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 #12. 엇갈림
이미지의 구체화――― 미간으로부터 일직선으로 뚫린 구멍. 마력탄으로 뇌를 관통했다는 증거였지만 그럼에도 놈은 멈추지 않았다.
그 걸음은 여전히 당당하고 오연하다. 산의 폭군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놈은 쓰러지지 않았다. 설마하지만 재생이 그 짧은 시간에 뇌를 회복시켰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
거리를 두고 상황을 보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정신 고갈의 영향으로 얼어붙어, 결국 코 앞까지 다가온 놈이 턱을 벌렸다.
"……."
순간, 나는 힘빠진 웃음을 터뜨렸다. 놈의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으니까. 촉수로 뻗어 녀석을 살짝 건드리자 생동감 없이 멍하게 옆으로 쓰러졌다. 완전히 풀린 동공. 아직 심장은 뛰고 있었지만 머지않아 멈추고 말리라. 놈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에 허탈해졌다.
그래, 죽었다. 한데 그 죽음을 확인했음에도 전혀 와닿지 않았다. 당장에라도 일어나 달려들 것 같은데 놈은 여전히 바닥에 쓰러져있다. 홀린 듯 다가가 놈을 먹어치웠다.
[경험치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Lv.7 → Lv.8]
[경험치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Lv.8 → Lv.9]
[Lv.10 달성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경험치가 최대치에 도달…]
그렇게 멍하니 먹어치우고 은신으로 기척을 숨기고 경내 너머까지 달아났다. 순식간에 언덕을 오르고 내려다보며 아름다운 풍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단숨에 봉우리까지 올라 멍하니 스테이터스를 열어 확인했다.
[산의 폭군(워그{부정형}) Lv.14] [EXP 952 / 19124]
[체장 1.24m] [체고 64.7cm] [체중 34.2kg]
가장 먼저 바뀐 것은 칭호 뱀사골의 주인이 산의 폭군으로. 본래 놈이 가지고 있던 칭호를 강탈했단 뜻.
허겁지겁 놈을 먹어 치울 때까진 느끼지 못했던 기쁨이 차오르고 성취감에 가슴이 벅차오르기 시작헀다. 마침내, 이 산에서 맘 먹었던 모든 목표를 이뤄냈다.
두말할 것 없는 이 산의 최강자. 지리산을 정복했다는 사실에 고무되어 갔다.
어떤 나날들이었던가. 사투에 사투가 이어지는 다시 겪기 싫은 그런 날들이었다. 하지만 사선을 넘어 나는 마침내 여기까지 왔다.
정말 뒤늦게, 이제서야 괴물 늑대를 꺾었다는 실감이 들었다. 차오른 감격을 주체하지 못해 나도 모르게 울부짖었다.
"――――――!"
[위협(F) Lv.3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위협(F) Lv.3 → 위협(F) Lv.4]
[위협(F) Lv.4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위협(F) Lv.4 → 위협(F) Lv.5]
갑작스레 상승한 위협에 의아해하면서도 겁 먹은 동물들이 있었던 거라 여기며 다른 부분을 살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레벨. 7에서 14까지 단번에 상승했다.
대체 얼마나 경험치를 획득한 건지.
7레벨 요구 경험치가 9천 정도였고 그중 6천이 채워진 상태였다. 14레벨의 경험치가 거의 2만 가까운데 7레벨을 점프했다는 소리는 거의 10만에 가까운 경험치를 획득했다는 뜻이었다.
역시 괴물 늑대는 과연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괴물이었다.
변경 전 [힘 91] [민첩 99] [체력 167] [마력 30]
변경 후 [힘 111] [민첩 124] [체력 193] [마력 45]
스테이터스도 전체적으로 큰 폭으로 상승했다. 레벨이 오를 때마다 모든 스테이터스가 2~3가량 상승했는데 7레벨이 올랐다고 생각하기엔 유난히 많이 상승했다. 10레벨을 넘겼을 때 단번에 성장한 거겠지.
