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 #8. 그 뒤
있지도 않은 오금이 저렸다.
절대 이길 수 없다. 방금 쓰러뜨린 검은 늑대 10마리가 있어도 놈을 당해낼 순 없을 터. 어른과 아이. 토끼와 호랑이. 뱀과 개구리. 끔찍하리만치 암담한 차이가 있었다.
'아.'
여기서 죽겠구나. 놈은 잠깐 나를 살피는가 싶더니 금세 나무에 등지고 쓰러진 여자를 바라보았다.
"크르르…"
날 죽이건 여자를 죽이건 간에 절대 막을 수 없다. 저항은 해 보겠지만, 10초나 버티면 다행이겠지. 침이 뚝뚝 떨어지며 그 아래에 있는 나를 적셨다. 이제 정말 죽겠구나 싶었을 때.
"……?"
놈이 별안간 발길을 돌렸다.
왜? 잘 싸웠다고 살려주기라도 하려고? 아니면 죽일 가치도 없어 보여서? 우리를 내버려 두고 유유히 사라지는 놈. 혹시 되돌아오는 게 아닌가 한참을 굳어 있었지만, 그럴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살았다…?'
감지를 사용해봐도 이미 범위 밖이었다. 정말 사라졌다.
'…….'
긴장이 풀어져 몸이 축 늘어졌다. 정신적으로 지친다는 게 이런 걸까? 숨 좀 쉬면서 마음을 추스르고, 미처 읽지 못했던 메시지들을 다시 출력했다.
[경험치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Lv.16 → Lv.17]
[포만감이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탐식…]
…너무 많은데?
읽을 시간이 아까워 스테이터스부터 확인했다.
[뱀사골의 공포(부정형 점액체) Lv.20] [EXP 1041/11062]
[체장 4.07m] [체고 17.7cm] [체중 51.6kg]
[힘 66 (79.1%)] [민첩 45 (43.1%)] [체력 146]
단번에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뤘다.
싸움을 시작했을 땐 15레벨이었지만, 검은 늑대를 먹은 것만으로 20레벨에 도달했다. 10레벨 때와 마찬가지로 20레벨에도 조건이 필요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메시지를 뒤져보니 [20레벨 달성 조건 : 워그 처치]라고 적혀있었다.
즉, 놈을 먹으면서 달성 조건 또한 한 번에 클리어했다는 것. 운이 좋았― 아니, 그럴 리가 있나. 시스템이 원하는 대로였겠지.
'…….'
마냥 좋은 기분은 아니다. 그래도 일단은 따를 수밖에 없다. 내게 지침이 되는 건 지금은 시스템뿐이었으니.
아슬아슬한 싸움이었다.
놈의 부상이 조금만 덜했어도 살아있는 건 내가 아니라 놈이 됐을 터. 아무리 그래도 5레벨을 점프… 잘 생각해보니 그럴 만도 하다. 호랑이보다도 커다란 놈을 먹었는데 그 정도 보상도 없으면 억울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면 합당한 보상이었다.
[보유 스킬]
탐식(E) Lv.7, 촉수 다발(E) Lv.1, 열 탐지(E) Lv.1, 약한 재생(E) Lv.6, 약한 은신(E) Lv.7, 염탐(E) Lv.1, 기척 감지(F) Lv.9, 미약한 청각(F) Lv.7, 미약한 육감(F) Lv.5, 약한 시각(E) Lv.3, 물리피해 감소(E) Lv.5, 약한 경화(E) Lv.5, 변형(F) Lv.9, 미약한 독 내성(F) Lv.1, 위협(F) Lv.3, 공복(E) Lv.4, 수영(F) Lv.4, 잠수(F) Lv.4, 탄력(E) Lv.7, 간파(E) Lv.2, 돌진(E) Lv.2
스테이터스도 스테이터스였지만, 스킬 쪽이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뤘다.
탐식과 약한 은신이 무려 E등급 7레벨이 되었으니 D등급이 머지않은 셈이고 촉수는 8레벨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등급이 상승해있었다. 사용해봤더니, 수십 가닥의 촉수가 제멋대로 꿈틀거렸다.
…눈이 썩을 것 같다.
그나마 원하면 하나로 합칠 수 있었지만. 열 감지는 열 탐지로 변했고, 관찰은 아마 염탐으로 변한 것 같았다.
'염탐?'
이름이 좀 범죄 같네.
검은 늑대와 싸우는 데 전혀 상관없었던 스킬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상승했다. 고무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여태까지 계속 유용하게 사용해왔는데 F등급이었던 변형이 곧 E등급으로 오를 것 같아 기대된다.
그렇게 만족하던 순간,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첫 번째 진화 때와 마찬가지로 수상한 무언가가 두둥실 떠올랐기 때문에. 여전히 형언할 수 없고 인지하기 싫고 알고 싶지도 않은 불길한 무언가.
