 약한 시각(E) Lv.1에 통합되었습니다]
[약한 시각(E) Lv.1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약한 시각(E) Lv.1 → 약한 시각(E) Lv.2]
시야가 선명해지고 색채가 다양해졌다. 약하다는 말과는 달리 사람이던 시절과 비슷한, 아니 그 이상으로 잘 보이게 됐다. 그렇게 또렷해진 눈으로 놈을 직시하자 새삼 두려움이 몰려들었다.
나보다 빠르고 강한 저런 괴물과 싸울 수 있을까 하고서.
아니, 의심하지 말자. 어차피 도망칠 수 없다면 싸울 수밖에 없으니까.
놈에게 맞서 대항하기 위해선 먼저 볼 필요가 있다.
[간파(E) Lv.1 스킬을 획득했습니다]
[남은 스킬 포인트 2]
[미약한 육감(F) Lv.5를 연계할 수 있습니다. 연계하시겠습니까?]
그러자, 생각지도 못한 알림이 들려왔다. 놈에게 보이지 않게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시적으로 직감(E) Lv.1 스킬을 획득합니다]
일시적이지만 그걸로 충분하다. E등급 직감을 얻음과 동시에 검은 늑대가 달려드는 모습이 보였다. 무릎을 굽히고, 단번에 간격을 좁히는 괴물――! 순간 움찔했지만, 곧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놈은 아직 움직이지 않았으니까. 그저 내가 놈이 움직일 거라 느꼈을뿐.
'……!'
그건 현실이 아니었지만, 동시에 현실이기도 했다.
아까 보았던 그대로 환각 속의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하듯 검은 늑대가 움직였으니까. 미리 보았다면, 피할 수 있다.
아슬아슬하게 머리 위를 놈의 커다란 발이 스치고 지나간 순간, 놈이 이빨을 드러냈다. 마치 내가 피했다는 사실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처럼. 이번엔 실수하지 않겠다는 듯 깊게 파고들어 왔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 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냉철하다. 내가 피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 한 발 더 파고든 움직임. 물러나도 빠질 수 없다.
그리하여, 반대로 행동하기로 했다.
예상과는 달리, 오히려 파고 들어오는 점액 덩어리의 모습을 본 검은 늑대의 눈이 붉게 빛났다. 입을 쩍 벌려 단번에 씹으려 했으나, 갑작스레 탄력적으로 나아가 추진력을 받아 피해버린다.
깊게 파고 들었기에 마주 달려들어오는 걸 쉽게 받아치지 못한 것.
경화한 몸을 부딪쳐 기어이 몸을 박았다.
서로간의 움직임이 얼마나 크게 차이나는가를 생각하면 본래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간파와 직감이 그걸 가능케했다.
검은 늑대가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았다. 자신이 당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다는 듯이.
그러나 나는 침을 삼켰다.
거의 40kg에 가까운 바위에 얻어맞았다는 뜻인데도 놈이 받은 충격은 그리 대단치 않아서. 오히려 그 반대.
[물리피해 감소(E) Lv.3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물리피해 감소(E) Lv.3 → 물리피해 감소(E) Lv.4]
그리도 오르지 않았던 물리 피해 감소의 레벨이 상승할 정도였다. 탄력을 이용해 어떻게든 다시 빠져나가던 와중, 늑대의 앞발에 걸려 크게 찢기고 말았다.
보았음에도 나보다 빨라 대응할 수 없었다.
직감과 간파로 놈의 움직임은 훤히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해도 부족한 신체 능력이 발목을 잡고 있었다. 그나마 탄력으로 어찌어찌 메꾸고 있으나 그것도 한계가 있다.
아니,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정말 중요한 건 공격할 수단이 부족하다는 것.
몸으로 부딪치는 것도 한두 번이지 그때마다 반격당하면 당연히 내가 먼저 죽고 만다. 심지어 부딪쳐봤자 그리 유효한 타격을 줄 수도 없다.
그나마 이렇게 싸울 수 있는 것조차 놈의 상태가 좋지 않아서. 다리와 늑골 골절. 안구 파열. 그런 패널티가 없었다면 간파와 직감이 있었어도 싸움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으리라.
그럼에도, 아득히 불리하다.
원래라면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지만, 두 번 다시 없을 찬스이기도 하다.
이미 놈은 나를 경계하고 있다. 만약 여기서 도망친다고 해도 검은 늑대는 상처를 추스르고 쫓아올 테고 상처를 회복한 놈을 상대로는 일말의 승산도 없다.