체력 193. 괴물 늑대의 체력이 233이었으니, 체력만큼은 격차를 많이 좁혔다. 내가 녀석만큼 거대해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 때는 녀석보다 훨씬 강해질 터. 스킬도 있을 테니까.
그러다 이은하에게 생각이 미쳤다.
싸우는 도중 쓰러지긴 했지만, 이은하가 없었다면 놈을 쓰러뜨리는 건 불가능했을 터. 마지막까지 살아있었고 어렴풋이 느껴지는 감지에 포착되는 기척이 있었으니 알아서 잘 데려갔을 거라 생각한다. 분명 살아있을 거다. 작게 끄덕이고, 스킬을 확인했다.
[보유 스킬 목록]
탐식(E) Lv.9, 촉수 다발(E) Lv.3, 감지(D) Lv.2, 약한 재생(E) Lv.8, 약한 은신(E) Lv.8, 염탐(E) Lv.4, 미약한 청각(F) Lv.9, 미약한 육감(F) Lv.6, 약한 시각(E) Lv.4, 모든 피해 감소(D) Lv.3, 경화(D) Lv.3, 변화(E) Lv.2, 미약한 독 내성(F) Lv.1, 위협(F) Lv.5, 공복(E) Lv.6, 수영(F) Lv.4, 잠수(F) Lv.4, 탄력(E) Lv.8, 간파(E) Lv.3, 돌진(E) Lv.3, 준족(E) Lv.3,약한 후각(E) Lv.3, 뛰어난 직감(D) Lv.1
[남은 스킬 포인트 7]
'탐식도 곧 D등급.'
사실 괴물 늑대를 먹으면 D등급으로 오르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8레벨에서 9레벨이 된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또 전체적으로 스킬들의 레벨이 상승했다.
제법 많은 스킬들이 9레벨에 도달했고 최대 레벨까지 얼마 남지 않게 됐다. 스킬 포인트도 7개가 쌓였으니 제법 여유가 생긴 데다가…
[산의 폭군 : 산을 정복한 자. 정복한 산에서 모든 생명체들이 굴복한다]
무엇보다, 이 칭호가 내가 산의 왕이 되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굴복. 아까 위협의 레벨이 2개나 올랐던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스테이터스 확인이 끝나고 하산하는 와중에 자연스레 법계사를 지나치게 됐다. 일주문. 뭐라고 적힌 건지 읽을 수 없는 한자들의 나열. 멍하니 올려다보다 계단 아래에 떨어진 털 뭉치를 발견했다.
검은색 털이었는데 내 것과는 조금 달랐다. 괴물 늑대의 것일리는 없을 테고, 십중팔구 곰…… 그에 쓴웃음을 지었다.
함께 지냈던 곰. 녀석이 여기까지 쫓아왔던 모양이다. 이미 보이지도 감지되지도 않았지만, 부디 녀석만큼은 오래 살길 바라며 나는 길을 재촉했다.
이제, 정말로 지리산을 떠날 때가 됐으니까.
***
"그래서 다시 부서 변경을 신청했다고?"
"아… 넵."
"넌 진짜 정신이 있냐? 없냐? 클랜이 장난이야?"
"……죄송해요."
"너 인마. 안 그래도 지금 징계잖아."
커피를 홀짝이던 이은하는 입술을 달싹였다. 멋대로 지리산을 찾은 대가는 뼈아픈 감봉 6개월이었다.
"…파견은 매번 부르더니."
"내가 그랬냐? 팀장님이 그랬지. 아무튼 진작에 열차 떠났다. 가서 일이나 해. 이 자식아."
"선배~ 진짜 어떻게 안 될까요? 네?"
"……."
"제 친구들 소개시켜 드릴 테니까! 네? 제발요!"
간절한 부탁에 우택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이은하의 친구들?
"그 풋내 나는 애들?"
"……."