[진화 가능 목록]
1. 워그(부정형)
머릿속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여전히 저 무언가가 무엇인지 알 수 없어 꺼림칙했지만, 아무튼 워그로 진화할 수 있게 됐다.
[워그 : 늑대를 닮은 몬스터. 빠르고 집요하다]
[워그(부정형) : 부정형 점액체의 특성을 유지한 채 워그로 진화할 수 있다]
'…특성을 유지한다고?'
부정형… 머릿속으로 흐물거리는 늑대를 생각했지만 상상하기 어려웠다.
일단 진화에 대한 고민은 나중에. 쓰러진 여자부터 어떻게든 해야겠지. 옮기려다가 숙여진 고개가 눈에 들어왔다.
'……예쁘네.'
솔직한 감상이었다. 여태 봐온 사람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이나.
그래서 잠깐 얼빠진 채로 멍하니 바라봤다.
갈색 보브컷 헤어의 장난기 많아 보이는 소녀가 나무에 기대어 눈을 감은 모습은 마치 이야기속의 한 장면 같았다.
시각의 등급을 올려서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멍하니 바라보다 관찰을 사용했다.
'…….'
[이은하(인간)]
[신장 164.4cm] [체중 46.2kg]
[힘 31] [민첩 44] [체력 21] [마력 316]
관찰이던 시절에는 스테이터스는 볼 수 없었는데 염탐이 되면서 가능해진 모양. 이름은 꺼려지지만, 성능은 확실히 좋아졌다.
그렇게 확인한 이은하라는 여자의 스테이터스는 극단적이었다.
다른 스테이터스는 낮아도 마력 하나만큼은 316. 내 가장 높은 스텟인 체력을 2배 곱해도 안 된다.
'마력이란 게 진짜 있긴 하구나.'
정말 여기가 소설 속이라는 실감이 들었다. 뱀사골의 주인이건 워그건 간에 마력을 쓰는 건 본 적 없었으니까. 눈앞의 이 소녀가 300이 넘어가는 마력의 주인이라는 건 믿긴 어려웠지만 소설 속 세계관을 떠올려보면 납득이 간다. 높은 확률로 헌터이리라.
[미약한 육감(F) Lv.5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미약한 육감(F) Lv.5 → 미약한 육감(F) Lv.6]
육감이 제멋대로 움직여 이은하의 손을 건드렸다.
'……?'
그 이유를 몰라 의아해하고 있자니, 시스템이 메시지를 알렸다.
[마력을 각성했습니다]
'……!'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시 스테이터스를 확인하자 [마력 1]이라고 번듯하게 써 있었다.
드디어, 드디어 판타지 소설의 대명사나 다름 없는 마력을 각성한 셈. 그리고 마침 느껴지는 누군가의 기척을 느꼈다.
혹시 몰라 나무 위로 숨어서 은신을 쓰고 있었는데 20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쓰러진 여자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아마 찾으러 온 모양인데.
'일행… 맞겠지?'
납치범이 쓰러진 사람을 보고 한숨을 쉬진 않겠지. 저번에 관찰을 사용했다가 뱀사골의 주인에게 들킨 경험이 있어 고민했지만, 등급이 상승한 염탐을 믿고 사용했다. 일단 이름부터가 염탐이었으니까.
[전우택(인간)]
[신장 179.7cm] [체중 76.4kg]
[힘 517] [민첩 449] [체력 578] [마력 405]
고장 난 거 아닌가? 눈을 씻고 쳐다봐도 달라지지 않는 수치에 어이가 가출했다. 잘못본 게 아닌가 싶어 시각을 껐다가 켜도 여전히 그대로였다. 500이 넘은 스테이터스가 두 개나 있었고 심지어 저 여자보다 마력도 높았다. 이게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스테이터스가 맞나?
하지만 그런 알림과는 달리, 눈앞의 남자에게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반박귀진?'
무협지에서 자주 나오는 경지에 도달한 무인은 되려 평범한 사람처럼 보인다는… 어쩌면 여자와 달리 힘을 갈무리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
괴물 늑대의 스테이터스를 본 건 아니지만, 저 남자라면 괴물 늑대도 때려잡을 것 같다. 아니, 분명 그러하리라.
아마 괴물 늑대가 조용히 사라진 이유도 저 남자 때문일 터. 다 회복되지도 않은 몸으로 싸우다 시간 끌리면 저 남자가 오리라 생각한 거겠지. 뒤늦게 우릴 놓아준 놈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망할. 강해졌다고 생각하면 자꾸 그 위가 나타난다. 물론 이 세계관이 얼마나 개같은지는 알고 있지만.
