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 #10. vs 괴물 늑대
지리산 앞에서 이은하는 한숨을 쉬었다. 바보같은, 멍청한 짓이라는 건 알고 있다. 민폐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확인해보고 싶다.
내가 마지막에 본 게 꿈인지 아닌지. 그 슬라임이 나를 구해준 게 맞는지. 아니면 역시 내가 잘못 본 것인지. 싱숭맹숭해서 도무지 확인해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잘못된 일인건 알고 있다.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것도. 하지만…… 일단 할 수 있는 나름의 준비는 했다. 그러니까, 잠깐만.
내가 마지막으로 쓰러졌던 곳까지만 가보자고 이은하는 그렇게 생각하곤 천천히 지리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래도 병원에서의 일이 떠올라 마지막으로 누군가에게 문자만 남겨둔 채로.
***
[경험치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Lv.6 → Lv.7]
밤새 먹이를 찾아 나선 결과 7레벨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침이 되자 어김없이 곰이 찾아왔다.
"꾸어어엉~"
잘 잤느냐고 물어보는 녀석에게 "멍!" 하고 화답해줬다. 이젠 이게 일상처럼 익숙해졌다.
하기야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녀석과 다닌다고 나쁠 건 없으니까. 녀석은 녀석 나름대로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렸고, 나는 D등급 감지로 먹을 만한 동물들을 물색했다. 서로 방해가 될 일은 없다.
그렇게 레벨이 오를 때마다 아쉬운 점은 마력. 오르긴 오르는데 그 폭이 낮다. 7레벨이 됐는데 15. 1레벨당 2씩 오르는 셈이었다. 마력 15. 일전의 그 여자에 비하면 한참이나 부족하다.
뭔가 좋은 방법은 없을까? 마력을 올리는 방법… 떠오르는 거라곤 영약같은 거였지만 지리산에서 뜬금없이 영약같은 걸 어디서 구하겠다고.
정말 운이 좋아 산삼 같은 걸 찾아 먹으면 그야 마력이 올라가기는 하지만 그런 걸 어디서 찾겠는가? 하는 생각은 머잖아 뒤집어졌다.
'……실화냐?'
[인삼을 섭취했습니다. 마력이 2 상승합니다]
[인삼을 섭취했습니다. 마력이 3 상승합니다]
산삼은 없었지만 인삼이 있었다. 인삼이 산삼에 비해 뒤처지는 건 사실이었지만 시간은 금. 아니, 깡패였다.
[54년 묵은 인삼 : 재배용으로 묻어놨으나 오랫동안 캐지 않은 삼]
인삼을 심어놓은 뒤에 던전이 나타나고 몬스터가 나타났으니 농장주도 인삼 밭을 버릴 수밖에 없었을 터. 50년쯤 묵은 인삼이라 그런지 깃든 마력이 상당했다.
인간이 심고 자연이 50년간 가꾼 인삼? 이건 못 참지.
"꾸어엉? 구어엉?"
여길 알려준 게 바로 이 녀석이었다. 사람 말이라도 듣는 건지 참 영리하다. 영약은 아니라도 아쉬운 대로 약초를 찾아 먹고 있던 때 따라오라는 듯하더니 여기까지 데려다줬으니까.
사람일 때도 먹어본 적 없는 게 삼이다. 먹어본 거라곤 홍삼 캔디 뿐. 삼계탕에 들어간 거라면 모를까.
그렇게 인삼밭을 쓸어 담자 마력이 30까지 껑충 뛰어올랐다. 인삼의 수는 많았지만, 같은 영약으로 올리는 건 한계가 있는 모양인지 그 이상 상승하지 않았다. 아직 많이 남기는 했지만, 숨겨두고 나중에 쓰기로 했다.
7레벨이 됐을 땐 시바견보다 조금 커졌다. 1레벨만 더 올리면 워그― 괴물 늑대와도 싸워 볼 만할지도 모른다. 슬슬 녀석의 위치를 파악해 둘 필요가 있었다.
D등급답게 대폭 상승한 감지의 범위는 무려 5km 이내. 열 감지와 기척 감지를 종합하고, 또 머릿속에 미니맵이 만들어 느끼는 듯한 감각이었다. 당연히 거리마다 얻는 정보도 달랐는데 대충 1km 안이라면 그게 무엇인지 구분할 수 있는 정도였다.
덕분에 다소 안전했다. 헌터들이 사용하는 마력 감지와는 다소 다르긴 하지만. 정작 그 마력도 날이 갈수록 늘어가고 있고.
참고로 마력만 있다면 거의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그럼 스킬이 필요한 이유는 뭘까?