처음부터 오지 않았다면 모를까 지금 도망쳐봤자 결국엔 죽는다. 도망칠 수도 없었고. 그런 미래를 회피하기 위해서라도 여기서 놈을 죽여야만 한다.
그래. 해야만 한다.
"그르르…"
끓는 소리를 내며 위협하는 검은 늑대. 놈이 주위를 빙빙 돌며 죽일 방법을 강구하고 있었다. 놈도 알고 있다. 여기서 시간을 끌면 끌수록 자신이 유리해진다는 사실을.
영리하고 영악하다.
직감과 간파를 최대한으로 이용하기 위해 놈이 먼저 들어와 주기를 바랬는데 그럴 것 같지가 않다. 광기에 찬 괴물의 모습에 이성적인 사냥꾼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결국 먼저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
변형으로 형태를 송곳처럼 날카롭게 바꾸었다. 그 순간, 탄력이 폭발적인 속도를 더했다. 순식간에 배는 늘어난 속도에 미처 반응하지 못한 놈.
그렇게 충돌한 순간, 큰 충격이 서로를 덮쳤고 나는 체면적의 20%를 잃은 반면, 놈은 겉으로 보기에 큰 타격이 없어 보였다.
실패했나……?
그 순간, 주르륵―― 뒤늦게 놈에게서 흘러나온 피가 발치를 적셨다. 복부를 뚫는 데 성공해 놈의 검은 털이 붉게 물들어갔다.
처음으로 입힌 상처. 기회였다.
멈추지 않는다. 끝까지 물어 뜯고 늘어져야만 한다.
뛰어오른 내게 놈이 노리고 있었다는 듯 이를 드러냈다. 탄력을 사용해도 방향을 바꾸긴 어렵다. 대신 가득 품고 있던 흙을 뿌려 녀석의 눈을 가렸다. 파열된 안구에 흙과 모래가 섞이자 고통스러운 비명를 내질렀지만, 그래도 놈은 눈을 감지 않았다.
그래도 그거면 됐다.
눈을 감지 않았어도 뿌려진 흙에 시야가 가려져있었으니까. 탄력을 이용해 공격. 일방적으로 공격할 타이밍이었음에도 주고 받아야 했다. 눈을 가렸는데도 반격이 온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피하지 못했다.
그게 놈과 나의 차이였다.
짐승의 집중력. 놈은 모래에 안구가 긁히면서도 눈을 감지 않는다. 그저 독기를 품은 채, 죽이고 말겠다는 광기와 살의가 붉은 눈동자에 가득 차 드러났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운.
간파만으로는 여기까지 오는 게 불가능했을 테니까. 직감이 없었다면 분명 죽고 말았을 거다. 그 직감이 너무나 선명히 느껴졌다. 뱀사골의 주인과 싸웠을 때도 죽을 거란 생각은 했었지만… 그 때보다 훨씬 선명하게 죽음이 느껴진다.
그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아갈지 혹은 멈춰설지를]
―나아가기로 했다. 그래서 구태여 여기까지 왔다. 살아남기 위해 사선을 걷기로 각오를 다지지 않았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 안도했다.
'남아 있었구나.'
두려움이 남아 있어서.
아직 사람인 부분이 남아 있다는 것에 안심할 수 있었다. 작게 웃었다. 아직 완전히 괴물이 되진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할 수 있었다.
그러면 됐다. 앞으로 더 앞으로.
[돌진(E) Lv.1 스킬을 획득했습니다]
남은 2개의 스킬 포인트를 사용했다. 광기에 맞서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의지. 그리고 물러서지 않겠다는 고집.
"―――."
검은 늑대 너머로 괴물 늑대의 발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예상보다 빨리 회복하는 모양. 최대한 빨리 검은 늑대를 쓰러뜨려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화살.'
바위처럼 부딪히기만 해서는 녀석을 쓰러뜨릴 수 없다. 검은 늑대를 죽이기 위해선 끝이 날카로운 화살이 필요하다. 다시 한번, 공기저항을 최소화한 모습으로 변했다. 거기에 활대를 바꾸었다. 송곳이 아니라 화살이 되기 위함이었다.
뾰족하게 변한 화살촉을 제외하고 촉수로 길게 뽑아내 꽈배기처럼 비틀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엮인 형태로 단단한 활대가 완성됐다.
놈 또한 기묘한 모습으로 변한 날 경계하기 시작했다. 이미 한번 송곳에 꿰뚫린 놈은 반드시 피하려 할 것이다.
승부는 바로 거기. 맞히느냐 피하느냐에 따라 갈리게 될 터.