"어쭈.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얼굴인데?"
"아니, 전혀요……?"
잠깐의 정적. 우택은 분위기를 전환하듯 길게 숨을 쉬었다.
"그래. 얘기나 들어보자. 왜 돌아오려는 거냐?"
"……."
"너 원래 헌터 일 싫어했잖아. 그래서 사무부로 옮긴 거 아니었어?"
정곡을 찌르는 것 같은 말에 이은하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난간에 기댄 이은하를 내려다보던 우택은 속으로 생각했다.
재능은 있다. 분명히 있다. 재능이 없었다면 애초에 여명에 데려오지도 않았을 터. 팀장님이 매번 파견이랍시고 아쉬워하며 끌고오지도 않았을 거다.
그래도 안 된다. 성격이 맞지 않으니까. 일전에 팀장과도 말했지만, 이은하를 수색 3팀에 다시 들일 생각이 없었다. 헌터 일을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망가지고 만다.
무언가와 싸운다는 것은 항상 자신을 갉아먹는 일. 괴물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훈련과 단련을 게을리해서는 안 됐고 괴물을 죽이더라도 피냄새가 따라다니는 고된 일이었다. 어린 아이들이야 무작정 헌터를 동경한다지만, 사실 그렇게 좋은 일은 아니다. 짧게나마 헌터로 활동해봤으니 이 녀석도 알고 있을 텐데.
재능을 놔두는 건 아까웠지만, 사람이 망가지는 것보단 훨씬 낫다. 우택은 캔커피를 흔들었다.
"다 마실 때까지 말 안 하면 나 그냥 간다?"
"…꼭 들어야 해요?"
"그럼 간다?"
"아아아아!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쫌생이."
"뭐?"
"아 좀. 못 들은 척해주면 어디 덧나요?"
은하는 한참 입술을 달싹였다.
"그, 있잖아요? 저번에… 저도 진짜 바보 같은 소리라는 건 알거든요?"
"……."
"그거 마지막에 아무것도 못 보셨냐고 물었잖아요. 그거 때문에……"
"흠."
"마지막에 분명 누가 절 구해줬었어요.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것만 확인해 보려고 갔는데……"
횡설수설하는 말로 자초지종을 듣던 우택은 답답하다는 듯 긴 한숨을 낙쉬었다.
"그게 말이 되냐?"
"……."
"네가 말한 그게 알파한테서 구해줬다? 그 산에서?"
알파. 지리산의 워그에게 붙은 코드명. 아직 잡지 못한 두 마리 워그 중 우두머리이자 현재는 진화해 다른 종이 되었을 거라 추측만 하고 있는 특수 개체.
"……네."
"그래. 그렇다고 치자."
"……."
"그 슬라임이 널 구해줬다고 치자고."
"치는 게 아니라 진짜…"
"그래서 넌 뭐하려고 돌아오겠다는 건데?"
이은하의 말문이 막혔다. 돌아가려는 이유. 생각해뒀지만, 정작 질문을 받자 머리가 새하얘지고 말았다. 자신이 하는 말이, 생각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것인지 스스로 잘 알고 있어서.
"알파한테서 널 구해줬다며. 근데 알파는 살아있잖아. 네 말이 맞는다고 쳐. 그럼 그 슬라임이 널 구해주고 죽었다는 거 아니겠어?"
확실히, 그렇겠지. 이은하는 겉으로나마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의미가 있어?"
"……."
"애초에 네가 뭘 잘못 했는지는 알아?"
"멋대로 지리산에 가서 팀원들을 방해했고…"
"아니야. 이은하. 그게 아니라고."
우택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듣고도 모르겠어? 넌 지금 망각하고 있어."
"망각…이요?"
"네 처지. 까먹고 있잖아. 너 지금 헌터도 아니야. 잘못? 그래. 물론 팀원들 방해도 했지. 그게 문책 사유는 맞아. 근데 그것보다 슬라임이 구해줬다는 헛소리하고 있잖아."