'효율.'
마력 감지가 없다고 마력으로 감지를 못하는 건 아니었으며, 마력 갑옷이 없다고 마력으로 갑옷을 만들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다만, 스킬이 있으면 성능과 소모를 대폭 줄일 수 있다는 설정일 뿐. 결국 스킬이건 스테이터스건 있을수록 많을수록 좋다는 뜻이다.
소설 속 주인공을 포함한 모든 이들은 스테이터스와 레벨을 확인하지 못했다. 물론 감정 같은 스킬들은 존재하지만, 그런 스킬로도 스테이터스를 확인하는 건 불가능하다. 내가 예외적인 거였지. 그네들이라고 바보는 아니기에 확인하지 못했다고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지만.
애초에 이 세계에 있는 시스템과 나를 도와주는 시스템은 다른 존재였다. 소설 속 시스템에게 자아 같은 건 없었으니까.
[…….]
대체 시스템이 무엇인지… 애써 미뤄놨던 의문이 넘칠 듯 쏟아졌지만, 시스템은 답하지 않았다. 별로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꾸아어어엉!"
곰의 울음소리가 상념에 잠긴 나를 깨웠다. 녀석은 앞발에 이상한 걸 쥐고 있었는데, 그 생김새가 참 괴이했다. 곤충같기는 한데 뱀과 곤충이 반반 섞여 있다는 느낌이었다. 내가 모든 동식물을 다 아는 건 아니었지만, 이런 동물이 대한민국에 서식한다는 건 아무래도 좀……
선물이라는 듯 그런 벌레를 내미는 곰 . 혹시 먹어도 되는 건가 싶어 갸웃하다가 염탐을 사용했더니,
[용벌레 : 가장 약한 몬스터이자 요정용의 유충…]
몬스터라는 설명과는 다르게 전혀 몬스터같아 보이진 않았다. 몬스터라면 먹으면 경험치를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먹어보려다가.
"……?!"
갑자기 터졌다.
그에 어떤 기시감을 느꼈다. 시각을 얻기 전에 분명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다. 래서 슬라임이던 시절에 날 터뜨렸던 녀석. 아니, 터지면 터진다고 알려줘야 할 것 아닌가?
[용벌레 : 가장 약한 몬스터이자 요정용의 유충이며 스트레스를 받으면 마력 폭발을 일으킨다]
[체장 2.5cm] [체고 0.6cm] [체중 6.2g]
[힘 2] [민첩 2] [체력 3] [마력 17]
……아. 내가 치웠었지. 이래서 한국 말은 끝까지 들어야 하나보다.
마력 폭발.이 정도 위력이면 사람한테도 위험할 것 같다. 물론 죽지는 않겠지만 화상정도는 입을 터. 크기는 조그만했지만, 위력이 대단하다.
인삼을 섭취하기 전이었다면 심지어 마력도 내가 더 낮았고. 마력이 있는 걸 보면 몬스터는 몬스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이 녀석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설마 먹는다고 마력이 오를 리는 없을 테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저거 워그 아니야?"
"등신아. 세상 어떤 몬스터가 곰이랑 같이 다니냐? 딱 봐도 새끼 곰이잖아."
"생긴 게 좀 다르지 않나? 한 번 잡아볼까?"
"하지 마.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집중하라고."
자칫하면 듣지 못했을 만큼 작은 음성이었지만, 똑똑히 들렸다. 감지에는 걸리지 않았는데… 만약 좀 더 방심했더라면 그대로 붙잡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늘해졌다.
……십년감수했다. 곰이랑 같이 있지 않았다면 도망쳐야했을 터. 도망칠 수 있단 보장도 없고.
"꾸아아아?"
이래저래 도움을 받는구나. 새끼곰인 척 하며 자리를 빠져나오는 사이, 용벌레는 멀리멀리 도망쳤고 조금 아쉬웠다.
괴물 늑대를 먹어 치우면 지리산을 떠날 생각이었으니 앞으로 용벌레를 먹을 기회는 오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그 전에 용벌레를 한번 더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힘들지도 모르겠다. 고작 17밖에 안 되는 마력으로 제법 센 폭발을 일으켰는데… 문득 궁금해졌다.
'마력은 대체 어떻게 쓰는 거지?'
스킬을 사용하는 건 곤란하지 않다. 사용하겠다고 생각하면 자연스레 쓸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마력은 스킬이 아니다. 심지어 가지고 있지도 않았던 것을 자연스레 쓸 수 있을 리가 없다.