나아가기 위해 만든 형태. 거기에 돌진과 탄력까지 더해 최대한의 속도를 이끌어냈다. 시야가 휙휙 변했다. 뛰어난 양궁 선수의 화살은 시속 200km를 넘는다고 하지만 분명 이 순간, 나는 화살의 속도를 훨씬 뛰어넘어있었다.
분명 그랬는데.
"―――"
놈은 그런 화살을 옆으로 몸을 날려 피했다.
직선적인 공격은 빠르지만 그만큼 정직하다. 인지하지 못할 정도의 속도라면 모를까 몬스터인 놈이 총알보다 느린 속도에 반응하지 못할 리 없다.
그래. 예상대로라는 뜻이다.
가장 가까운 나무를 향해 비틀었던 촉수를 풀어냈다. 멈춰서 다시 쏘는 것이 아니라 나무 기둥을 타고 반동을 이용. 더 큰 힘과 속도를 타고 나아간다.
처음부터 피할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경화도 사용하지 않았었다.
검은 늑대의 눈이 커졌다. 반동을 받아 더한 힘으로 돌아오는 화살. 그 힘에 나무가 흔들렸다. 동시에 놈을 꿰뚫고 가죽의 저항을 고작 콤마 몇 초 사이에 찢어발겼다. 혈관과 근육 섬유를 찢어발겼다. 마침내 척추와 부딪쳤지만, 그것만큼은 뚫지 못했다. 힘이 부족하다.
이 공격은 막혔다. 피하지 못하더라도 공격이 막혔다면 놈의 승리. 남은 체면적은 전체의 1%도 되지 않는다. 충돌의 충격은 양자에게 공평했던 것. 결국 남은 체면적은 전체의 1%도 되지 않는 찌꺼기.
그래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탐식(貪喰) : 포만감을 경험치로 치환하며, 대상과 접촉한 것만으로 섭취가 가능해진다]
내가 가진 최초이자 최고의 스킬. 놈의 척추에 달라붙어 탐욕스럽게(貪) 먹어치웠다(喰).
E등급 6레벨에 도달했던 스킬이 무방비한 놈의 등 위에서 그 위용을 마음껏 발휘한다.
반쯤 꿰뚫린 척추는 놈에게 있어 치명상이 되지 못했지만, 그 척추에 붙어있는 '가죽을 꿰뚫고 나와있던' 갈비뼈들이 부서지는 데는 충분했다.
"―――!"
놈은 어떻게든 살겠다는 듯, 바닥을 굴러 나를 떼어내려 했다. 제아무리 몬스터라하나 늑대를 베이스로 삼은 괴물. 등허리까지 손이 닿지 않는 이상, 척추 깊숙이 파고든 나를 떼어낼 순 없었다.
구르면 구를수록 고통받는 건 놈. 흙과 모래 알갱이가 상처를 비집고 들어왔다. 1%에 불과했던 몸은 놈을 먹어치우고 눈덩이처럼 크기를 부풀려갔다. 확장된 몸은 척추를 넘어 더 많은 곳으로 뻗어 나갔고 이윽고 놈의 내부에서 전신을 뒤덮었다.
'……!'
놈을 구성하던 요소를 섭취해 내 것으로 만든다. 괴물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끈질긴 생명력으로 어떻게든 몰아내려 애썼지만, 이미 암 덩이처럼 불어난 나는 갈비뼈의 틈새 사이로 촉수를 뻗어 녀석의 장기까지 파고들었다.
악랄하리만치 지독하게 그리고 또 집요하게.
꾸멀꾸멀 기어들어 내장을, 심장을, 간을, 폐를, 위장을, 비장을, 대장을, 소장을 탐식했다.
[탐식(E) Lv.6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탐식(E) Lv.6 → 탐식(E) Lv.7]
이미 놈의 숨통은 진작에 끊어졌다. 제아무리 괴물이라한들 일개 생명에 불과하다. 내장 기관이 파괴되고도 살아남을 도리는 없으니까.
[공복(E) Lv.3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공복(E) Lv.3 → 공복(E) Lv.4]
끝을 보이지 않는 허기.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 먹어 치웠다. 식포가 끊임없이 탐식하고, 놈은 서서히 녹아 내 일부가 되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허기가 갈 곳을 잃고 사라졌을 무렵.
[워그를 섭취했습니다. 경험치와 포만감이 상승합니다]
[경험치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Lv.15 → Lv.16]
수많은 메시지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강적을 상대로 맞서 싸워 승리를 쟁취해냈다. 이건 그 증거. 분명 한 걸음 더 나아갔을 터.
그러나 고작 한걸음으로는 터무니 없이 먼 상대가.
"―――."
낮은 울음을 토하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