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9. 두 번째 진화!
[뱀사골의 공포(워그{부정형}) Lv.1] [EXP 111 / 1032]
[체장 52.7cm] [체고 27.5cm] [체중 5.4kg]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경험치였다.
부정형 점액체 시절에는 경험치가 1레벨에 324였는데 진화 후 필요한 경험치는 1000이 넘는다.
지금이야 1000이지 나중을 생각하면 더 암담하리라. 마지막 20레벨을 달성했을 때, 요구 경험치가 11000이었는데 아무리 적게 잡아도 20레벨 경험치가 3만은 넘을 것 같다. 강해진 만큼 경험치 요구량도 상승했으니까.
……그것보다, 섭취한 대로 진화하는 거 아니었나? 왜 이렇게 작아졌지?
부정형 점액체일 때보다 훨씬 작아졌다. 설마설마해서 물에 모습을 비춰봤더니 귀엽고 앙증맞은…
'…강아지?'
그래. 강아지가 있었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꼬리가 유난히 귀여워보이는. 내가 봐도 귀여울 정도니 남들이 보면 더할 테고. 그나마 베이스가 늑대인지라 날렵해 보이기는 해도 그래봤자 '까망이'라고 이름 붙기 딱 좋은 외견이었다.
"멍멍! 멍멍멍!"
……워그의 신장을 그대로 따라갈 거라 생각했는데 사기당했다. 그래도 스테이터스를 확인하니 참을 수 있었지만.
진화 전 [힘 66] [민첩 45] [체력 146] [마력 1]
진화 후 [힘 76] [민첩 81] [체력 151] [마력 1]
일단 전체적으로 스테이터스가 상승했다.
마력은 그대로였지만 민첩이 크게 상승했다. 20레벨이었던 부정형 점액체 시절보다 모든 방면에서 스테이터스가 상승했고 비교용으로 붙어 있던 퍼센트가 사라졌다.
적어도 동물중에서는 체급을 따질 필요도 없다는 거겠지. 진화 전에도 체력에는 %가 붙지 않았었으니.
체중은 줄었지만, 앞으로 성장할 가능성을 생각하면 무궁무진하다. 적어도 진화하기 전보다는 훨씬 더.
그나저나, 부정형이라…… 스테이터스도 올랐으니 분명 진화는 맞는데 부정형 점액체에서 진화했다기보단 강아지 모습으로 변형하고 있다는 느낌이 더 강하다.
일단 다시 레벨부터 올려야 한다.
"멍! 멍!"
스테이터스 확인을 마치고 스킬 창을 열어보니, 진화 전과는 달라진 스킬이 있었다.
[기척 감지(F) Lv.9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기척 감지(F) Lv.9 → 기척 감지(F) Lv.10]
[기척 감지(F) Lv.10가 최대레벨에 도달했습니다. 기척 감지(F) Lv.10 → 기척 탐지(E) Lv.1]
[열 탐지(E) Lv.1와 기척 탐지(E) Lv.1가 동시에 존재합니다]
[열 탐지(E) Lv.1와 기척 탐지(E) Lv.1가 합쳐져 감지(D) Lv.1로 변합니다]
드디어 D등급 스킬이 생겼다. 이전 진화에도 그랬는데 이번 진화에도 준족과 약한 후각이라는 2가지 스킬을 추가로 획득했다. 염탐을 사용할 필요도 없이 어떤 스킬인지 알 것 같았다.
진화도 했으니 몇 가지 테스트를 겸해봐야지. 일단 통각부터. 앞발을 잘근잘근 깨물어봐도 물리피해 감소가 있다 보니 이 정도로는 잘 모르겠어서 한 번 마음 먹고 세게 씹어봤는데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부정형이라는 건 확실한 모양.
그 다음은 준족. 그 이름만 봐도 무슨 뜻인지는 바로 알 수 있었기에 달리기 시작했다.
달린다는 건 구르는 것과는 다른 즐거움이 있었다. 바람을 맞아 달리니 상쾌한 기분이 됐다. 생각보다 제법 빠르긴 했으나 그래봤자 강아지라는 느낌이기는 했다.
타이어가 오르지 못하는 언덕이라면 모르겠지만 아직은 구르는 게 더 빠르다. 고통도 없고 달리는 것도 괜찮다. 이제 남은 건 후각.
코를 킁킁거렸더니, 달콤한 냄새. 비릿한 냄새. 썩는 냄새. 흙냄새. 처음 맡아보는 냄새까지 마구 섞여 들어와 혼돈의 도가니를 이뤘다. 냄새는 맡아지는데 뭐가 뭔지 구분할 수가 없다. 후각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게 뭔지 모르는 것. 경험이 필요한 부분이리라.