…모르겠다. 가져본 적이 없으니까. 아무래도 이건 좀 더 고민해봐야 할 듯 싶었다.
"꾸어엉?"
그사이, 곰은 나무 위에 올라가 수액을 핥고 있었다. 언제 올라갔는지 참 재주도 좋다.
재빨리 핥아 먹은 녀석이 엉금엉금 내려왔다. 올라갈 때는 그렇게 성큼성큼 잘도 오르더니 내려올 때는 조심스럽다. 보통 올라가는 게 더 힘들지 않나? 끙끙대는 녀석을 내버려두고 갈 길을 재촉했다.
어차피 알아서 따라올 테니까. 그렇게 별생각 없이 먹이를 찾아 한낮이 될 때까지 사냥한 결과.
[뱀사골의 공포(워그{부정형}) Lv.7] [EXP 6131 / 8932]
열심히 했는데도 아직 한참이나 남았다. 진화 후에 동물들을 섭취해 획득할 수 있는 경험치가 대폭 줄어들어 갈수록 더 힘들어진다.
'닭 한 마리 잡고 레벨 올리던 시절이 그립다.'
지금 얻는 경험치는 고라니 한 마리에 300 정도. 멧돼지가 1000. 멧돼지 3마리면 레벨을 올릴 수 있는 정도인데… 워그들과 내가 먹어치운 동물의 숫자가 숫자인지라, 이젠 동물들도 잘 보이지 않게 됐다.
도망친 경우 동물들도 제법 있을 테고. 아예 지리산에 서식하는 것 자체를 포기하고 산 밖으로 도망친 동물들 말이다.
하긴, 산을 돌아다니면서 보는 거라고는 동물들의 사체와 미지의 포식자가 있다는 공포일 테니까. 지리산의 먹이사슬 꼭대기에 위치했다가 순식간에 피식자가 됐다는 두려움. 도망치는 게 당연하다.
그런 동물도 있는 반면, 태평하게 도토리나 주워 먹으며 좋아하는 곰도 있다. 얘만 보고 있으면 내가 알고 있던 곰에 대한 이미지가 깨지는 것 같았다. 반달가슴곰이 사냥을 즐기는 동물이 아니란 것 정도는 알고 있지만, 이렇게까지 태평한가? 내가 곰의 새끼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진작 눈치챘을 텐데.
맛나게 도토리를 먹던 녀석이 별안간 고개를 돌렸다.
"구워어어!"
여태까지처럼 얼빠진 소리가 아니라 마치 무언가를 쫓아내듯 위협하는 소리. 누가 있는가 싶어 감지를 사용하기도 전에 들려오는 목소리.
"…옆구리 쑤셔."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보니 검은 늑대와 싸웠을 때 보았던 소녀였다. 이름이 이은하였던가? 연신 뭔가를 찾는 듯 두리번 거리더니, 내 옆의 곰을 보고 놀라했다.
"곰?"
잠깐 눈을 감고 집중하는가 싶던 이은하는 이내 나를 들어올렸다. 마치 비행기를 태우듯 이리저리 들어올리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맞는데. 분명히."
'뭐가 맞는다는 거야?
옆에 곰까지 있으니 아무래도 새끼 곰이라고 착각하는 모양.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끙… 무거워라."
"꾸어어어어!"
모르는 사람이 보면 어미 곰과 새끼 곰이 있는데 갑자기 새끼 곰을 들어 올렸다는 건데. 곰은 불같이 화를 내며 당장에라도 이은하에게 달려들 듯 울부짖었다.
"진짜 귀엽네…"
순간, 나를 들어올린 이은하가 묘한 눈빛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설마 데려가고 싶어 그러나 실소했다.
"꾸어어어어!"
이게 또 신기한 광경이었다. 옆에서 어미 곰이 위협하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새끼 곰을 들어올리는… 동물원에서도 보기 힘들 것 같은데.
"미안~."
어미 곰한테 사과하는 것과는 달리 이은하는 제법 진지한 눈으로 나를 살폈다.
"슬라임일 리가… 없겠지?"
그러고는 푹 한숨을 쉬며 다시 나를 내려 놓는다. 여전히 아쉬운 눈빛으로. 새끼 곰에 대한 열망이 저리도 크다면 차라리 사육사를 지망해보는 게 나았을 텐데…
***
그것이 코를 킁킁거렸다. 확실하게 숨통을 끊지 못했던 호적수의 냄새. 언젠가 먹어보았던 사람이라는 황홀한 맛의 고기. 일전에는 물러나고 말았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으리라.
군침을 흘리며 워그는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냄새를 쫓아, 워그가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