"헛소리…"
풀 죽은 이은하가 옥상의 난간에 엎드리듯 기댔다.
"너한테는 헛소리가 아닐지 모르지. 근데 우리는?"
"……."
"슬라임이 널 왜 구해줘? 그리고 어떻게 알파를 막아?"
"……."
"나야 그렇다쳐도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생각하겠어?"
지리산에 갔다가 죽을 뻔한 위기를 두 번 맞았다. 한 번은 파견 중 연락없이 독단으로 근무지 이탈. 한 번은 병상 중에 멋대로 지리산에 올랐다. 그래놓고 깨어나서 한다는 말이…… 미쳤구나. 정말. 스스로 한심해졌다. 이은하는 자조하듯 땅이 꺼져라 한숨을 뱉었다.
"그래놓고 너 지금 사무부 때려치우고 수색 3팀으로 돌아오겠다고 말한 거라고."
"……."
"다른 말 안 할게. 가서 죄송했다고 말씀드리고 일이나 열심히 해."
"…그래도요."
"그래도? 야. 너 지금 내 말."
"내 말 듣기는 했어?" 우택은 그 말을 잇지 못했다. 허리를 꺾고 고개 숙인 이은하의 모습에.
"그래도 가고 싶어요. 부탁해요."
고집부리듯 허리를 꺾은 이은하를 일으켜세우며, 우택은 우연찮게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두 눈이 무언가를 담고 있다. 깊은 감정이 담긴 그 눈을 보고 우택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선배가 절 미쳤다고 해도 좋아요. 다른 사람들이 욕해도 참을게요."
"…너."
"그래도. 전, 찾고 싶어요."
우택은 이은하의 두 눈에 담겨 있던 것이 무엇인지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것은 독기(毒氣)였다.
"슬라임 찾겠다는 게 아니에요."
"……."
"그 늑대, 알파라고 했죠?"
"네가 뭣 하러 알파를 찾아."
"죽이려고요."
망설임 없는 즉답에 우택은 이은하의 어깨를 짚었다.
"정신 차려! 이은하! 너 이제 헌터 아니라고 했잖아!"
"……."
"진짜 미쳤어?"
"저는! 절 두 번이나 구해줬잖아요. 근데……!"
그것도 못 해주면? 이은하는 입술을 짓씹었다.
"알파는 반드시 죽일 거예요. 어떻게든. 반드시."
당찬 말에 우택은 질끈 눈을 감았다. 다른 이라면 모를까, 이은하가 마음 먹었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일찍이 스퀘어에서조차 눈독을 들였던 재능. 일반고가 아니라 아카데미 출신이었다면 역대 기록들을 갈아치우고 벌써 팀장급의 인재가 됐을지도 모른다는.
그 재능이 아까워 스카웃했고, 그 재능이 아까워 팀장이 욕심을 부리지 않았던가? 정말 그녀가 그러겠다고 마음 먹으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라면……
"……."
그게 마냥 불가능할 거라 여겨지진 않았다. 우택은 진심이냐고 묻는 대신 그녀의 두 눈을 보았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은 두 눈에 가득 찬 독기가 대신 말해주고 있었으니.
"부탁해요. 선배."
"……."
"3팀으로 돌아가게 해주세요."
다시 한 번 부탁하는 그녀의 말에 우택은 난간에 기댄 팔로 이마를 짚었다. 한참을 생각하다가.
"…일단 말은 해볼게."
"……!"
"너무 기대하지는 말고. 팀장님도… 네가 돌아오는 걸 그렇게 반기진 않으실 테니까."
"고맙습니다!"
들은건지 안 들은건지. 우택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난간에 놓인 커피 캔을 건드린 은하는 픽 웃었다.
'마실 때까지 말하라더니.'
이미 빈 캔. 그 서투름에 픽 웃었다가, 떠오르는 이름에 금세 표정을 굳혔다.
"알파……"