애써 달콤한 냄새를 쫓았더니 나무에 메달린 벌집이 있었다. 또 그 아래 곰이 있다. 과연 곰을 찾은 걸까? 아니면 꿀을 찾은 걸까? 아마 꿀이겠지……? 아무튼 벌집 아래 곰도 다 큰 곰은 아니고, 아성체쯤 되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암컷일지도 모르고.
[아시아 흑곰]
[신장 140cm] [체고 67cm] [체중 84kg]
[힘 111] [민첩 51] [체력 76]
힘이 세 자릿수면 되게 높은 건데 전에 보았던 헌터를 떠올리니 괜히 초라해보였다.
24kg 초대형 뱀장어까지 본 데다가 검은 늑대까지 상대한 마당에 새삼 동물이 무섭게 느껴지진 않았다.
감회가 새롭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뱀사골에서 봤을 때 곰님 지나가시는데 심기 건드리지 말자고 숨죽이고 있었으니까.
물론 스테이터스만 따지면 그리 차이 나는 건 아니다. 괜히 방심했다가 한 대 맞느니 처음부터 제대로 상대해 쓰러뜨리는 게 나으리라.
"꾸릉?"
그렇게 선수를 치려다, 녀석의 얼빠진 얼굴을 보고 맥이 빠졌다. 꿀을 핥는 게 어지간히 행복했는지 세상 다 가진 표정이었다…….
기묘한 대치가 잠깐 이어지는가 싶더니, 녀석은 내게 자기가 먹던 벌집을 내밀었다. 그 우호의 표시에 당황하고 있자니, 곰은 얼른 먹어보라며 팔을 들이밀었다.
"……."
워그가 되긴 했지만 부정형인지라 미각은 없다. 그래도 맥이 빠져서 이미 싸울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먹었더니, 녀석은 손뼉을 치며 좋아라했다.
"꾸워어어. 꺼워어엉."
그러다 머리를 갖다 대길래 싸우자는 건가 싶어 긴장했더니, 혀를 내밀어 핥아왔다. 얼굴에 침이 잔뜩 묻어 촉수로 닦아낸 다음에야 상황을 이해했다.
'…설마 새끼로 보고 있나?'
생김새가 좀 그렇기는 했다. 워그는 검은 늑대지만, 지금 나는 새끼니까. 언뜻 보면 곰의 새끼와 착각할 만도 하다.
'묘한 기분이네.'
아무래도 이 곰만큼은 먹을 생각이 들지 않는다. 부디 녀석이 오래 살길 바라면서 갈 길을 재촉했다.
***
"네~ 퇴원 수속 도와드릴게요. 이리 오시겠어요?"
좀 더 시간이 흘나, 집으로 돌아온 이은하는 그대로 침대에 뻗어 누웠다.
"마지막에 분명히 뭘 봤는데……."
그게 뭐였는지 모르겠다. 죽을 뻔한 나를 구해줬던 초록색 무언가…… 대체 뭐였을까?
문득, 전에 보았던 그 슬라임이 떠올랐지만 기억 한 편으로 미뤄두었다.
설마 그럴 리가 없으니까.
***
멧돼지가 달려들자, 그걸 예상해 파고들어 목덜미를 물어뜯자 간단하게 숨이 끊어져 오히려 당황하고 말았다.
…상대가 안 되네.
몬스터가 왜 몬스터인지 알 것 같다.
그것과는 별개로 경험치는 최악. 지난 이틀 동안 사냥으로 올린 레벨이 고작 5. 강해진 만큼 레벨을 올리기가 힘들었다. 심지어 이제 청설모나 쥐 같은 작은 동물들은 먹어도 경험치를 아예 주지 않을 정도였다. 그나마 포만감을 경험치로 치환할 수는 있었지만.
크기가 작아진 만큼 포만감이 빨리 차오르는 것도 맞지만, 경험치의 절대량에 비하면 탐식으로 치환된다 하더라도 효율이 좋지 않다. 그래서 큰 동물들을 마주치는 대로 먹었건만 그렇게 올린 게 고작 5레벨이었으니까.
그리고 요즘들어 사람들이 자주 드나드는 것 같다. 느껴지는 기척이 너무 많다. 어쩌면 탐지의 범위가 늘어나서인지도 모르겠다. 십중팔구는 아직 워그가 한 마리 더 남아서이리라.
헌터들이 괴물 늑대를 토벌한다는 그 소식이 좋으면서도 찝찝했다. 왠지 뺏기는 것만 같아서.
사실, 괴물 늑대를 끝으로 도심으로 향하려 했었다. 지리산에서 더 할 게 없으니까. 결국엔 멧돼지나 고라니같은 커다란 동물들로도 레벨을 올릴 수 없을 때가 올 테니까. 그 전에 괴물 늑대까지만 처치하고, 지리산을 떠나려 했다.