그렇게, 굳은 표정으로 한참 둘러보던 남자는 금세 여자를 등에 업고 사라졌다.
뒤늦게 나는 한숨을 몰아쉬었다. 방해꾼도 사라졌겠다. 더 신경 쓸 일도 없을 테고.
그럼 이제… 진화할 시간이 됐다. 다시 그 불길한 것과 마주하자, 올라갔던 텐션이 뚝 떨어졌다.
진화할 때마다 이래야 되나 싶어서.
[워그(부정형)로 진화를 시작합니다]
…….
***
언젠가 겪어본 숙취보다 몇배는 더 끔찍한 두통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인제보니 환자복으로 갈아입혀져 누워 있었다.
'내가 왜 병원에…?'
그 생각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마지막 기억이 떠올랐다. 분명, 워그한테 먹힐 뻔한 것 같기는 한데……? 그러다가 갑자기 열린 문에 기함하고 말았다.
"꺄아아아아악!"
"뭔데? 왜?"
"서, 선배?"
은하가 얼굴을 가린 침대보를 살짝 내리자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워그가 아니라 선배였다. 병원에 워그가 있을 리 없는데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그래. 몸은 좀 괜찮고?"
"아 좀. 노크 하고 들어와요."
괜히 투덜거렸다. 뒤늦게 주변을 둘러보니 다행히 1인실. 그나마 쪽팔림은 면했다.
"네가 언제 일어날 줄 알고? 사흘을 내리 잤는데."
"…사흘?"
"어. 사흘."
그렇게나 시간이 흘렀다는 소식에 벙쪄있을 때, 우택은 바구니 안에서 사과를 맨손으로 깎았다.
"아. 뭐예요! 더럽잖아요!"
"어차피 손은 닿지도 않으니까 신경 쓰지 말지?"
마력을 두르고는 있지만, 맨손으로 사과를 깎는다는 사실이 못내 찜찜했던 한사코 거절하자 우택은 그런가 보다 싶어 사과를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꿀사과라더니 맛있네. 그래서 몸은 괜찮고?"
"네? 별로? 아무렇지도 않은데요?"
"그럼 내일부터 출근하든가."
"…갑자기 엄청 아파요. 죽을 것 같아."
앓는 흉내를 내려 배를 쥐었는데 진짜로 아파서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렸다. 이제보니 팔꿈치 끝이 붕대가 잔뜩 감긴 옆구리를 건들고 있었다.
"악…"
"까불지 말고 쉬어. 병가 신청해놨으니까."
……그러고 보니 마지막에 갈비뼈가 부러졌었던 것 같다. 뒤늦게 떠오른 기억에 이은하는 자초지종을 물었다.
"근데 저 어떻게 여기 있어요? 선배가 데려왔어요?"
"뭔 소리야?"
"저 마지막에 분명히…"
워그한테 죽을 뻔 했던 것 같은데…?
"내가 묻고 싶다. 너."
남은 사과를 한 번에 씹어먹은 우택이 진지한 눈빛으로 시선을 마주했다.
"왜 거기까지 갔어?"
"아, 그…"
꼴깍 침을 삼키고 긴장한 이은하가 사실을 털어놓자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깊은 한숨을 뱉었다.
"그러니까, 놓칠 것 같아서 말도 안 하고 갔다?"
"네. 그, 사실 거의 다 잡았거든요? 근데 하필이면 두 마리였어서…"
"너 진짜…"
제정신이냐고 그렇게 호통치려다가 이제 깨어났단 걸 상기하고는 그냥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그래. 워그 한 마리쯤이야 혼자서 얼마든지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테지. 그건 이해할 수 있다. 있는데……
"너 그러다 죽을 뻔했어."
"……."
"정신 차려. 네가 헌터 때려쳤다고 걔네가 알아줄 것 같아?"
"……죄송해요."
"미리…"
미리 알렸어야지. 그렇게 말하려던 우택은 한숨과 함께 다시 말을 거뒀다. 어차피 알고 있을 텐데 구태여 말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물론, 지금 다그쳐놔야 다음 번에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겠지만…… 그걸 따지자면 애초에 사무부로 부서를 옮긴 애를 파견이랍시고 데려온 게 문제였을 터. 팀장님이 원한 거였지만, 처음부터 내키지 않기는 했다.
…아니, 차라리 크게 터지기 전에 터져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쉬어."
"네…"
그렇게, 시무룩히 말꼬리가 늘어진 이은하를 뒤로하고 병실을 나가려다가 묻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서, 선배. 혹시 마지막에… 뭐 본 거 없어요?"
"뭐가?"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젓는 이은하. 우택은 이번에야말로 병실을 나섰다.
그리고 그 뒤에서, 이은하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어렴풋한 기억으로나마 분명 마지막에 무언가를 본 것 같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