그럴 생각이었는데 자꾸 헌터들이 들락거리니 묘한 기분이 됐다. 처음엔 워그를 죽여주길 바랐는데…
'지랄. 변덕도 죽 끓듯 하네.'
어차피 지금 내게는 선택권이 없다. 괴물 늑대랑 싸우기에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 설령 가지고 있는 스킬 포인트를 사용하더라도 아직은 무리일 터.
그나마 이제는 D등급 스킬도 배울 수 있게 됐다는 점. 그것 하나만이 위안거리였다. 물론 스킬 포인트 4개나 소모해야했지만.
미리 생각해둔 D등급 스킬은 모든 피해 감소와 경화. 모든 피해 감소는 말할 필요도 없고 경화도 이제껏 잘 사용해왔던 스킬이니 바로 사용할 수 있을 거다. 스킬 레벨이 오르면 오를수록 후보도 늘어나겠지만 지금은 그랬다.
당면의 목표는 레벨 8. 그 때가 되면 남은 스킬 포인트가 12가 될 테니 D등급 스킬을 3개나 가질 수 있다. 그 때가 되면 놈을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헌터들이 있어서인지 놈이 날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어쩌면 그냥 관심이 없는 걸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덕분에 레벨을 올릴 시간을 벌었다.
물론, 헌터들에게 걸리면 죽게되는 건 놈 뿐만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일 터. 좀 더 신경쓸 필요가 있다.
관찰이나 염탐 같은 스킬은 나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니까. 곰이나 들개 새끼라고 생각해 그냥 지나가면 좋겠지만, 들키면 바로 사살당할 터.
"……."
그래서 이 곰이랑 다니고 있는 거였지만.
"꾸어어엉?"
솔직히 몇 번이고 떼어놓으려 해봤지만, 곰의 후각이 얼마나 뛰어난지 도무지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멀리가도 다음 날 어기적어기적 나타났으니까. 그렇게 이틀째 기묘한 동행이 계속되고 있었다.
'어쩐지 내가 키잡 당하는 것만 같은…'
"꾸어엉?"
이틀 정도 지내니까 얼추 표정이 읽힌다. 아마 꿀 먹을래? 묻는 거겠지…
"꾸워어엉?!"
아 꿀 안 먹는다고!
***
"결국 오늘도 허탕이네요."
"팀장. 이러다 심마니 되겠소."
팀원의 투덜거림에 팀장은 담담히 끄덕였다.
"조금만 더 고생합시다."
"차라리 2팀이나 1팀에 지원요청을 하죠? 아니면 다른 클랜을 부르던가…"
젊은 헌터의 말에 늙은 헌터가 그의 뒷통수를 후려갈겼다.
"말이 되냐 이 자식아? 그럼 1, 2팀이 우릴 뭘로 보겠어?"
"왜 때립니까. 뭘로 보긴 뭘로 봐요?"
"고작 이거 때문에 그딴 소리 해 봐라. '쟤네는 수색팀인데 워그 한 마리도 못 찾네?' 그럼 대체 왜 있는 거냐고 입방아나 찧겠지."
"아니 어차피 부팀장님 원툴인거 다 알 텐데……"
"이게 미쳤나?"
틀린 말은 아니다. 사실 워그를 몰아넣을 방법이 없으니까. 밤낮으로 몰아넣는다고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흔적을 쫓는 것도 벅찬데 이 넓은 지리산에서 놈을 잡기란 요원하다. 그걸 다른 팀이나 클랜이라고 모를 리는 없겠지만…
"고원처럼 처음부터 귀찮다고 떠넘겼으면 모를까. 시작해놓고 못 잡으면 우리만 개쪽당한다."
그 설명에도 젊은 팀원은 '그래도…' 하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이해는 한 모양이지만. 잠깐 묵묵히 보던 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팀장도 설마 저 멍청한 소리에 동의하는 거요?"
"그럴 리가요."
"멍청한 소리…" 시무룩하게 중얼거리는 젊은 팀원을 무시하고 팀장이 설명했다.
"보세요. 워그가 이동한 길입니다."
"음?"
"놈은 지금 뱀사골과 천왕봉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뭔가 이유가 있겠죠."
"뭐라도 찾는 걸까요?"
"글쎄. 아무튼 주변에서 머무는 이유가 있는 거라면 이번에는 반대로 해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반대로?"
"매복. 녀석이 빨라봤자 거리 안으로 들어오면 놓칠 리 없으니까요."
팀장은 신뢰하는 눈빛으로 팀원들과 마주했고, 팀원들은 부담을 느꼈다. 아니나다를까.
"이것까지 해보고 정 안되면 퇴근 없습니다."
"……."
"죽을 각오로 하세요."
지옥같은 말에 팀원들은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